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을 이루라 (고린도후서6장14절-7장1절)
올해로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가 140주년이 됩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왔을 때 이땅은 불모지였습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일 기반이 전혀 없었죠.
박해와 배척만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첫 순교자는 이보다 20년 전 대동강에서 성경을 배포하다 칼에 죽은 토마스선교사입니다.
당시 27세였던 토마스 선교사는 14살에 옥스퍼드대학교에 합격한 수재입니다.
의학공부를 했고, 10개국어를 마스터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토마스선교사와 함께 선교를 위해 중국 등지로 떠났던 꽃다운 나이의 선교사들이 여덟 명이었습니다.
그중 단 한 사람도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믿음이 지치고 늘어질 때, 내 구원을 위해 예수님과 주의 성도들이 어떤 댓가를 치렀는지를 생각하고 힘을 내야겠습니다.
더 오래전인 2천 년 전, 그리스의 도시 고린도에서, 선교사 바울의 그 헌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것은 이 편지를 쓰기 5년 전입니다.
조선에 처음 복음이 들어올 때처럼 고린도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당연히 다른 도시처럼 고발 사건과 난동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18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했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그래서 바울사도가 일 년 육 개월을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백성’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앞에서 고린도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받은 은혜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이 아니어서 그런 건 아닌 것이죠.
변화되지 않고 열매가 없는 나를 보며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은혜의 열매가 없는 원인 중 한 가지를 본문에서 지목합니다.
고린도성도들이 어떻게 세상과 달리 살아야 하는지 그 정체성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거룩이 없다는 것이죠.
신구약의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거룩의 열매를 찾으십니다.
사실 성도란 말 속에 이미 거룩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속된 성도란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다시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1.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합니다.
1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성도들의 거룩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모든 불신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1)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인 배우자나 가족들의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죠.
멍에를 함께 멘다는 것은 밀착된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에서 우리 인생의 수고와 괴로움이 느껴지죠.
그러니 멍에를 같이 메고 내 인생을 경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관계입니까?
그래서 우리 청년 때 목사님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불신자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든 불신자들과의 결혼을 금하는 건 현실적으로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배우자나 이성 교제의 원칙은 오늘 말씀대로 적용하는 게 맞습니다.
모든 계명들이 그렇듯,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는 각자의 몫이죠.
그러나 배우자를 만나는 건 평생이 좌우되는 문제입니다.
그 불순종은 결혼 기간 내내 영육의 삶을 고달프게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미 결혼한 믿지 않는 배우자의 관계에 있어서는 고린도전서에서 원칙을 주셨습니다.
그런 경우는 배우자의 구원을 생각해서 함께 사는 것을 더 권합니다.
고린도전서7장16절,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그러나 우리 인생의 문제 중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가 가정사입니다.
가급적 원칙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잘 인도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2) 본문 말씀의 직접 타겟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경계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쉽게 끊을 수 있는 인간 관계도 있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멀어지면 되죠.
그런데 끊기가 어렵게 엮인 관계들이 있습니다.
생계가 걸린 관계들은 내 임의대로 끊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오래 친밀한 관계를 쌓아온 친구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신자들이 믿기 전의 관계를 다 끊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그러려면 우리가 다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런 교분을 이어가는 목적은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는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린도의 모든 문화는 그리스의 다신교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과거처럼 신전에 드나들며 축제에 참여하고 음란한 생활을 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각자 섬기는 우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성도들이 안 믿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그런 목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이것은 너희 인생이 지금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관계는 심각하게 고려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세상과의 구별을 ‘멍에를 함께 메지말라’고 한 것은 바울사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신명기 율법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거기에서 세상과 함께 하지 말라는 뜻이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2장10절,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겨리한다는 것은 두 짐승에게 한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걸 말합니다.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어서 밭을 갈지 말라시는 것이죠.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소하고 나귀하고 한 멍에를 메고 밭 가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그림이 좀 우습죠?
소와 나귀는 보폭이 다르고 성격이 달라서 같이 멍에를 멜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오딧세이아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미친 척 하기 위해 소와 나귀를 한데 묶어 쟁기질을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쳤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말씀은 농사법을 가르치시려는 게 아닙니다.
