예수님은 사람들이 질문할 때 마음에 들게 답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 내 문제를 예수님께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을 하실까요?
예수님이 답을 안 해주시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만일 답을 주셨다면 백프로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관계에서 솔직하기가 힘듭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든, 내게 실례를 하든,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죠.
그게 사회생활 잘하는 거잖아요?
의사들은 어떨까요?
의사가 병을 진단하는 데, 환자가 싫어할까 봐 병명을 속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그와 같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늘 말씀은 부자도 꺼려하고, 가난한 사람도 꺼려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 돈을 좋아하잖아요?
돈이 많다면 그게 얼마나 든든한지를 알죠.
돈이 없다면 돈만 좀 많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것 같잖아요?
오늘 말씀은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이고 믿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돈이 보여주는 것이죠.
오늘 청년은 본문의 상황에서는 영생을 얻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중요한 구원의 이치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고 우리 믿음도 잘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1. 예수님께 나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한 청년에 대해서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막바지에 접어 들었습니다.
그동안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주님은 십자가를 위해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지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같은 내용을 종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을 한마디로 말하면 젊은 부자 관원입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고 충실히 지킨 종교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선망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인 것이죠.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 것과는 분명히 대조가 되죠.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존경할만한 랍비 정도 이해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청년의 문제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랍비의 충고라면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선택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죠.
이게 선생님 말씀이라면 우리가 뭐하러 이렇게까지 배우고 지키려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이 청년에게 계명을 짚어가며 다 지켰냐고 물으시죠?
청년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를 하지 않았고 부모도 공경하고 이웃도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제자들보다도 더 나은 사람일지 모릅니다.
청년의 때에 간음하지 않는 것 어려운 일이죠.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는 것 어렵습니다.
우리 안에 다 도적이 들어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신학생들과 함께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숙소에 비치된 새하얀 수건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집에 있는 수건은 뻣뻣해졌는데 호텔 수건처럼 물기도 잘 닦였습니다.
문득 그 수건을 가방에 넣고 싶은 마음이 들어 너무 창피했다고 합니다.
청년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은 뭔가 자기에게 부족한 걸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으로 안된다는 걸 양심이 고발하는 것이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도, 돈도, 종교 생활에도 공허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뭔가 더 답을 듣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물었으니 예수님은 그에 대한 답을 주시겠죠.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께 내 문제를 기도할 때 주님은 반드시 답을 주십니다.
어떤 쪽으로든 답을 주셨지만 그걸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더 많은 것이죠.
아니면 원치 않는 답이라 흘려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2.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어떤 답을 주시는지를 보시겠습니다.
신앙에 대한 아주 중요한 진리를 우리도 배울 수 있습니다.
1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1) 청년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한 일은 율법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걸 의미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당연히 하나님께 복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죠.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말 속에는 사람이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각은 완전 틀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한이는 하나님 뿐이다.
선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죠.
모든 성경은 사람이 선하지 않고 악하다고 일관성있게 진술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선한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죄로 오염되고 타락한 형태로 남은 것이죠.
물론 사람의 본능이 다 죄는 아닙니다.
배가 고픈 본능이 죄는 아니죠.
우리가 편하고 행복하려는 마음이 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은 아니죠.
또 이런 본능은 이기적인 악한 본성에 의해서 악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강도, 살인, 강간 같은 범죄를 저지르잖아요?
선해 보이는 것들도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면 그 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보게 됩니다.
그 뿌리를 모르면 얼핏 사람에게 선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 종교와 학문과 사상들이 사람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난제인 악한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죠.
성악설이 아닌 성선설을 믿으면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하고, 우리 힘으로는 선해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영생을 위한 출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와 그 의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청년은 거기서 이미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넘어섰다고 믿습니다.
2) 청년의 또 다른 문제는 영생보다 현재를 더 원했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묻고 있지만 사실은 현재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구원 받기 원하십니까?
천국이 좋지만 지금 가기는 싫잖아요?
최고로 좋은 데 지금은 싫다가 성립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천국이 있고 영원하다면 짧은 현재의 삶이 모조리 거기에 맞춰져야 맞는 것 아닌가요?
제가 얼마 전 십 년 전에 들었던 암보험이 어떤 조건인지를 좀 들여다 보았습니다.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살펴보니 암 진단금이 천만 원 밖에 안돼서 깜짝 놀랐습니다.
치료비나 입원비 보장 금액도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순수보장형이 아니라 환급형 보험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중도해지 해도 절반 정도 환급해 주니 보장 부분이 좀 약해진 것이겠죠.
암이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니까 그런 보험을 들었나 봅니다.
백 프로 암에 걸린다면 당연히 보장성이 높게 설계했을 것입니다.
사실 70세가 넘으면 통계적으로 세 명 중 한 명은 암에 걸린다고 하더군요.
