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누가복음12장1절-7절)
사람들은 작은 일도 확대해석하고 실제보다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 거품이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종종 거품 위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무작정 예수님의 기적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합니다.
이걸 보고 있는 제자들은 새왕국 건설의 꿈으로 벅차게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거품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정신 차릴 말씀으로 교훈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일은 그렇게 쉽게 성취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제자들의 죽음을 불사한 복음전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무언가 꿈꾸며 기대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모든 것을 쏟아 붓기도 하지만 쉽게 되지를 않습니다.
어떤 투자전문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는 이 세상에서 자수성가한 부자가 제일 두렵다고 합니다.
이들에게서는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심오한 포스가 흐른다고 합니다.
부를 이루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고 부를 지키기 위해 강한 독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죠.
그런 부자들에게는 물리면 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치명적인 독이 젠틀한 태도 속에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이 만만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쉽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인생을 만만히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만만찮은 시간을 보내시다 낙심도 하고, 지치고, 곤고한 마음으로 여기 앉아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답답한 삶과 문제들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교훈을 얻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깊은 내면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앞 길을 선명하게 비춰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신자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도록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1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3절은 너희가 들은 바 주님의 뜻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4절은 주님의 뜻을 따를 때 닥치는 환란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세밀하게 살펴보며 우리에게 잘 적용시키길 바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인격과 행동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겉다르고 속다른 행동을 삼가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 전체에 대한 태도,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태도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위선은 바리새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공통의 죄목입니다.
위선적인 태도는 실제의 자기보다 더 낫게 보이려는 자기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선적인 면 때문에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유일하게 안과 밖이 같고 진실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스가랴 8장 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 어 진실을 말하며
우리는 모든 삶에서 속마음과 겉이 다 진실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면을 쓰고 있고,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은 사실 우리의 상처들이고 아픔들입니다.
저도 사춘기 때 가난한 게 싫어서 친구들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는 데, 그렇다고 가난한 게 감춰졌겠습니까?
사실대로 드러내고 좀 못나 보여도, 좀 무시를 당하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단점과 상처와 부족한 부분 그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존귀한 자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모든 열등감과 수치심을 가린 우리의 모든 가면을 차츰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만 속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속인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사회에서 하나님을 율법대로 철저히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타가 공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바리새인들 생전에 그런 모욕은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에게 하지 않은 말을 왜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을까요?
죄인들은 서로 속이고 속기도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사람만 속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속을 꿰뚫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신앙행위를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 나를 잘 보이게 하려고 신앙적인 행위까지 이용한다면 치명적인 바리새인의 누룩에 오염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듯이 제자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 철저히 자신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치명적인 바리새인의 누룩에 언제든지 오염될 수 있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나를 괜찮게 보이려고 하나님도 이용해 먹을 수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항상 더 의식하고 있다면 위험한 바리새인의 누룩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나중엔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것이 위선과 외식의 위험성입니다.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고 모든 것을 이용해 자기를 잘 포장하는 사람들은 정신적, 인격적으로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결국 위장 된 자기가 진짜 자기로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나중엔 겉과 속이 심각하게 다르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다 눈치챘는데도 자기만 스스로 속고 착각에 빠져 사는 비참한 형편이 되는 것이죠.
결국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포장하고 감추려 해도 모든 것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결국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도 죄가 결국은 덜미가 잡히고 발각이 되는 것을 매일 보게 됩니다.
CCTV 무섭습니다.
김수0 제주지검장,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입니까?
바지 안에 있던 증거물 베이비로션,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한 지역의 검찰총수가 한 짓이라기엔 너무 어처구니가 없을 뿐입니다.
그렇게 안팍이 다른 게 인간이고 결국 그렇게 천박한 게 인간입니다.
시편 62장 9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가볍도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교황의 방한 중에 호주 빅토리아법원은 카톨릭 사제들의 성추행 벌금으로 340억원을 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런 비리는 물론 단지 카톨릭 교회에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국개신교 교회 안에 켜켜히 묻어 두었던 모든 악행들도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게 없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 마음이 예수님의 눈에 스캔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척 가장했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마귀의 세력이었다는 것이 결국 어떻게 드러납니까?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세력의 중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초대교회가 성장할 때 핍박하고 제자들을 잡아 죽인 세력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도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합니다.
앞 뒤 문맥을 따져보면 이렇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해라, 모든 것은 사실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게 들은 것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라.
논리가 썩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누룩처럼 퍼지고 결국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단지 악 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누룩처럼 퍼지고 백일하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열두제자를 통해 시작된 복음이 누룩처럼 퍼진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루 서말 속에 넣어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이 결국 드러나듯이 악의 세상 속에서 비밀히 증거 되고, 어두운 데서 전파되는 복음이 결국 세상에서 훤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놀랍게 확산되고, 인간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선 주님의 교회를 보십시오.
사탄이 쉬지 않고 그 영역을 접수해 가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 속에서 점점 커져 갑니다.
우리가 이 작은 공간에서 말씀을 듣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깨닫고 구원을 받은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집에 돌아가서, 직장과 학교에서 퍼져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구원받는 일이고 그 다음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 이상 이 땅에서 소중하고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누룩이든 우리 안에 들어 왔으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사탄의 누룩이 들어왔다면 점점 위선의 악한 열매가 맺히고 그 인격이 점점 악화됩니다.