이 규례 앞뒤로는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는 규례가 나옵니다.
이것들도 실제로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서 뿌리면 생육이 달라서 돌보고 수확하는 게 어렵습니다.
양털은 보온을 위하고 베는 시원한 맛에 입죠.
두 재료를 섞어서 옷감을 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 금령을 들을 때 굳이 이런 말씀을 왜 하는지 고개를 갸웃했을 것입니다.
왜 하지도 않을 일까지, 또 하지 말라고 강조하시는 걸까요?
그만큼 혼합하고 섞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는 것이죠.
가나안 부족들과 혼인하고 문화와 종교와 섞이지 않도록 율법으로 철책을 쳐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레위기에서 살펴 본 음식 규례와 같은 것이죠.
부정한 동물을 정해 주시고 식용을 금할 뿐 아니라 만지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하셨잖아요?
주변 민족과 거리를 두도록 최대한 막아보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잖아요?
오늘 말씀은 세상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는 이 세상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우리를 거기로 끌고 가기에 분리되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단짝이 되어 있다면 내 인생의 경작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고린도성도들이 깨닫고 인정하도록 계속 예를 들어 설득 합니다.
1) 다섯 가지 대조군을 통해 설명하죠.
잘 보면 이 다섯 가지 짝들은 절대로 공존이 안되는 것들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의와 불법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불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공존하겠습니까?
어둡든지 밝든지 둘 중 한 가지 상태만 가능한 것이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그리스도와 사탄이 과연 의견이 합치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부동산을 공동명의로 취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장차 얻을 기업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하나님과 우상은 교회 안의 불상 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입니다.
성도와 이 세상은 결말에 가면 이것들처럼 공통 분모가 하나도 없다는 게 밝혀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묵상에서 이 세상 바벨론과 그를 따르던 자들의 결말을 보셨잖아요?
그때 가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스텐스를 분명히 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구약성경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리될 것에 대한 근거를 가져옵니다.
16절 하반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한 군데서 인용한 게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이런 이유로 분리를 명령하신다는 것이죠.
16절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우리의 신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성막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17절,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세상 속에서 구별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부정합니까?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세계는 부정하지 않은 정한 상태였죠.
죄가 들어온 세상은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고결해 보이는 것이라도 세상은 아담의 죄와 함께 부정해졌습니다.
레위기 율법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르치시는 것은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고 하셨잖아요?
부정해지면 계속 제물의 제사로 속죄하고 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유대교인들이 밖에 나갔다 오면 꼭 물로 씻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인류애도 있고, 예술도 있고, 자선도 있고, 윤리나 도덕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부정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면 세상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세상은 교회가 거룩한 걸 좋아합니다.
교회 다닌다는 가족이나 친구가 세속적이면 겉으로는 같이 놀아도 속으로는 씁쓸하게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 되게 사는 모습에 비신자들도 막연하나마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비신자들에게도 기댈 언덕이고 유일한 희망입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떠올리며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 모든 것을 알았으니 이제 결단을 하라고 촉구합니다.
19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구원은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대신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천국과 지옥 앞에서 십자가를 져야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십자가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져 주셔서 내가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주님을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십자가 지는 것보다는 가볍잖아요.
물론 내가 십자가를 백 번을 진다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죄와 세속에서 나와 거룩하게 되라면 그걸 못하겠습니까?
거룩할수록 좋은 것은 나 자신이잖아요?
영과 육을 더럽히는 모든 것에서 스스로 멀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전에 주영0 씨가 점집에 갔던 이야기를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녹음을 하고 밥을 먹으려는 데 시간이 점심 장사가 끝난 브레이크 타임이었습니다.
혹시 밥이 되나 하고 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식당 주인이 무속을 신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주영0씨가 들어오기 전에 평소에 자주 찾던 무속인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다짜고짜 하는 말이 ‘너 지금 일어나서 음식 차려. 귀인이 오셔’ 그런 거예요.
식당 주인은 무당 말대로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영0씨가 문을 열고 쑥 들어 온 것입니다.
