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1장1절-4절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소망의 인내)
요즘 주일설교에서 고린도후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9월 매일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로 시작합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죠.
바울사도가 쓴 서신서가 열세 개입니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선교사 바울의 사역이 참 고달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워놓은 교회 중 걱정 없는 교회가 단 한 군데도 없었으니까요.
그것은 반대로 성도들의 삶이 그만큼 지난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음의 길이 뻥 뚫린 대로를 달려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길이 꽉 막히고, 때로 접촉 사고도 나고, 차 안에서 싸움도 일어나고, 기름 떨어진다고 주유 경고등이 들어오고.
믿음의 길에도 인생 도로에 존재하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9월에 묵상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삶에서 만나는 시련의 답을 데살로니가서를 묵상하면서 잘 찾게 되시길 바랍니다.
1. 먼저 바울사도의 전도여정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사도의 전체 전도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제외하면 거의 서신서입니다.
서신서를 이해하려면 바울사도의 선교 여정에 대해 아는 게 필요합니다.
성경도 좀 알고 읽어야 유익하고 은혜도 됩니다.
성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올 때 정말 재미있잖아요?
바울사도의 1차 선교여행지는 이스라엘과 가까운 소아시아 지역입니다.
지금의 튀르키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 골로새, 갈라디아교회가 소아시아에 있습니다.
2차 선교여행지는 좀 더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의 관문인 그리스지역입니다.
성경에는 헬라라고 번역되어 있죠.
그리스의 북쪽이 마게도냐이고 남쪽이 아가야입니다.
마게도냐의 대표적인 교회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아가야의 대표적인 교회는 주일에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리고 1,2차 선교지를 재방문 하는 게 3차선교여행입니다.
외워지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몇 번 듣다 보면 서신서에 대한 맥이 좀 잡힙니다.
2.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전도한 내용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1 그들이(바울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데살로니가 도시의 구성원은 주로 헬라인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던 것이죠.
회당엔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헬라인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이 회당의 안식일 예배를 찾아간 것입니다.
랍비인 바울은 말씀을 강론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친 것은 세 번의 안식일이었다고 하죠.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그렇게 복음을 듣던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죠.
오히려 불량배를 풀어서 소요를 일으키고 바울 일행을 관청에 고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그렇게 두고 온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고린도교회 목회 당시 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보낸 것입니다.
잘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3. 편지를 보낸 이유는 데살로니가성도들을 향한 바울사도의 사랑입니다.
짧은 기간에 세워진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을 잘 지키는 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울사도의 그런 고마움과 사랑은 편지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함께 데살로니가 전도를 했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인사말이 편지 서두에 형식적으로 하는 평범한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1세기 박해 속의 성도들에게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정말 그들의 안위를 묻고 그렇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인 것이죠.
다음 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해서 목숨까지 줄 수 있다는 것이죠.
바울의 과장법일까요?
그런 마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 사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바울은 유대인이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헬라인입니다.
외국인은 내 민족과는 당연히 거리감이 있잖아요?
복음 안에서 한 형제가 되고 나면 그런 말은 무색해지는 것이죠.
안산 원곡에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변호사사무실이 있습니다.
그곳을 운영하는 최정0변호사가 바로 그걸 보여줍니다.
최변호사는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법률구조공단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오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프라가 다 갖춰진 대형교회에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자꾸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이 모인 안산의 한 교회로 옮기게 됩니다.
주일에 안산으로 와 예배드리고 법률상담도 해 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죠.
이주민들이 억울한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다음 주일에 와서 보면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법도 잘 모르고 언어도 서툰 이주민 성도들이 혼자 움직일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최변호사가 고민 끝에, 직장을 나와 아예 안산에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는 게 그런 것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관계는 혈연을 뛰어 넘습니다.
교인들은 단순히 같은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만 함께 드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저는 말세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몸이 된 교회와 성도들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교회가 훨씬 더 필요할 것입니다.
가족애는 볼 것 못 볼 것 다 보면서 애증을 극복한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 결속된 신앙공동체가 없다면 믿음이 도전받는 마지막 때 가장 먼저 신앙의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성도들이 복음을 받고 제각각 신앙생활 한다는 건 불가능이죠.
믿음의 공동체가 없었다면 민족사회의 눈총을 견뎌내지 못하고 믿음은 사그러들었을 것입니다.
서신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왜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주시는지를 잘 이해하게 되길 바랍니다.
4. 오늘 핵심 내용인 바울의 세 가지 감사기도입니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에 있는 세 가지를 감사하며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의 연륜은 짧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 확실한 구원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런 것들을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내게서 그런 모습들이 있는지, 우리교회에 그런 증표가 나타나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죠.
1)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열심히 활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만들어낸 변화나 결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믿음이 이전과 다른 어떤 결과를 만듭니다.
전에 어떤 교회에서 노숙자 한 분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이분이 어떤 생각으로 교회에 오기로 했는지 모르지만 새신자 과정을 다 나와서 들었습니다.
처음엔 모자를 눌러쓰고 사람들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배우는 사이에 이분이 점점 달라진 모습으로 교회에 옵니다.
머리도 깎고 옷도 깨끗하게 입고 얼굴도 점점 밝아집니다.
그리고 새신자과정을 다 마치고 수료식을 할 때 이분이 간증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게 너무 감사하고 난생 처음 행복을 알았다고 성도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믿음이 한 노숙자 안에 들어갔을 때 한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죠.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서 바울이 그런 변화된 삶을 본 것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의 역사를 나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어 있습니다.
2) 사랑의 수고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수고가 나타납니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의 여동생의 이름입니다.
왕의 여동생의 남편이 이 도시를 지어서 아내의 이름으로 헌정한 것입니다.
이 도시에 짙게 깔린 황제숭배의 그림자가 느껴지죠.
이런 사회에서 다른 왕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은 궁핍과 불안정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손에 힘이 있는 성도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고된 수고로 더 연약한 성도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고린도후서 설교에서 말씀드렸죠.
마게도냐성도들이 궁핍한 중에도 힘에 지나도록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참여했다구요.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귀하지만 사랑의 수고는 없는 중에도 덜어내서 형제를 섬기게 합니다.
참된 교회의 징표, 참된 성도의 표식은 이렇게 서로 사랑의 수고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서로 사랑의 수고를 하는 모습에 저도 바울처럼 하나님께 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3)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다.
인내라는 말은 환경에 눌려, 수동적으로, 할 수 없이 참는 게 아닙니다.
인내는 반대에 직면했을 때 능동적으로 참아내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소망에서 옵니다.
아무런 보장도 소망도 없이 참는 것은 고통이 따르고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참는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도 황당하고 성가신 일로 근심하셨을지 모릅니다.
대책이 없는 문제에 걱정만 하다 하나님을 떠올리면 생각이 점점 달라집니다.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하실거야, 지금 이 상태에도 감사할 게 있네.’
이런 소망이 생기며 적극적으로 인내하게 되잖아요?
무엇보다 가장 큰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가 받을 영광입니다.
내 인생에서 혹시 거둬내지 못할 가시를 안고 산다 해도 이 소망이 그 힘든 인생도 인내하게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자기의 소망을 간증하며 살고 있잖아요?
뒤에서 나오겠지만 특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를 칭찬하며 기도했던 것을 세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와 교회의 표징입니다.
이 세 가지 기둥이 우리의 믿음과 교회를 견고히 떠받치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025년9월3일수요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