지난 주 건물주 권사님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6월에 암수술을 받게 되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암보험 설계를 다시 해야 하나 생각을 좀 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 중에 그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지 않을까요?
천국을 백프로 확신한다면 천국보장형 삶을 설계해야 하잖아요?
백프로 확신하지 못하기에 이땅에 절반, 내세를 위해 절반.
그 정도로 사는 신자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짜 천국을 믿고 있는지 자신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통계적으로도 35%의 개신교 신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의 경우를 통해 확인해 보게 하시는 것이죠.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쫒으라 하시니
예수님이 진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남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이 청년의 불신앙을 폭로하고 가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청년을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청년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청년이 율법을 배운 대로나마 지키려 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셨던 것이죠.
예수님이 청년에게 재물을 놓으라신 것은 정말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청년이 자기에 대해 모르는 걸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청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좋은 직업, 재산, 사회적인 인정을 오래오래 누리는 영생이었던 것이죠.
현재 삶에 99%, 영생을 위해 1%, 이게 청년의 인생 설계 아니었을까요?
율법을 잘 지킨 것도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인 것이죠.
그러나 율법이 가리키는 우리의 것들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지분이 들어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본래 그렇게 설계를 하셨습니다.
청년이 그대로 지킨 게 아니라 실속 없는 껍데기만 지키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줘라’
율법의 진짜 실속을 요구하시니 멘붕이 온 것이죠.
그렇게 극단적인 비교를 하니 무엇이 더 소중한지가 바로 드러나잖아요?
만일 내 믿음이 진짜인가 의구심이 든다면 그렇게 해 보시면 됩니다.
가장 소중한 걸 떠올리고, 이걸 버리고도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그렇게 하나 하나 예수님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생명을 버려도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겁나는 테스트 같지만 사실 그것이 믿음이기에 순교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할 수 있을지는 나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거기까지는 아니라 해서 부자 청년처럼 되돌아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걸 버리고 따르기까지 갈등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모든 걸 남 주고 따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오늘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부자 청년처럼 돌아서지는 않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있길 축복드립니다.
3)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이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지 청년을 시험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이 실제로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물질과 자원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지금처럼 많이 가진 사람, 적게 가진 사람이 생기도록 하셨겠습니까?
광야 40년 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한 오멜의 만나를 똑같이 주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1/n로 평등하게 사는 것입니다.
만일 아프리카, 남미, 중앙아시아, 북한, 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서 평균으로 살라면 우리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굶주리며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일일이 다 관여하지 않으십니다.
노아홍수 이후에도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맡기셨잖아요?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 속에서만 인간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세상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관여를 원치 않습니다.
구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선택대로 살게 두시는 게 신앙의 방침이십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대신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하신 마음을 성도들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소득의 십의 일을 드리는 것도 쉽지 않죠.
그런데 십의 구를 아프리카 말라위의 교육선교를 위해서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편은 미국에서 공인회계사 대표이고 아내는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학원 원장입니다.
이 분들은 말라위에 있는 고등학생, 대학생 삼천 명을 먹이고 가르칩니다.
백 명으로 시작했을 때 일 년에 일억 사천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삼천 명이니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죠.
지금은 NGO단체를 만들어서 일부는 후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해마다 이분들이 수십 억씩 부담을 하고 있습니다.
말라위는 지금도 춘궁기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빈민들은 이틀에 한 끼 정도 먹으며 춘궁기를 버틴다고 합니다.
말라위는 세계 최빈국이지만 치안이 아주 좋고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자원이 하나도 없어서 외세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피차 가난하니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서 평화롭다니 아이러니죠.
아내 권사님 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인데 딸 대학 보낼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척이 사는 미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낮엔 바느질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하며 미국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남편 집사님은 홍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았습니다.
누나는 곱사등이고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불우한 집안입니다.
이분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뻔하죠.
이렇게 자랐지만 하나님은 이분들을 통해 삼천 명 학생들을 먹이고 가르치게 하신 것입니다.
백 명으로 시작했지만 더 많은 학생들을 도울 수 있도록 점점 더 물질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십의 구를 선교에 사용하고 남은 십의 일로도 충분히 먹고 산다고 합니다.
우리가 월급을 받으면 거의 카드 대금, 공과금, 고정지출로 다 빠져나가죠.
우리도 간신히 살아갑니다.
그렇게 산다고 죄짓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서 빈궁한 자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부족함 중에 이웃을 돌아본다면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복을 점차 더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구호단체 같은 곳에 정기 후원도 좋습니다.
매달 적은 금액이 빠져나가는 건 살림살이에 크게 영향은 없습니다.
내가 좀 줄여서 누군가의 절박함을 채워줄 수 있다면 귀한 것이죠.
돈에 대한 그런 자세가 내가 하나님께 맡긴 사람인지를 확인시켜 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청년은 결국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청년은 이날 비로서 자기가 영생보다는 돈과 현실을 더 사랑한다는 걸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의 절대적 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3. 그래서 청년의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이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23절,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절,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이 말씀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자는 돈의 권력을 알기에 더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부자들이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갈구하는 게 노예나 다름없는 것이죠.
