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2장에서 바울사도는 징계당한 성도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했죠.
실패감에 빠진 교인들에게 ‘괜찮다, 이미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개선행렬로 인도하셨다’고 용기를 줍니다.
이제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까요?
그랬다면 고린도후서는 2장에서 끝났겠죠.
오늘 본문에서 뭔가 이상한 기류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인생은 산 넘어 산이죠.
고린도교회에 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바울사도와 고린도교회에게만 일어난 사적인 것이라면 굳이 성령께서 성경으로 남기시지 않았겠죠.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에 해당되기에 우리가 받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믿음을 더 굳세게 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1.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사도의 자격 문제가 불거졌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자격을 의심한다는 것이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목사들도 당연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사도의 자격을 의심하다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1) 바울사도가 열두 제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이미 이런 문제의 소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죠.
기왕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려면 처음부터 열두제자로 부르셨다면 어땠을까요?
바울사도의 사도 자격에 대해서는 여기서만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직접 사도로 임명받은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그렇게 많이 해야 했던 것이죠.
분명 사실인데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바울사도가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입니다.
솔직히 그럴 때마다 바울사도가 열두 사도라는 신분이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우리도 그런 것 있잖아요?
나의 가정 환경, 학력, 외모, 건강, 직업, 왜 하필 그랬어야 하는지 속상할 때 많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부르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태 이전부터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나의 모든 인생을 짜 맞춰서 연출하시는 건 아닙니다.
사실 부르시기 전에 내 맘대로 살았던 일까지 책임지시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순간부터는 책임지십니다.
그건 어찌보면 그 이전의 문제들도 결국 책임져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0목사님이 신장 한쪽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젊을 때만 해도 병원 가서 내 몸 다 스캔해 보는 건 쉽지 않았죠.
김목사님도 성인이 돼서 검진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신장 한쪽 없는 것 알고 있냐’는 거예요.
대체 이게 뭔 말인가 싶었습니다.
아주 없는 건 아니고 한쪽 신장이 생기다가 말았다는 거예요.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황당합니까?
의사가 하는 말이 임신한 어머니의 영양상태가 너무 안 좋았을 거라고 합니다.
아기가 만들어질 때 뇌, 심장, 위, 간, 그런 중요한 부위부터 만들고 신장같이 두 개가 있는 것은 한쪽부터 만들고 나머지는 후순위로 밀린다고 합니다.
김목사님 아버지가 초등학교 수위였다고 합니다.
그 월급으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겠죠.
그러니 엄마의 영양실조로 신장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자기가 지금은 벤츠 탄다고 하시더군요.
목사가 벤츠 탄다고 자랑하냐는 사람이 있을 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가난해서 신장도 한 개만 갖고 태어난 자기를 일평생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부족함 없이 인도하셨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상태에서 부르셨던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김목사님은 지금 칠십이 넘었고 세 가지 암 투병을 했지만 아직도 복음 전하고 성도들을 위로하는 일을 합니다.
바울사도가 사도의 자격까지 의심 받았지만 예수님이 바울을 통해 복음의 결실을 얼마나 풍성하게 거두셨습니까?
현실이 힘들면 내 과거가 한탄스럽죠.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이상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경외하고 말씀대로 잘 지키며 살다 보면 어느날, 이만하면 내 인생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벤츠는 타도 좋고, 못 타도 괜찮잖아요?
2) 사람들은 또 바울에게 추천서가 없다는 걸 문제 삼았습니다.
사도가 아니라면 적어도 사도들이 적어 준 추천서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전화 한 통으로 이 사람 어떠냐고 물어볼 수 없던 시대입니다.
권위 있는 사람들이 써 준 추천서를 신분증처럼 갖고 다니던 때입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 성도들을 잡아서 넘기려고 다메섹까지 쫒아가죠.
그때도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이 써 준 공문을 가지고 갑니다.
그런 증명서와 추천서가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믿을 수가 없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떠난 뒤 그런 추천서를 가진 순회 전도자가 교회를 방문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도들에게 받은 추천서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 전도자들이 구약성경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 구성원은 유대교 출신의 유대인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한 이방인 교회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겠죠.
유대교 출신 성도들은 베드로하고도 할례와 율법 준수 문제로 갈등을 빚은 전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타고난 태생과 자란 토양을 바꾸는 게 쉽지 않습니다.
보고 자란 것들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깊이 새겨집니다.
어릴 때 엄마가 해 주셨던 음식들 평생 좋아하잖아요?
맛집 평가할 때 보면 맛있다는 표현을 어떻게 하던가요?
엄마가 해 주던 맛이라고 하죠.
대한민국 어머니들이 다 일류 셰프 수준은 아닐텐데요.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이 뼛속까지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율법대로 잘 지킨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이 문화이고 전통인 것이죠.
특히 안식일, 할례, 성전제사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방문한 전도자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걸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왜 할례 안 하느냐, 바울은 이런 것도 안 가르쳤냐고 했겠죠.
바울은 사도도 아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추천서도 없지 않냐, 고린도교인들을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에 성도들이 흔들렸다는 것이죠.
흔들리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게 없잖아요?
고린도교인들 중 바울사도에게 추천서를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같으면 배신감을 넘어 참 허탈했을 것 같습니다.
