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소돔의 멸망 (창세기19장12절-29절)

남수연 2016. 12. 9. 14:16

소돔성이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홍수 뒤에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무지개 언약은 아무리 인간이 죄를 지어도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라고 들었습니다.

세상이 있을 동안엔 사람들은 자기의 수한대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하나님이 다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십니다.

마지막 때로 유보하셨던 직접심판 카드를 꺼내셨다는 것은 중요한 말씀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소돔의 심판은 불같은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는 메시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마지막 때 세상은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사정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옵니다.

자괴감이 들게 하는 부패정부에, 성장률 제로시대, 조류독감에 대형화재까지 국민들 마음이 다 좋지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세상문명에 대해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소돔성의 멸망을 통해 세상문명의 종착역을 내다보는 지혜를 얻고 이런 혼란스러운 오늘을 잘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2016년12월4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먼저 왜 소돔성이 심판을 받았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앞 1313절에서 소돔사람들을 이렇게 한 줄로 평가합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820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소돔사람들이 하나님께 죄인이고 사람을 상대로 큰 악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죄악은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심판은 가장 공의로운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역입니다.

법관이 잘잘못을 가려내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 사회는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의롭고 공평하고 철저한지 소돔의 심판에서 드러납니다.

본문 앞에는 하나님이 천사 둘과 함께 내려오셔서 먼저 아브라함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대한 부르짖음이 너무 커서 알아보러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하늘에서는 그 사실을 정확히 모르셔서 눈으로 확인하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결정하셨지만 그만큼 신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악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지난 주에 이스마엘의 출생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수였고 그 가정의 골칫거리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 집에서 쫒겨나 광야에서 자라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내 그와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나 남에 대한 심판을 경솔하게 언급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그렇게 가볍게 다룰 주제가 아니라 두렵고 경외스런 일입니다.

하나님도 최종적인 현장검증 끝에 소돔의 심판은 확정하신 것입니다.

소돔의 죄악은 흔히 동성애가 만연한 성적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19장 전체를 읽어보면 그 뿐 아니라 소돔사람들의 폭력성과 무자비함이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롯은 소돔을 심판하기위해 성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나그네로 알고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롯의 집에 낯선 남자들이 찾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밤에 도시의 남자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몰려왔다고 합니다.

천사니까 잘 생겼겠죠. 사람들이 천사 같다고 그러잖아요?

그 많은 남자들이 잘생긴 길손과 상관하겠으니 내놓으라고 롯을 협박합니다.

상관하겠다고 번역된 단어는 성관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롯이 놀라서 간곡하게 말렸지만 남자들은 롯을 밀치고 폭력으로 문을 부수려고 달려듭니다.

그때 천사가 롯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의 눈이 멀게 해 출입구를 못 찾아 소동하다 결국 사람들이 흩어집니다.

이런 일이 도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하던 곳이 바로 소돔성입니다.

이 한가지 에피소드를 보아도 소돔사회가 얼마나 변태적이고 폭력적이고 사람들이 금수 같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악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성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세운 아름답고 가치 있는 세속세상을 괜히 심판하고 끝내시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미래로 갈수록 인간이 만든 문명사회가 공익적이고 고상해지고 다 같이 행복하게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착각인지는 세계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저절로 그런 일이 이뤄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나라들은 현재에 적어도 백 년 전보다 더 평등하고 더 행복하게 잘 살아야 맞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지구촌 모든 세계는 불평등과 폭력과 빈부격차와 인권유린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평등하고 복지가 잘 된 서구사회를 보면서 인간이 스스로 계몽되어 그런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이 성경의 원리로 끊임없이 사회를 개혁해서 그런 살기 좋은 사회가 그나마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도와 중동과 동남아시아, 남미, 중국, 소련, 이 수많은 나라들을 보십시오.

날이 갈수록 점점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 받고 최저의 삶으로 생계를 잇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저절로 이만큼 발전되고 계몽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권리와 부와 행복을 누리던 사람들은 특권층인 양반들 뿐이었습니다.

민초들은 항상 짓밟히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았잖아요?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학교 문턱도 못 밟았습니다.

양반들, 그나마 남성들 위주로 교육을 받았으니 전체 인구의 3%만 교육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 기독교이념을 갖고 여성들의 인권을 인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주고, 선거권을 주었다는 게 세계 역사적으로 기적이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도 저 동남아의 한나라와 같았을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이 언제부터 자전거를 탈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2013년에 비로서 법이 바뀌어서 자전거 타는 게 겨우 허용되었습니다.

지난달 말에 사우디 알사우드 왕자가 이제 여성들에게 운전을 허용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아직도 사우디에서 여자들은 운전을 못합니다.

인도의 수 천년 간 내려온 신분의 장벽인 카스트계급사회를 보십시오.

현재는 공식적으로 카스트 계급을 법적으로 폐지했다지만 그 조항은 종이에 쓴 잉크 자국일 뿐입니다.

지금도 인도사람들은 행동거지나 이름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계급인지 알아보고 거기에 맞게 알아서 처신합니다.

그냥 타고난 계급대로 살다 죽는 게 인도사회입니다.

