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1장9절-20절)

남수연 2014. 8. 5. 15:45

기도는 성도들의 호흡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난 이스라엘의 팔레스틴 공격 때 기적의 아기라고 불리우는 아이가 있었죠.

공습을 받고 죽은 젊은 엄마 뱃속에서 이 아기가 기적적으로 살아있었습니다.

응급수술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인큐베이터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이스라엘의 재공격으로 병원의 전기 공급이 끊어졌을 때 산소호흡기가 정지되며 결국 기적의 아기가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이 작은 코의 호흡에 있는 것입니다.

호흡하지 않는 생명은 질식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오스왈드챔버스는 기도에 대해 놀라운 통찰력을 갖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이 질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질식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안하고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안하고 잘 사는 데, 그렇다고 생명의 어떤 괴로움을 느끼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기도를 안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답답하고 소멸되어 결국 충만하게우리를 인도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충만한 삶을 살던 사람들의 경우는 기도를 멈출 때, 성령의 활동하심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옛 죄의 본성이 불쑥 올라오는 것을 보면 그걸 알게 되는 것이죠.

걱정 근심이 많아지고 삶이 시들해지고 자신감이 떨어지면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해서 성령님의 충만하신 활동이 소멸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고 해서 주체적으로 항상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풍성하게 일하시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절대로 믿음에 이끌려 살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 대로 살게 됩니다.

또 기도는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받는 것이고,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이고, 우리 삶을 전능자와 의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계 상황이 아니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면 그 때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죠.그 전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기도의 효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힘찬 믿음의 삶을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기에 바로 기도를 방해합니다.

우리가 기도가 잘 되고 있지 않다면 악한 세력이 우리를 이기고 있는 것이고 기도가 잘 되고 있으면 우리가 악한 자를 이기고 있다고 오스왈드챔버스는 말합니다.

오늘은 우리 기도가 잘 되기 위해서 한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원리에 대한 일부분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간 중간에 위대한 영성가 오스왈드챔버스의 기도에 대한 통찰력을 인용해가며 더 깊이 있게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읽은 대로 한나는 꽉 막힌 인생의 출구를 기도를 뚫고 나갔습니다.

우리 앞에 열려야 할 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문들을 열 수 있는 키는 기도라는 것을 오늘 잘 깨닫고 우리 손에 쥐어주신 만능키를 다들 잘 사용할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한나는 우리가 아는대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어머니입니다.

사무엘선지자를 통해 사울왕과 다윗왕, 두 왕이 세워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사시시대에서 왕정시대의 막을 연 중대한 격변기에 중요한 인물인 사무엘을 낳은 여인이 한나입니다.

그러나, 한나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무슨 그런 엄청난 민족의 역사를 생각하고 기도했겠습니까?

그냥 자기의 삶이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은 사건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나라라는 측면이 아니라 한나 개인의 문제 차원에서 주로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만 보아도 한나에게 있는 큰 문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것이죠.

앞 부분을 보면 좀 자세히 한나의 서글픈 사연이 나와 있습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에게 한나 말고 또 다른 아내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벌써 인생이 비극입니다.

한 남편에 두 아내, 요즘 드라마에 너무 자주 보는 친숙한 주제입니다.

아마도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브닌나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타로 나온 브닌나가 아이를 잘 낳아도 너무 잘 낳는 것입니다.

이 때 한나의 미묘한 감정과 비참한 기분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대신 누군가가 일을 맡았는데, 너무 완벽하게 잘 해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 그런 기분 아시죠?

자기 집에서 후처와 그 자식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뛰어다닐 때 한나의 아픔이야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편 엘가나는 여전히 한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었습니다.

그 사랑이 브닌나의 질투심에 번번히 불을 질러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한나네 온 가족이 매년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제사를 지낼 때 일어난 일입니다.

번제와 함께 화목제를 드렸을 것입니다.

번제는 다 태워 올려드리지만 화목제는 일부를 태우고 나머지는 함께 간 가족들이 그 자리에서 먹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눈치 없는 엘가나가 항상 한나에게 두 몫의 고기를 놔 주는 것입니다.

상상이 가시죠?

브닌나 보는 앞에서 제일 맛있는 부위인 안심과 등심을 듬뿍 떼어 한나의 그릇에 담아주는 눈치 없는 남편과 그걸 보고 빈정대는 브닌나.

