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사랑하는 이유 (누가복음7장36절-50절)
https://www.youtube.com/watch?v=UXPiRGITPoY&t=130s
<2020년2월9일 설교영상>
지난 주 ‘좋은 말을 하며 한주간 살기’로 했었죠.
잘 지켜지셨나요?남의 탓하고, 남의 말 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잘 훈련해서 마음의 창고에 선한 것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원칙은 마음에 잘 담아두고 계속 노력해 가면 되는 것이죠.
신앙생활 중에 힘든 부분은 어찌보면 오늘 같은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사랑하는가에는 어쩐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오늘 본문 속 여자는 모든 것을 다 쏟아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을 마주하면 우리 사랑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죠.
오늘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던 여자를 통해 우리도 주님에 대한 사랑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약속하셨잖아요?
20장 6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약속을 믿고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조금씩 더 사랑해 가는 복있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1. 먼저 바리새인인 시몬과 그의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사건이 일어난 곳은 가버나움의 한 마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날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 식사에 초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대체로 예수님을 반대했지만 선지자와 랍비로 주님을 존경하는 바리새인도 있었습니다.
오늘 시몬은 그렇게 예수님께 호의적인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풍습은 랍비를 초대해서 밥을 먹는 자리엔 동네사람들도 들어와 가르침을 같이 듣는 게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신 것을 알고 한 여자가 난입한 것입니다.
분위기를 보면 남자들끼리 모인 자리일 텐데 갑자기 한 여자가 식탁 가까이 접근한 것입니다.
이럴 때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 싸늘해 졌겠죠.
그런데 여자의 눈에서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 주님의 발을 적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긴 머리카락으로 눈물에 씻겨진 주님의 발을 닦습니다.
아마 계획한 일은 아니고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일 같습니다.
여자는 가지고 온 고급 향유를 주님의 발에 바르고 연신 입을 맞추었습니다.
문제는 여자가 그 마을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죄인으로 낙인찍힌 경우는 대부분 거리의 여자, 매춘부라는 뜻입니다.
아니면 어떤 불륜을 저지른 여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광경을 상상해 보면 좀 묘하고 민망한 구석이 있죠.
본문에서 실제로 시몬은 이 광경을 아주 볼썽사납게 여기고 속으로 예수님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진짜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죄인인지 알았을텐 데, 그걸 모르고 물리치지도 않는다니. 츳츳츳’
이런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본문의 빚진 사람의 예화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오백데나리온이라는 꽤 큰 돈을 빌려줍니다.
요즘 돈으로 하면 한 오천만원쯤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또 한 사람에게는 오십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오백만원 정도 되겠죠.
그런데 둘 다 똑같이 돈을 갚을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채권자가 두 사람 다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지 우리는 벌써 감이 잡히죠?
예수님은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바리새인 시몬에게 이렇게 물으시죠.
시몬아, 이 둘 중 누가 더 탕감해 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누가 더 고마워하고 사랑하겠습니까?
당연히 오천만원 탕감 받은 자죠.
시몬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래, 네 판단이 옳다’ 그러십니다.
그러시며 시몬의 태도를 비로서 언급하십니다.
44절에서 시몬이 예수님께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엔 주인이 초대 받은 사람이 왔을 때 먼저 발을 씻게 했습니다.
먼지와 땀에 더러워진 발을 먼저 시원하게 씻고 난 뒤 음식을 내왔던 것이죠.
밖에 나갔다 집에 들어오면 발부터 씻는 사람이 많잖아요?
45절에서는 시몬이 예수님께 환영의 입맞춤을 생략했다는 것입니다.
46절에서는 예수님을 존대하는 감람유를 부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이런 초대에 불쾌하고 모욕감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종일관 시몬을 대하시는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으십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또 ‘네 판단이 옳다’
그렇게 시몬이 마음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차분히 가르치려 하십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럴 바에야 왜 예수님을 초대한 것일까요?
바리새인 시몬은 이 동네에서 존경받는 종교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진 않았지만 마을 사람이 선지자로 추앙하는 예수님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 눈치를 본 것이죠.
또 과연 소문대로 예수님이 그럴만한 사람인지 가까이서 보자는 목적도 있었겠죠.
시몬은 주님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을 예배하고 만나러 나왔는데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분은 없으시겠죠?
시몬은 오히려 주님을 하찮은 손님처럼 대접함으로 은연중에 자기를 더 우월하게 보이려는 경쟁심이 작동했던 것 같습니다.
목사들 중에도 이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시몬은 매춘부 여자가 난입해 난감한 행동을 하는데도 주인으로서 저지할 생각도 않고 방관하잖아요?
들이대는 여자의 행동에 주님이 망신을 당한다고 비웃고만 있는 것이죠.