우리도 돈 없으면 힘들지만 부자가 가난해지면 정말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렇기에 돈이 하나님처럼 되기가 쉽다는 말씀이죠.
돈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든 우리가 남보다 나은 것, 강점들은 오히려 신앙적으로 취약점이 되기 쉽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조차 믿음의 취약점이 되는 게 인간입니다.
남보다 나은 것은 백프로 교만하게 만듭니다.
장점이 우상이 되죠.
오늘 눈앞에서 일어난 이 상황을 지켜 본 제자들이 아주 놀랐다고 합니다.
25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구원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 자기들의 생각과 너무 달라 심히 놀랐다고 하죠.
부자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인정한 사람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들은 선지자를 제외하고는 다 부자였고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아브라함도 거부였고, 욥도, 다윗왕도 돈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 다니엘은 높은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니 혼란스러워진 것이죠.
사실 신약의 교회시대에 와서는 자기만 잘 먹고 사는 성도들은 없습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자발적으로 밭을 팔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기 시작하잖아요?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정확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천국보다는 이땅을 더 좋아합니다.
천국이 인기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이때 베드로가 한발 나섭니다.
이러다가 우리도 위험하겠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자기들이 모든 걸 버리고 따랐으니 받을 보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버리고 따른 것일까요?
제자들도 역시 아직은 세상의 것을 버리지는 못한 것이죠.
예수님은 아직도 그런 말을 하냐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결국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릴 것을 아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에서 받을 영광과 이땅에서의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버린 것이 부자청년에 비하면 대단치 않을지 모릅니다.
마태는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 직업을 버린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들은 비린내와 함께 사는 천한 직업을 버린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애환 속에 살아가는 인생일지라도 사람들에겐 그게 전부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작은 것을 희생하며 주님을 섬긴다 해도 주님은 대단하게 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건강, 물질, 믿음, 환경이 얼마가 되건 그것으로 주님 따르라고 하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섬기면 됩니다.
한 여성이 밤에 도로를 건너다 십오 톤 트럭에 깔립니다.
몸의 반쪽은 거의 다 으스러졌습니다.
스무 차례 수술을 받는 동안 어린 아들이 자폐라는 판정을 받았고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고 두 모자를 떠났습니다.
울기 위해서 찾아간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죽으려고만 했던 이 집사님이 하나님을 만나니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성경필사를 시킨 아들은 기적처럼 자폐가 나아졌습니다.
이 집사님은 지금도 골반 뼈가 부서지고 괴사 된 상태라 걷는 것도 힘겹습니다.
이분이 매주 토요일 아들을 데리고 청소도구를 들고 교회로 갑니다.
교회 계단과 구석구석을 불편한 몸으로 아들과 함께 꼼꼼히 청소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으니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데서도 무언가를 찾아 헌신하더군요.
우리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 다 무언가를 희생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이땅의 복과 영생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청년은 두 가지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돈을 포기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예수님 따르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돈을 포기하라는 게 삶을 포기하라는 건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더 나은 삶과 영생을 주시려고 했는데요.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게 어쩌면 믿음이 부족한 우리의 근심일 것입니다.
영생은 막연하고 멀지만, 현실과 돈은 당장 오늘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내 육신은 결코 세상 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쥐어 주심으로써 이미 손에 쥔 것들을 조금씩 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법정스님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김00여사가 있습니다.
김여사는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습니다.
오래 전인데 당시 시가 1,000억에 달하는 대원각 부지를 법정스님에게 시주했습니다.
그 돈으로 지어진 사찰이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입니다.
김여사는 거액의 재산을 미련 없이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요’
사람이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돈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죠.
인간의 위대함이기도 하죠.
말라위에 삼천 명 학생들을 기르는 부부도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선교를 시작하기 전 부부는 말라위를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굶주린 그 나라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교회에 와서 앉기만 하면 폭포수같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권사님에게 느끼게 해 주신 것이죠.
자기의 마음, 자기의 판단으로가 아닙니다.
주님의 긍휼의 마음을 계속 부어주시기에 그 불편한 말라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사람들을 향한 그런 긍휼의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 가족들에게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길 원합니다.
어떤 여건 속에라 해도 예수님을 따르며 이땅에서도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태복음20장29절-34절 (떠난 자와 따르는 자) (0) | 2026.06.09 |
|---|---|
|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7장1절-8절) (0) | 2026.05.29 |
| 마태복음15장1절-11절 (입술로는 공경하나) (0) | 2026.05.21 |
| 씨 뿌리는 비유 (마태복음13장1절-9절) (1) | 2026.05.21 |
| 가정의 달 설교 (마태복음12장46절-50절) 예수님의 새 가족 (1) | 2026.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