이런 화목제 식사에서 어떻게 밥이 목으로 넘어가겠습니까?

한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아 서글퍼 울었다고 앞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식사시간이 끝난 뒤 한나가 홀로 성소로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선10절을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첫째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냐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 마음을 쏟아 통곡하며 기도드릴만한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내 기도를 들으시냐는 것이죠.

정말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왜 기도를 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서 내가 하는 기도를 일일이 듣고 응답하시겠냐는 생각에 기도를 시작했다가도 멋적게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무엇이든 기도하면 정말 응답하십니까?

내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부르짖고 기도하고 구하라는 명령과 응답에 대한 약속을 무수히 많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나를 보십시오.

아기를 갖지 못한 불임에 대해서도 기적을 구하며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극히 당연히 주어진 특권입니다.

신명기 4장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 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셔서 귀를 대신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너희가 구하지 않았지만 지금부터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아버지께서 왜 나 같은 미미한 존재에 관심을 갖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냐고 의구심을 갖습니다.

어떻게 엄청난 우주의 주인께서 나 같은 존재에 그런 후의를 베푸시겠냐는 것이죠.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대우를 창조주 하나님께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말할 수 없이 고귀한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값을 치르신 그 값어치만큼 우리를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응답되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응답받는 기도의 핵심이라고 오스왈드챔버스도 말한 바 있습니다.

구약의 기도하고 지금 신약시대의 기도하고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지해서 기도했습니다.

신약의 기도는 예수님과의 이런 관계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 공로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 아들이신 예수님이 치르신 귀중한 댓가 때문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무슨 내가 주님을 위해 한 일이 없는데 구하기가 민망하다 이런 생각은 틀린 태도입니다.

또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많은 봉사를 한다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카톨릭에서 성인들은 공로가 남아돌아서 남의 기도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완전 엉터리인 것입니다.

카톨릭은 성경대로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끼리 회의해서 결정한 것을 성경 위에 놓는 말도 안되는 이단입니다.

이번에 프란체스코교황이 성경대로 믿는 근본주의는 폭력집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니 그것은 인류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 대해 정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이번에 교황이 내한하고 나면 백 만명 이상의 개신교신자들이 성당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초대교회의 순수신앙에서 한참 벗어났고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완전히 곁으로 새어나간 이단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교황도, 마리아도, 어떤 성인들도 어떤 교역자도 중간에서 얼짱거려선 안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할 때도 우리의 신앙경력이나 봉사나 헌신이나 기도의 양이 하나님의 응답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기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한 것이 놀랍게 응답될 때 도리어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그게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오히려 의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들은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받지 못했다는 뜻이겠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응답받은 기도내용을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면 응답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기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분명히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니 무엇에든 구애받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이익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실의에 빠뜨렸던 그 많은 문제들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중에 응답되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 형편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고 다 내 힘으로 꾸려 온 것 같으십니까?

아닙니다.

지금의 내 삶은 내 작품이 아닙니다.

우린 이렇게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그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모든 비참과 죄악 속에서 진창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을 사람들입니다.

물론 내 힘으로 헤쳐 온 부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탈인 것입니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내 능력의 한계 안에서 불확실한 노력을 하는 것이고, 육신과 세상에 속한 부분까지만 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기도로 하나님께 의논하고 맡기는 것은 좀 더 안전하고 선한 육신의 삶 뿐 아니라 영적인 열매도 맺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도의 결과로 성장하고 견고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기도하고 나서도 우리가 움직여야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는 데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도 안하고 하나님께 다 하시라고 하는 것은 이상한 믿음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 속에서 기도하며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한나가 기도한 뒤 엘가나와 동침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무엘이 생기겠습니까?

기도를 잘 했다면 눈을 뜬 다음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지혜와 의지까지 성령께서 충만케 해주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실지를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성급한 우리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이러 이러하게 응답하시라고 지시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한 발자국 앞도 모르는 한계 있는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도하라 하셨고, 우리를 인도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 한나의 기도에서 깨달을 수 있는 두번째 원리는 12절을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절실히 필요한 것들은 오래 기도해야 이뤄집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실은 문제가 복잡하고 어렵다는 뜻입니다.

간단한 것은 우리가 알아서 대개는 기도하지 않고 하게 됩니다.