시몬이 왜 예수님께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하십니까?
사함을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서 신앙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기 죄와 죄사함을 깨닫기 전에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많이 하지만 자기의 근원적인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돈은 벌어다 주고, 집에는 들어오고, 외식은 같이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부부관계라면 불행이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랑하는 가족 같은 목적이셨습니다.
수종들고 섬기는 천사가 부족해서 사람을 만드신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서로 원수가 된 관계를 다시 돌려놓기 위해서는 적어도 먼저 잘못한 사람이 죄를 인정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속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자기 죄에 대한 자각을 하지 않으면 이 구원의 공식은 풀리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양심이 무뎌서 겉으로 드러난 자기 죄도 잘 인식 못합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죄의 뿌리를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거기서 모든 악과 불행이 자라서 인격으로 삶으로 나쁜 열매가 나오는데 그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면 솔직히 은혜도 모릅니다.
시몬은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의 조항들을 철저히 지켰던 종교인입니다.
정해진 조항만 지키면 죄가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죠.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행동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드러난 죄의 양보다 그 본성의 악함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사람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피조물이면서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죄의 모양은 가지가지지만 다 그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면 ‘아, 진짜 나를 만드신 분이 계시구나. 이제는 잘 섬겨야겠다’ 인정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이 어디 판사 앞이라고 저절로 죄를 깨우치고 인정합니까?
그렇다면 신자들이 어떻게 이 여자처럼 자기 죄를 깨닫고 주님의 속죄를 깨닫게 될까요?
그것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을 들어야 하고 성령께서 그 말씀의 검으로 우리를 강타하셔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주님께 직접 책망을 받고 바른 진리를 들었는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지 이유를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너희를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죄가 죄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겨우 깨달을 수 있는 죄는 각자의 양심에 걸리거나 도덕적인 죄 정도입니다.
성령께서 보게 하시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틀어진 죄의 뿌리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비틀어진 관계는 회복이 되죠.
그러나 근본적인 관계가 바뀌고, 믿음으로 인격은 다듬어져 가지만 죄를 짓게 되는 뿌리는 뽑히지 않습니다.
‘저 사람 요즘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더니 많이 달라졌네 그럴 때가 있으시죠?’얼마 뒤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에이 똑같네’ 그러잖아요?
우리 자신을 봐도 그런 걸 느끼잖아요?
두 가지가 다 맞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과 성격과 습관과 살아온 인생이 다 하나로 뭉쳐진 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송두리째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악당이 갑자기 착한 사람 되는 것 만큼 어색한 게 없죠.
전에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에서 마지막 편을 보면 사람들이 다 착하게 됐는데 그렇게 싱거울 수가 없더군요.
그 독하던 쓰앵님도 갑자기 보통 선생님 같은 말을 하잖아요?
그런게 불가능한 걸 사람들이 알기에 너무나 현실적인 드라마에 빠졌다고 이런 결말을 보고 ‘에이, 역시 드라마군’ 그러는 것이죠.
죄의 뿌리에서 언제든지 악한 게 나온다는 걸 알기에 성도들은 매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실감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경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이것을 지식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잖아요?
그렇게 꾸준히 믿음의 길을 가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심으로 믿게 되는 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향유를 부은 여자가 바로 이런 성도입니다.
이 여자가 어떻게 구원에 관심을 갖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구원의 시작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화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우리 영혼에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찾아오시면 땅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영원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이 여자는 예수님이 자기 죄를 속죄하시는 분임을 알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함을 받은 것이 많기에 지금 많이 사랑한다고 하시잖아요?
어떻게 죄를 짓고 살던 여자가 그런 구원의 핵심을 알게 되었을까요?
이런 성경인물들의 변화를 무심히 지나치면 중요한 걸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세례요한의 역할을 지나치면 안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선지자로 활동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죠.
죄를 책망하고 사람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이 모든 죄를 속죄하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세례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도요한과 안드레가 세례요한의 제자였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내용들은 우리 구원의 절차를 보여주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여기서도 먼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뒤 예수님의 속죄를 받아들이는 공식이 나옵니다.
처음에 이 여자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의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감화하시면 백프로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가리킨 그리스도께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아마도 근처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은밀히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집회 현장마다 숨죽여 말씀을 듣던 이 여자는 속죄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풍문을 듣고 갑자기 믿어지고 이렇게 눈물을 쏟는 사랑이 생긴 게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지 몇 년 안 된 분들이 믿음에 대해 잘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잘 모르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은 개인차는 있지만 거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를 깨닫게 되고, 십자가의 속죄를 깨닫는 과정 없이 은혜와 축복이 목적인 신앙생활은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 여자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점진적인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믿음이 생기는 것 같을 때가 있지만 그들은 이미 유대교를 통해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잘 알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당장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이 옥토에서 결실을 한다고 하셨잖아요?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배우며 황무지의 돌을 골라내고 옥토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이 꾸준히 안 되면 믿음이 생기는 데 오래 걸립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죄인이라는 말을 진부하게 생각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은혜를 더 깊이 느낍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바울사도도 얘기했잖아요?
