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이사야서32장1절-10절 (광풍을 피하는 곳)

남수연 2026. 9. 2. 02:27

1. 구약성경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왕이 백성들의 운명을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죠.

지금 전쟁하는 나라들 보면 다 지도자에게서 시작된 문제입니다.

가난과 폭력과 불안에 시달려 국경을 넘는 난민들의 문제도 정치권력의 부패가 원인입니다.

북이스라엘 호세아왕은 앗수르를 섬기는 대신 애굽과 동맹을 맺었죠.

그것은 나라가 살 길이 아니라 멸망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앗수르를 섬기는 게 낫냐, 애굽을 섬기는 게 낫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겐 분명히 섬길 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을 잘 섬겼다면 아무리 작은 나라 이스라엘일지라도 강대국을 섬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선한 왕들의 시대를 보면 알 수 있죠.

하나님이 국가를 강성하게 하시거든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결과 강대국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있으시지만 강대국의 군주들은 자비가 없습니다.

그 상황을 이사야서 5123절에서 기가 막히게 표현하죠.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이,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비유가 아닙니다.

고대국가에서 점령군이 패전국 귀족들의 등을 밟고 성문으로 들어갔던 것을 말합니다.

비참하고 수치스럽죠.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 임금의 일화가 있잖아요?

인조 임금이 지금의 석촌호수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복해서 신하의 예를 올리게 되죠.

태종이 요구한 절의 절차는 가장 엄격한 삼배구고두법입니다.

절을 한번 할 때 머리를 바닥에 소리가 나게 세 번 찧는 것입니다.

쿵쿵쿵이죠.

그렇게 세 번의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찧은 것입니다.

소리가 크게 나야 진정성이 있는터라 인조임금의 얼굴에 피가 낭자했다는 굴욕적인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우리 인생에 남에게 모멸당할 일은 없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안 보고, 애굽을 보고 앗수르를 계속 본다면, 결국 거기에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 남에게 무시당하는 거 보고 속이 뒤집히지 않는 부모가 없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이 모멸을 두고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셨지만 그게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2. 본문은 하나님이 짓밟힌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바르게 통치할 왕을 보내주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들이 회개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회개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먼저인 것이죠.

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공의는 상대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왕이 세상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대로 백성들을 통치한다면 백성들의 복인 것이죠.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했던 왕의 시대엔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잖아요?

이런 걸 보고 우리가 잘 깨달아야 하는데요.

자꾸 눈을 돌려 세상 애굽을 바라보고, 당장 다급한 문제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안 본다니까요.

보라, 하나님이 보내신 왕을 보라시잖아요?

하나님이 보내신 나의 왕이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시죠.

그러나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이 칠백 년 뒤 오실 예수님만을 약속한다면 그 시대 백성들에겐 아무 혜택이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말을 듣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해당 됩니다.

이사야선지자의 시대로 볼 때 히스기야왕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이중적으로, 다윗의 뿌리에서 나올 참 왕 예수님을 담고 있는 것이죠.

예언 전체를 보면 한 인간 왕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걸 알 수 있잖아요?

히스기야왕은 우상숭배를 쇄신하고 방치된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고 제사제도를 복구합니다.

중지되었던 유월절을 회복시켰습니다.

열왕기하 186절은 히스기야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여호와께 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우리의 일생은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요?

우리의 죄는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착하고 의로운 행실은 반드시 평가받고 상급을 얻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공의대로 국가를 다스렸던 탁월한 왕이었습니다.

당시 남유다도 파멸을 향해 달려가 곧 벼랑 끝에서 떨어지게 되었죠.

하나님이 파멸을 멈추게 할 왕을 보내신 것이죠.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앗수르의 185천명이 멸절되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남의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이 멈춰주시지 않았다면 절벽으로 추락했었을 위기가 없으셨나요?

우리 잘못으로든, 인생의 강도를 만나서든, 죽을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사건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 갔지만 어떻게 떨어져 망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지옥에서만 구하신 게 아니라 삶의 나락으로부터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왕이신지를 항상 기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 2절부터는 노골적으로 메시아의 구원을 예고합니다.

한 사람 왕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하나님은 어쩜 이렇게 우리 인생길을 잘 아실까요?