게다가 불가촉천민이라는 달리트 계급은 무려 인구의 16%나 되지만 이 사람들은 인도사회에서 인간이 아닙니다.

이들은 힌두사원에도 못 들어가고 공공 우물도 못 마시고, 신체적으로 접촉할 수 없습니다. 완전 역병 같은 존재들이죠.

이런 사회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회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이 쇠퇴한 서구문명도 상황은 점점 바뀌고 있죠.

세상이 어디나 할 것 없이 다 살기 어렵게 평준화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견만리에서 보니 세계의 최고 부자 62명의 재산이 하위 36억명 재산을 다 합친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죠.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이런 부의 불평등으로 현재 지구가 가장 큰 위기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류가 지구를 파괴할 기술은 갖고 있지만 아직 지구에서 벗어나는 기술은 개발하지 못했기에 어떻게든 지구에서 살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더군요.

인간이 본성적으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회는 절대 살만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선한 사람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생존이 걸리면 다 선한 가면을 벗어 던지죠.

이런 죄인들이 괜히 남을 위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겠습니까?

사람들은 다 자기 살 궁리만 합니다.

신자들은 이 세속 세상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이 다 같이 행복하길 원하시고, 세상에 악이 창궐한 걸 절대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면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심판당할 소돔의 문명이기에 성도들은 여기에 하나님의 도성을 세워가며 세상이 인간본성대로 가지 않게 개혁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남겨두셨는데, 신자들이 세상에서 비밀요원처럼 믿음을 숨기고 살았기에 세상이 이렇게 썩은 것입니다.

세상의 썩은 물은 교회로 흘러들어오고 이제 교회도 침몰해가고 있습니다.

최근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인간의 죄로 부패하고 썩은 냄새가 진동해 정말 심판이 두려울 지경입니다.

우리 자신의 속을 들여다봐도 그렇잖아요.

그러나 사실인즉슨 지구 곳곳엔 하나님이 불과 유황을 쏟아 부으시기 전에 이미 자기들끼리 폭탄을 쏟아 부으며 모든 것을 죽이고 파멸해갑니다.

이런 세속세상의 본질을 깨닫고 우리는 세상의 몰락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인 예수님의 교회로서 사명을 다하며 하나님의 헌법을 따라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롯이 어쩌다 이런 소돔성에 거주하게 된 것일까요?

롯은 처음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삼촌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재산이 늘어날 때, 롯도 같이 부자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수많은 우양의 떼로 인해 같이 살기가 힘들어 분가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표면적 이유지만 롯은 고향에서 살던 대로 문명이 있는 도시생활이 그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삼촌인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읍에 들어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냥 한결 같이 도시 외곽에 장막을 치고 거주했습니다.

보호해 줄 성곽도 없는 벌판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삶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러니 아브라함이 집에서 가신들을 삼백명십팔명 씩이나 길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재산이 늘어나자 도시 입성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떠나 독립할 때 롯은 다른 목축지가 아닌, 이미 눈여겨 보아둔 소돔성 쪽을 선택합니다.

롯은 소돔을 향해 조금씩 자리를 옮기다 결국 소돔에 입성합니다.

세상을 향해 조금씩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화려한 문명의 도시, 소돔에 입성한 롯은 이젠 모든 편리를 누리며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28절을 보면 롯에 대한 이런 단서를 던져 줍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더라

그들의 타락과 부도덕한 행실을 보니 행복하기는커녕 나날이 심령이 상했다고 합니다.

롯의 사람 됨됨이를 보면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삼촌 밑에서 자라며 의로운 성품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에는 의로운 사람들도 많이 있고,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개념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롯의 의로움과 아브라함의 의로움이 달랐다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을 선택하느냐 세상을 선택하느냐 결말이 다르게 됩니다.

롯은 분명히 아브라함을 통해서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거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살만해지니까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지난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하실 때, 공교롭게도 롯은 이미 아브라함을 떠난 뒤였습니다.

롯은 할례를 받지 못했고 할례언약에서 제외된 것이죠.

롯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나라에 대해 무관심했기에 스스로 언약백성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의 곳곳에는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하지만 롯에 대해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었던 엘리에셀만 보아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하는 모습이 나오는 데 말입니다.

예배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냐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통치와 공의로운 심판을 두렵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속죄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진정한 믿음이 됩니다.

내가 심판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어떻게 속죄의 주님을 놓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지은 작은 죄 하나라도 사람들 앞에 공개되면 고개를 못들만큼 창피할 텐데, 하나님 앞에서 그 많은 죄가 드러날 때 어떻게 하려구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죄를 모르기에 신앙의 행위들이 마치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희생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지 우리가 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창조주 하나님을 영의 아버지로 받고 그 산업을 누릴 상속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과분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의 죄를 알고 예수님의 의를 덧입은 의인과 롯과 같이 의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의로움으로는 자신이나 남의 악을 다룰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 의인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보았습니까?

다 자신을 불사르지만 거의 대부분이 악에 의해 이슬처럼 사라집니다.

롯이 소돔에 들어가 뭔가 바로잡으려고 노력을 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보잖아요?
그 정도 의롭게 해봤자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인 거 다 안다는 겁니다.