식당주인은 주영0 씨를 그 귀인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주영0씨는 백반 하나 시켰는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이 나왔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갈비찜도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속사정도 모르고 잘해 주니까 친한 단골이 된 것이죠.
이후 식당주인은 가게를 옮긴 뒤에도 주영0씨 녹음하는 날이면 지극정성으로 밥을 해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서 점을 보고 주영0씨에게 자꾸 전화로 알려주는 거예요.
이런 저런 것 조심하고, 오늘 그 쪽 방향으로는 가지 마시고.
이 정도면 관계를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맛있는 밥 얻어 먹는 재미에 꽤 오래 교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주영0에게 괴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일이 어떻게 해결될지 초조하고 다급한데 기도해도 응답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식당주인에게 무속인 전화번호를 받아서 찾아갔다고 합니다.
자기는 목사님 아들이고 평생 신문에 나온 오늘의 운세도 안 보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심적으로 너무 약해지니까 무당을 자기 발로 찾아가게 되더랍니다.
점집을 찾아가서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데, 드라마에서 보던 대로 온갖 형상들로 빼곡한 제단 앞에 무속인이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들어가려는 순간 안에서 뭔가 퍽 치는 바람에 뒤로 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구토가 나서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구토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죠.
자괴감에 빠져 빨간 신호등 앞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택시가 와서 쾅 들이 받았습니다.
택시기사가 나와서 자기도 왜 그랬는지 그냥 추돌이 되었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자기 뒤통수를 한 대 치셔서 정신이 버쩍 들게 하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밥상으로 무속에 점점 마음을 열다 귀신에게도 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과 악을 가까이 하면서 내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 변화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속사람은 거듭났지만 겉사람은 아직도 죄와 세상 편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내가 태어난 이 세상에 더 끌립니다.
그러니까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할 대상은 불신자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할 옛사람이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함께 메야 할 것은 예수님의 멍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마태복음11장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자꾸 옛사람의 멍에를 메면 인생의 짐을 내려 놓고 쉴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힘든 것은 거의 옛사람이 벌여 놓는 일 때문입니다.
옛사람이 쏟아 놓는 감정 때문에도 사람관계가 어려워지잖아요?
옛사람의 죄와 습관과 무질서와 어리석음이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야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시편 81장6절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우리가 세상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하지만, 내 옛사람과도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언행을 주님께 배우며 주님의 인도에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그리고 영과 육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악령의 일들이 영적으로 더러운 것들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영적인 혼잡이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받고, 예수님의 계명의 순종하는 성도들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선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또 우리의 육도 믿음 안에서 잘 관리해야 합니다.
몸을 건강하게 잘 관리하고, 해로운 것을 멀리하고, 음행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몸이 약해지고 병들면 영도 피곤해지기 쉽습니다.
피곤한 영은 만사가 시들해지죠.
노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노쇠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급속한 노쇠로 삶의 질과 믿음이 함께 떨어지지 않도록 건강 증진을 위해서 우리가 더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영과 육이 조화있게 거룩함을 함께 이루어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 왜 은혜의 거룩한 열매들이 없는 것일까요?
왜 현대의 교인들은 세련미는 있는 데 거룩은 안 보이는 것일까요?
세상과의 사이에 경계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를 즐겁게 하고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선 무한대로 열려 있죠.
세상이 우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이 이상은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내 앞에 바짝 선을 그어 놓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정도만, 정해 놓은 만큼만 신앙생활을 반복하는 것이죠.
이것이 성도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고 경험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호세아선지자는 간절히 권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에 내가 제한해 놓은 선을 없애야 합니다.
정한 만큼만 하는 것으로는 믿음의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변하지 않는 내 믿음에 내 스스로가 권태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믿음을 더 강하게 만드는지는 다 알잖아요?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너무 미적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만 하지 말고 당장 휴대폰을 내려 놓고, 당장 성경을 펴야 합니다.
당장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의 영과 육을 위해 더 좋은 것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무엇을 끊어가야 할지 살피고 선을 그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거룩을 이루어 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