인생엔 광풍과 폭우가 있고 메마르고 곤비한 땅을 걷게 될 때가 참 많죠.

-그때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미친 바람이 불 때가 있잖아요?

어떤 문제에도 답은 피난처인 예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뻔한 답을 앞에 두고 먼 길 돌아가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그 사람은 폭우를 가리는 곳입니다.

이번에 거제에 내린 폭우로 도시 전체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죠.

산 아래 있던 어느 가정을 보니 산이 무너지며 거대한 나무가 집안으로 뚫고 들어왔더군요.

일차로 산 아래 벽 쪽에 세워 놓았던 승용차를 뚫고, 집 벽을 뚫고, 주방을 지나 안방 문을 가격하고 방 한 가운데 가로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주인 말로는 소파에 앉아 있었는 데, 마치 총알이 뚫고 오는 것 같은 속도로 나무가 뚫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거제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마침 폭우가 내리던 시간이 바닷물 만조와 맞물렸기 때문입니다.

바다로 내려가야 할 물들이 역류했던 것이죠.

인생에서 극한 폭우를 만난 사람들은 거제 시민들처럼 삶의 터전이 다 무너지는 걸 봅니다.

저 사람 어떻게 살지?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드는 뉴스가 요즘 많이 들려옵니다.

우리의 삶이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가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이 말씀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사람은 마른 땅에 냇물 같습니다.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메마를 때가 있죠.

사람 관계에서도 사랑이 다 말라버리고, 한마디 말에도 마음이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집니다.

돈이 말라도 무섭습니다.

저는 우리가 다 일하면서 배부르게 잘 먹고 사는 게 너무 기적 같아요.

당연히 굴러가는 것 같은 생활에서 재정의 물줄기가 끊기면 삶이 얼마나 곤궁해지겠습니까?

어디 한 군데서 구멍이 나면 돈을 다 끌어 모아서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마른 땅에 냇물이시기에 삶에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빈약한 통장보다 주님을 더 의지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 사람은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습니다.

왜 나무 그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곤비한 땅에는 쉴만한 나무 그늘이 없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에 때로 한 뼘 나무 그들도 없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을 한없이 걷고 있다면 큰 바위 그늘이 유일한 쉼터입니다.

바위 그늘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때는 삶이 너무 곤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사는 게 너무 되다, 곤고하구나 입에서 절로 나옵니다.

그럴 때 쉴 수 있는 바위 그늘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찾지 않는다면 곤비한 시간만 길어집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면 이 모든 상황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광풍이 불고 폭우가 내리고 때로 마른 땅에 먼지만 풀썩이고, 해도 해도 변하지 않고 고단한 삶이죠.

그러나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피할 곳이 되시고, 우산이 되어주시고, 냇물이 흐르고, 그늘에 기대어 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인생길에서 다른 것에 기대를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라, 이런 왕을 보라, 주님을 바라보라.

오늘 이 구절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외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4. 그리고 왕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시는지가 나옵니다.

우리 근원을 바꾸지 않으시면 구약 이스라엘의 전철을 반복하게 되잖아요?

3,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4,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며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이 말씀은 메시아의 사역과 똑같죠.

맹인이 눈을 뜨고, 귀머리가 듣고, 무지한 자가 깨닫고, 말 못 하는 자가 말을 하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확실히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 주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전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말씀들이 귀에 들립니다.

그게 복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내 입에서 과거엔 믿지 못했던 그 하나님에 대해 지혜롭게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과 혀가 모두 이렇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공의로운 왕의 통치를 받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나옵니다.

6절에 보면 악인들은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패역한 게 아닙니다.

7절상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죠.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사람이 기본적으로 악하죠.

그러나 어떤 악인들은 정말 그 그릇이 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뉴스 중에서 제일 황당한 게 자기 임의로 실종 수사를 종결시킨 제주경찰입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상식 밖의 일이잖아요?

왜인지는 몰라도, 밤낮 수색하고 계속 보고하고 그런 게 귀찮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물론 악인으로 치자면 더 한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죠.

악인들은 항상 악한 일을 계획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8,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존귀하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행할 존귀한 일은 예수님께 배운 것들입니다.

존귀한지 아닌지는 그가 행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분이 존귀하게 되었으니 행하는 일도 존귀한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