한나의 경우 불임의 난제 뿐 아니라 매일 부딪쳐야 할 못된 후처와의 끔찍한 동거가 얽혀 있었던 것이죠.

이런 문제들이 더디 응답되는 것들은 나 자신이나 얽힌 사람들의 상황이나 주변 환경적으로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또 오래 기도해야 하는 기도들은 단지 문제해결에 목적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한나의 경우, 아들을 달라고 기도해서 아들을 받고 끝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냥 한 두번 기도할 때 아들을 주셨다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이유가 있겠습니까?그 아들은 이름도 모르고 평범하게 살다 죽었겠죠.

응답되지 않아 오래 기도하던 한나의 기도는 결국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다시 드리겠다는 서원기도로 바뀝니다.

유독 자기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때,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라는 직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원하고 받은 아들은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더디게 응답되는 것일수록 가치가 큰 것입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오래 기도하다보면 점점 하나님의 뜻에 맞춰지게 된다는 것이 신비입니다.

기도의 신비의 극치는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맞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뜻을 포기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이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뭐가 있나 생각하며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조정해 간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가장 온전하고 선하신 뜻에 우리 삶을 맞추고 맡기며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평온한 인생입니다.

얕은 기도는 내 뜻만을 주장하지만 오래 기도하면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어 갑니다.

어떤 문제이든 하나님께 의지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에 점점 내 뜻이 맞춰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가 가장 바람직한 서원기도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죠.

받으면 다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게 좋은 직장을 주시면 그 직장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이죠.

내게 좋은 사업을 주시면 그걸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배우자를 주시면 예수님을 주인삼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믿음의 자녀를 키우며 여러모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게 건강을 주시면 내 행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영과 육에 골고루 완벽하게 유익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저도 순위고사에 합격시켜주시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서원하고 기도응답을 받았었습니다.

그 서원을 지키느라고 애도 많이 썼지만 영육간에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구하는 기도야말로 나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가장 유익하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또 한나의 기도에서 배워야 할 것은 오래만 하는 기계적인 기도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기도입니다.

엘리제사장은 한나의 말을 다 듣고 마음에 감동이 왔던 것 같습니다.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한다고 알았는데 그만큼 진심으로 기도했던 것을 알게 되자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가 무슨 영적인 계시를 받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는 영적으로 둔하고 엘리제사장 당시에는 하나님의 이상이 흔치 않았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사람이 보았을 때 진실되고 감동이 되고 하나님이 저 사람의 기도 좀 들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진실 되면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통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만큼 진실 되게 충분히 기도하고 나면 한나와 같이 응답을 확신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먹지도 않고 울던 한나가 음식을 먹고 다시는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근심이 사라질 때 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 그래서 충분히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 지 아닌지 표가 나는 것입니다.

얼굴에 염려가 가득한 상태로 나와서 내가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이 하고 있어도 남들이 다 안다는 것이죠.

염려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나를 아직 맞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염려는 아직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내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뭐를 좀 어떻게 해보려고 자꾸 염려하는 것이죠.

염려는 나 자신에게만 점점 신경을 쓰게 만듭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점점 안개 속 미궁으로 빠져들고 생각과 의지도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문제들이 인생의 해답이 아닙니다.

그 문제가 해결 돼도 또 다른 문제가 인생을 심각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항상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맞춰가는 훈련을 한다면 어떤 문제든 문제될 게 없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염려가 사라지고 다시는 근심 빛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가 그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스스로 말하죠.

마음이 괴로워 통곡하는 인생, 마음이 슬픈 여자, 원통함과 격분함이 많은 괴로운 심정.

이런 모습으로 서글픈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응답으로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께 드리고 2장에서 한나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막막한 상황에 놓일 때 우리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서 내가 혼자라는 것, 이 무서운 상황을 내가 혼자 당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럴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밀착하시고 동행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것처럼 우리 개인의 인생도 그렇게 대단히 여기시고 진실 되게 다스리십니다.

예수님 앞에 세상천하보다 덜 귀하고 그보다 못한 자녀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난관을 뚫고, 막힌 문을 여는 열쇠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습니다.

꼭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힘차고 꿋꿋하게 이 세상을 견디고 이기기 힘듭니다.

우리 개인의 문제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또 서로 중보기도하며 힘든 삶을 함께 이겨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2014년8월3일 주일예배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