곰곰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죄인에게 왜 이렇게 은혜를 주시냐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때로 간절히 바라는 게 생기면 ‘하나님, 이거요. 이거 꼭 필요합니다’ 라고 수시로 제 마음을 타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면 슬그머니 그게 이뤄지고 있는걸 보고 깜짝 놀랍니다.
나 같은 죄인의 탄원을 유심히 들으시고 그걸 인도해 주시니 은혜를 더 느끼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 죄를 들여다보는 이 시간 은혜가 모두에게 넘치시기 축복드립니다.
여인은 오늘 그 예수님께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향유를 들고 찾아 온 것입니다.
3.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여자에게는 있고 시몬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아는 성도들의 사랑은 아낌없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혹 주님께 풍성하게 드리지 못한다면 아까워서가 아니라 형편 때문이죠.
내가 하나님을 믿는 데 늘 계산이 앞서고, 드린 것에 대해 댓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래를 하는 마음이라면 아직 죄의 깊이를 모르고 그 깊이를 다 채우게 부어지신 속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가 거리로 나와 매춘을 했다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돈 때문이었습니다.
돈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일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그 수치와 모욕을 감수하고 벌어 모든 돈으로 예수님께 드릴 비싼 향유를 샀다는 것입니다.
원문대로라면 이 향유는 고급 향유로 수백만원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잘 사는 시대에 사는 우리도 백만원 헌금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여자는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우리도 이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깝지 않은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아까운 사람 없잖아요?
우리가 집착하고 아끼는 것이 예수님보다 많고 클수록 사랑이 적은 것이고 속죄에 대한 인식이 아직 적은 것입니다.
성도들의 헌신은 내게 있는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걸 알기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네 재능을 좀 써야겠구나, 네 돈을 좀 쓰자, 시간을 좀 쓰자 하실 때 기쁘게 드릴 수 있는 것이죠.
또 성도들의 큰 헌신은 내가 장차 누릴 것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지를 알기에 가능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다 나를 위해 써야지 누굴 위해 쓰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나와 내 것을 사용하실 때 가장 빛나고 가치있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
시몬은 평생을 수련해 온 종교적 우월감과 그렇게 쌓아 온 자랑과 자기애를 움켜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자는 움켜잡았던 것을 예수님 앞에 다 드리고 놓아 버렸습니다.
돈도 놓았고, 수치심도 놓아버렸고, 절망과 자기 비하도 놓아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가치 있고 좋은 것만 부여잡는 게 아닙니다.
부정적인 마음, 낮은 자존감, 부끄러운 과거, 두려움, 이런 것도 꽉 붙들고 삽니다.
신자들이 붙들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좋아서 이것만은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 제일 위험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일수록 꽉 쥐지 말고 언제든 내어 드릴 수 있게 오히려 슬그머니 잡고 있어야 합니다.
자식이든, 돈이든, 명예든, 건강이든, 다 똑같습니다.
자기 자신도 너무 아끼고 사랑하면 사단이 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걸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죠.
꽉 붙잡고 있는 것일수록 내 손에서 빠져 나갈 때 고통스럽습니다.
어차피 영원히 내 소유가 되고 내 곁에 끝까지 남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하고 결국 남은 것도 없게 되는 것이죠.
애정하는 것일수록 자꾸 잡은 손에서 힘을 빼고, 예수님을 꽉 붙잡는 것이 오래토록 둘 다 동행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언제고 드리려는 것들이 오히려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물고 더 오래 주님을 위해 사용되게 하십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더 가치있고 복된 길이기에 예수님은 오늘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시몬은 그 일생이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다 믿었기에 결국 예수님께로 가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부끄러운 죄의식과 무너진 자존감과 삶의 어려움이 예수님께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잡음이 커지면 그것은 다시 하나님께 주파수를 잘 맞추라는 사인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단지 고생으로 끝난다면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얻을 게 없는 괜한 수고는 자식들에게 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공부나 하라’고 하잖아요?
훗날 예수님을 만난다면 이 여인처럼 격정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죄와 속죄의 은혜를 더욱 알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보내드린 성경 말씀 다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대로 사는 것과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 한 짝입니다.
성경의 계명들을 지키면 주님에 대한 사랑도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안 살기에 사랑도 말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나눈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고 이 땅의 삶을 영생을 위해 점점 더 아름답게 헌신하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