도시사람들이 몰려와 길손을 내 놓으라고 난동을 부릴 때 롯은 그들에게 형제들이여라고 호칭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네가 객지에서 굴러들어온 주제에 어디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이렇게 응대합니다.

롯의 사위들조차 한밤중에 찾아와 몸을 피하라는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굴복한 사람을 볼 때, 세상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다며 아브라함을 존대하지 않습니까?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갔지만 보디발이 자기 입으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이 느껴진다고 요셉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사울도 자기 입으로 그렇게 다윗을 인정합니다.

자식들에게 아무리 옳은 말해도 왜 부모 말에 권위가 없겠습니까?

부모가 창조주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인식하면 자식들도 달라집니다.

롯이 딸들에게 못된 짓을 가리켰겠습니까?

그러나 딸들이 목숨을 건진 뒤 무슨 짓을 합니까?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동침해서 자손을 이어가는 해괴한 짓을 합니다.

롯의 의로움이 결국 자식이나 아내에게조차도 안 먹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위대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나온 자녀들을 위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신비하게도 세상사람들에겐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죠.

그러나 교회 소속이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고 하나님이 저절로 알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롯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 되려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갈망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잃고 서서히 소돔을 향해 자리를 옮겨 갔듯이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져 세상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받기를 간절히 구하라고 예수님이 그러신 거예요.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우리가 항상 말씀으로 우리를 비춰보고, 기도로 힘을 얻고, 말씀대로 지키며 우리를 세속과 죄로부터 구별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을 매일 힘써서 해야만 합니다.

그게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고 가장 힘써야 할 일입니다.

미국에서 집회를 하고 극동방송의 선교기금을 모금하는 송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선교방송에 후원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고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을 만날 기회를 애써서 만들고, 시간을 내서 찾아가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주 애절하고 간절히 호소하지 않으면 아무도 먼저 와서 후원하겠다는 사람은 없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며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다 그렇잖아요?

값으로 칠 수 없는 이 영생을 위해 아무 것도 안하면서 저절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고 신앙인격이 좋아지게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피곤하다고 퇴근 후 TV앞에서 보내고, 정신적으로 쉬고 싶다고 신앙을 덮어 놓으면 더 회복이 안됩니다.

결국 일로 지치고, 사람에게 시달리고, 점점 심령이 상해 상한 갈대 같이 되어 갑니다.

롯은 세속적이고 악한 소돔에서 살며 과거 아브라함 곁에서 모르는 사이 촉촉이 누리던 하나님의 은혜를 결국 다 잃었습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라함을 떠나는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치중하는 삶에서 결국 남는 것은 심령이 상하는 일 뿐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돌아보면 얼마나 힘든 일, 불안한 일, 답답한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일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인내하며 지혜를 모아 열심히 살아온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참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매듭이 지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왠지 잘 견뎌낸 내가 대견스럽고, 보람있게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일에 대해서도 담대해집니다.

아무리 바빠도 무엇이 중한지를 항상 생각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주신 주님의 교회를 떠나지 말고 신자의 훈련과 의무를 다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18장은 롯을 찾아온 천사가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갔던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9장에 롯에게 천사가 찾아온 내용과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낮에, 장막 문에 앉았을 때 천사들이 찾아옵니다.

롯은 저녁에, 벌써 어둡죠? 성문 앞에 앉았을 때 천사가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고대하던 이삭이 내년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과 아브라함이 강성한 나라를 이룰 것을 말씀합니다.

롯에게는 소돔이 멸망하니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보면 처음에 똑같이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왔지만 점점 그 삶이 정반대로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신앙과 삶이 창대하게 되고 믿음의 조상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얻습니다.

롯은 모든 것을 잃고 몸만 빠져 나와 딸을 통해 치욕스런 자손을 낳은 조상이 됩니다.

그게 모압과 암몬 자손인데, 하나님께서 신명기 23장에서 모압과 암몬자손은 영원히 하나님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못을 박으십니다.

이것이 소돔을 사랑했던 롯의 결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천사의 경고를 받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와 딸들이 꾸물거렸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어 심판의 불이 내려올 텐데 이 딱한 식구들이 천사들의 말에 긴가민가하며 밍기적 거렸다는 것이죠.

귀중품을 좀 꾸리고, 가재도구를 챙기다 두고 가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재촉하고 롯은 지체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안타깝게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결국 천사들이 강제로 롯과 아내와 딸들의 손을 잡아 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불과 유황이 내려올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흘려 듣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죠?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현혹합니까?

자꾸 돌아보게 하잖아요.

좋은 집, 좋은 차, 돈이 많으면 누릴 수 있는 호사가 부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메시지를 통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영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세상이 편리와 재미와 부를 주었다면 결국 영혼을 뺏깁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처럼 영혼이 나날이 잘되고 많은 것을 누려도 세속과는 영적으로 차단 된 안전하고 고상한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우리는 천국시민으로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또 교회가 다시 빛과 소금의 영광을 되찾아 민족의 희망이 되도록 우리가 노력하고 또 기도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소돔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가 우리 가정을, 이 민족을 떠받치는 의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