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누가복음18장9절-14절)

남수연 2025. 4. 6. 03:14

이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사순절에 해당하는 시기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몰려든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죄인들이 구원 받게 하는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딴 것은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일생의 중대사는 내 구원을 항상 점검하며 구원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믿음을 예수님의 말씀에 늘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두 사람의 기도를 보면 그들의 신앙을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했겠습니까?

신앙생활 면에서 당연히 바리새인의 신앙을 더 인정했을 것입니다.

자기 구원에 대해서도 바리새인은 확신했고 세리는 스스로 자격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결과는 정반대였죠.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은 유대교의 실패와 바리새인의 파멸입니다.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인정받던 종교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가 구원에서 벗어난 종교라고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구원을 확신합니까?

자기가 구원의 기준이 돼서 남의 믿음까지도 다 정죄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구원과 심판으로 완전히 갈라 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회색지대에 숨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중간지대의 여지를 두신 적이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쪽일까요?

아마도 내가 바리새인 쪽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리의 기도를 하고 있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이런 말씀을 주실 때, 다시 원점에서 우리 믿음을 검토해 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구원을 확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정반대의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9,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바리새인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구원받지 못한 자로 분류됩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 뜻이 말해주듯이 바리새인들은 세속과 구별되어 율법대로 살려는 유대교 분파입니다.

오늘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하잖아요?

그런데 왜 이들은 실패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자만심은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장은 나오지만 바리새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 사백 년 정도 침묵기가 있죠.

그 사이에 알렉산더대왕이 주변 나라들을 제패하고 거대한 헬라제국을 세웁니다.

식민지 나라들을 헬라어로 통일하고 헬라문화를 보급합니다.

헬라제국은 오래가지 못해 로마에 멸망당합니다.

뒤를 이은 로마제국은 광대한 식민지 영토를 도로망으로 연결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죠.

나중에 바울사도가, 로마황제가 깔아 놓은 도로를 따라 알렉산더가 통일한 헬라어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볼 때 하나님의 침묵이지만 하나님은 어느 때보다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 계셨던 것이죠.

하나님의 침묵은 절대로 무관심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 침묵기에 헬라 문화의 공격으로부터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 목적으로 비장하게 결성된 분파가 바로 바리새파입니다.

자기들 힘으로 민족의 신앙을 지켜냈다고 생각하니 자긍심이 대단했겠죠.

스스로도, 남들에게도, 하나님 신앙을 지켜낸 영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뭐가 문제였겠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하셨으니 칭찬을 받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들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스스로 의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이스라엘이 실패했을 리가 없죠.

의를 행할 수 없는 자들이 율법 수호자로 소문이 났지만 겉과 속은 점점 더 괴리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인정과 기대에 부응하려니 점점 더 율법에 얽메이게 됩니다.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이 되려 하니 잘 지킨다는 한계가 어디겠습니까?

점점 더 율법을 세분화하고 실천할 조목들을 만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결국 구약성경과 다른 자기들만의 율법을 만들고 남들과 차별화시켰던 것입니다.

로마 압제 아래 허덕이며 살던 보통 사람들은 그걸 다 지킬 수가 없죠.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주일도 지키지 못할 직장을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리새인들의 경건 생활은 차라리 사치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기준에 율법 안 지키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사탄의 자식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 죄인 취급 받으셨잖아요?

본문에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율법 잘 지킨 자랑이 하늘을 찌릅니다.

11,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았고 세리와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죠.

12,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드렸다고 합니다.

물론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율법이 금한 것을 안 하고, 금식하고 십일조 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에게는 의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세리에게는 그게 있었던 것이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에게는 없고 세리에게는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죄인 됨을 통렬히 인식하는 애통함입니다.

세리는 자신의 죄를 통렬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세리는 무슨 죄로 가슴을 치며 이렇게 간절히 회개하고 있는 걸까요?

과도하게 세금을 매겨 부정 축재한 것을 회개했을까요?

번 돈으로 사치하고 방탕하게 쓴 것을 회개했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세리직을 그만두면 되겠죠.

아니면 정직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청렴하게 살면 되죠.

저 정도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가짜 회개죠.

그런데 예수님이 세리의 기도를 진정이라고 인정하신 것이잖아요?

세리에게는 절대로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 근원에 있는 죄를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바울사도의 죄인식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인식도 똑같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죄인식은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죠.

세리가 성전에 나온다는 것은 스캔들에 휩싸인 연예인이 사람들 앞에 서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을 다른 길이 없으니 어떡하겠어요?
멸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와 애통하게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구원을 주십니다.

그 절망의 죄를 대속해 주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 것이죠.

오늘 이 세리가 주님의 제자 마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은 구원받을 만한 죄인식과 회개가 없기에 현재 구원받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둘을 판단하실 때 행위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행위로만 보면 아무래도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낫지 않았겠습니까?

행위의 공로나 지은 죄가 전혀 계산되지 않았다는 것이 비유의 포인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노력과 헌신을 무시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건 심판의 저울에 앉은 먼지의 무게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로 나누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근원을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과 그 결과로 받을 심판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새신자 때는 분명치 않을 수 있지만, 신자들은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이 죄인의 출발선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그리스도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죄의 실체와 영구적인 파괴력을 깨닫지 못하는 한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연합될 수가 없습니다.

뭔가 겉돈다는 것이죠.

자기 악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저렇게까지 해서 날 구원하신다는 게 의아할 뿐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생각하면 왠지 불편하고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적용점을 찾아 봅니다.

바리새인처럼 교만하지 말고 세리처럼 겸손하자는 뭔가 부족합니다.

우리 본성은 본래 교만합니다.

남보다 내가 더 중요하고, 모든 게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은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픈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교만하지 않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 해도 안됩니다.

옛날 수도사처럼 금욕하고 몸을 괴롭혀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리에게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세리라고 자기가 남보다 못하다고만 생각하겠습니까?

세리처럼 돈 많은 부자들은 나름 교만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본질적인 죄를 예리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인간 됨됨이가 막장이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악함을 당면하는 순간마다 마음이 쿵하고 떨어지는 절망감을 세리처럼 항상 느껴야 우리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의식이나 죄책감하고는 다릅니다.

죄를 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죄인식을 한 사람은 오히려 죄의식이나 죄책감이 없습니다.

내 죄의 정체를 분명히 알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분명히 보이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껴안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막연한 죄책감이 아닌, 구원받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죄인식에 대한 부분이 부족한 것 같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잘못한 것들을 떠올리며 의도적으로 회개하는 것도 죄인식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고 있는 나를 항상 감시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나를 두었다면 빨리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진짜 높은 자리에 올려주시는 것입니다.

2025년4월2일 수요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