그 가정이 점점 마귀의 영향력에 빠지고 그와 대면하는 사람들의 생명력이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정말 들어왔다면 우리 믿음이 성장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 점점 가정과 사회 속에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퍼져가야 맞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인류의 마지막까지 계속된다고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그런데 4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제자들을 죽이려는 세력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 때 죽이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사탄의 세력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이 구원의 가장 심오한 신비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죽음으로 그들의 증거가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되는 것이죠.
그 진실한 증거를 사람들이 믿게 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이 닥쳤다면, 그것은 죽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빼앗는 세력은 없지만 때로 정말 목줄을 죄는 것 같은 극심한 어려움을 우리가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탄은 가장 부지런히 일합니다.
때로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은 마치 우리를 죽일 듯한 기세로 달려듭니다.
생활의 염려가 우리를 죽일 듯 달려들고, 암이 곧 우리를 삼킬 것 같고, 곧 시련의 큰 파도가 덮칠 것 같을 때가 옵니다.
이 때 우리가 죽으면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십니다.
자녀들의 피땀과 눈물을 어떻게 아버지께서 무심히 보시겠습니까?우리의 고난의 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죄의 자아를 죽이면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줄 믿습니다.
명량의 이순신장군이 비장한 명언을 남겼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으려니와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리라.
누가복음 17장 33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환경이 나를 죽일 듯이 덤벼들 때, 살려고 발버둥을 치니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겠다고 작정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실패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포기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견디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그 뜻에 따라 죽기로 작정하면 두려움을 이기고 삽니다.
죽을 것 같은 위기가 우리 인생에 닥친다면 죽으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바랍니다.
우리의 자아를 확 꺽고 하나님 앞에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대로 죽으면 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가 두려워하는 실제 상황에 그동안 살아온 대로, 육신대로 반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마음으로 육신의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과 인간적인 생각들을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의 생각들은 두려움이 아니고, 절망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과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평강 중에 모든 일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대처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편합니다.
죽은 자가 무슨 고통을 느끼겠습니까?
우리 옛사람을 장렬하게 죽이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새사람으로 다시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죽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을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박해와 고난으로 죽게 된 제자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극렬한 고난 중에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는 말이 정작 우리에게 큰 힘이 되던가요?시련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주님은 위로보다 그 너머에 실재 존재하는 사실을 보라고 하십니다.
나를 동정하고 연민에 빠져 엄살을 피우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0절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 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모든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지옥의 형벌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일수록 현재의 문제와 시련에 대해 담대하게 됩니다.
이 모든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모든 죄값이 깨끗이 청산되었다는 것은 죽음 앞에서 조차도 우리를 굳세고 기품 있게 서게 합니다.
환란이 나를 집어 삼키려 달려들 때 겁먹지 말고 이 모든 것을 심판 하실 권세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살이가 항상 어렵고 모든 문제들 마다 하나같이 힘들고 두렵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한결 같이 마음에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현세의 어떤 실패나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죽음 뒤에 우리가 서야 할 그 하나님 앞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6절에 참새와 7절에 머리털 이야기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참새 다섯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냐,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는다.
비슷한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 앗사리온에 두 개, 두 앗사리온엔 네 개를 살 수 있는 데, 다섯 마리를 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한 마리는 덤으로 얹어주는 놈인 셈이죠.
서민들의 양식으로 팔리는 참새구이는 그냥 무더기로 팔리고 워낙 값이 싸서 덤도 후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레이더엔 어떤 참새 한마리라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몇 마리의 참새가 잡혀서 팔려 나갔는지 하나님 눈에는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놀랍습니까?
심지어 너희에게는 머리털 까지도 다 세어 놓으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단지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다는 과장법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가 아침에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을 때 머리털이 한 올 떨어지는 것 까지 다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에 놓쳐지는 것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더욱 힘든 것은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아버지께서 지금 이 순간 내 고통과 아픔을 알고 계시는 건지, 왜 도와주지 않으시는 지, 오히려 더 헷갈리고 사태를 해결하는 게 더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선지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내 방식대로 사나 죽으나 해보고 말텐데, 하나님의 뜻은 알아야겠고 하나님은 드러내주질 않으시니 신자들의 삶이 더 복잡해지는 것이죠.
맞습니다.
믿음대로 사는 삶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복잡한 미로와 같이 구불구불한 길입니다.
이 골목을 돌아가면 거기 무엇이 나타날지 가봐야 압니다.
하나님은 단지 내 바로 발 앞만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뜻이 너무나 궁금한 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루하루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에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영원한 삶의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여정은 하나님 눈 앞에서 절대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모든 사건마다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넓고 곧게 난 길을 멋대로 걸어가는 수많은 무리들이 죽음 뒤에 지옥을 향해 몰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무리에서 빠져 나와 심판하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게 되었는 지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 어떤 영화와도 비교될 수 없는 보물을 우리가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세상의 잠시 있다 사라질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새 한마리가 떨어져 죽는 것도 관리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모든 삶을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에볼라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던 ‘선한사마리아인의 지갑’ 소속 미국인 선교사 2명이 완전히 치유되어 퇴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음의 바이러스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들을,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구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참새 한마리의 죽음도 관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공중의 새를 먹이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를 살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을 취미로 세셨겠습니까?
우리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게 돌보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위선을 벗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진실되길 원합니다.
특히 바리새인의 외식, 신앙행위로 하나님을 속이지 않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우리를 통해 전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 때,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4.8.24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