2. 바울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답합니다.
1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구태여 자신이 예수님의 일꾼인지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너희가 바로 그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2절,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여기서 편지라는 말이 추천서로도 쓰입니다.
바울이 지닌 추천서는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입니다.
사람들이 고린도교회가 바울에 의해 세워진 것을 다 안다는 것이죠.
아기가 태어났는데, 출산 한 여인을 보고 당신이 이 아기의 엄마라는 걸 증명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교회는 주님께서 성령과 택하신 사역자를 통해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연히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워졌는데 자격 운운하는 것은 사리에 안 맞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단지 바울사도의 추천서일 뿐만이 아닙니다.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도들 마음판에,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편지를 쓰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는 것을 강조한 것은 그런 고린도성도들이 주님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면 다른 사람들도 그걸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이죠.
비신자들은 성경을 안 읽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알겠습니까?
우리의 언행과 삶을 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읽는 것입니다.
완도에서 한 사십 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면 보길도가 나옵니다.
캐나다에서 목회하던 한 목사님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 섬으로 갑니다.
목사님 마음엔 고령의 나이에 쓸쓸하게 섬에서 여생을 보내는 노인들을 섬기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트렁크 몇 개만 들고 아내와 보길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폐가를 하나 사서 세월아 네월아 교회로 개조합니다.
왜냐하면 동네 어르신들의 집을 먼저 수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섬사람들이 특히 기독교를 많이 터부시하죠.
바다 조업을 하며 용왕신을 섬기던 미신들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노인들이 부르기만 하면 달려가 보일러며 전등이며 문짝 경첩까지 다 고쳐 줍니다.
그런데 먼저 이런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거 고쳐 줬기 때문에 교회 나가겠다 하지 ‘않으면’ 고쳐드리겠습니다.
이거 고쳐드릴 테니 교회 나오시라는 게 아니예요.
내게서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이 읽혀지면 그때 교회 나오라는 것이죠.
그렇게 노인들을 섬기고 생활을 돌봐 준지 6년이 지났습니다.
현재 보길도 교회의 예배 사진을 보니 마음이 찡했습니다.
하얀 머리에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어르신들이 작은 교회에 꽉 차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마음에 예수님이 기록하신 사랑의 편지를 어르신들이 읽으셨다는 것이죠.
이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자기가 어르신을 도와드린 게 아니라 섬사람들이 자기를 품어주었다는 거예요.
처음에 달랑 트렁크 몇 개 들고 보길도에 왔지만 지금 집에 냉장고가 네 대라고 합니다.
냉장고마다 자연산 광어와 우럭과 낙지와 전복이 꽉 차 있다고 합니다.
보길도 어르신과 목사님 내외 모두는 지금 행복합니다.
바울사도는 의심하는 고린도성도들에게 이미 너희 마음에 계신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괴로운 인생에서 쓸쓸하고 공허한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담은 편지로 읽혀지게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3. 순회 전도자의 말을 듣고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성도들에게 다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고린도성도들이 당연히 의문을 갖겠죠.
율법을 주셨다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겠죠.
우리는 율법 안 지켜도 됩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 문제를 정확히 알고 가자는 것입니다.
1)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합니다.
7절을 보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돌판에 써 주신 십계명을 대표로 말하는 것이죠.
그 율법은 나쁜 게 아니지만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해선 안 될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지만 사실 죄인의 상태로는 그 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짓는 그런 죄를 대신 속죄해 주고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의 역할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시 지킬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 계명들은 옛 율법 조문이 아니라 새 계명입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모세도 이미 율법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전해 준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가서 40일간 하나님과 지내죠.
그리고 십계명 돌판을 받아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바울사도는 모세가 썼던 전설적인 수건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세 얼굴에서 나는 광채를 보고 두려워하죠.
그러면서도 그 광채 나는 얼굴을 숭배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잘 안 섬기면서 다른 것들은 잘도 섬기죠.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가르칠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사람들이 자기 얼굴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죠.
그리고 오늘 바울사도의 해석을 보면 수건을 쓴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13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모세는 율법의 역할이 끝날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 째 돌판을 받아올 때 이미 사람들이 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 만드는 것 봤잖아요?
아, 이 사람들 율법을 못지키겠구나, 자기 손으로 그 돌판을 깨뜨렸잖아요?
율법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사라질 그 율법의 영광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의 신앙 전통 중에 은근히 율법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지 무언가를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다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걸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4. 그때까지 유대인들의 얼굴을 덮고 있는 모세의 수건은 그리스도께 나갈 때 벗겨집니다.
14절,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사람의 완고함이 이렇게 나쁜 것입니다.
자기가 맞다고 고집하는 그 완고함이 구원의 길도 가린다고 하잖아요?
구원의 길을 가린 모든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집니다.
16절,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우리에게도 진리를 가리는 수건들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태어나 먼저 받아들인 종교나 전통이나 풍습이 얼굴을 덮은 수건입니다.
그걸 완전하게 벗어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잘 알려진 유명인들이 방송에 나와 그런 말을 할 때 깜짝깜짝 놀랍니다.
삼재다, 아홉수다, 풍수지리가 어떻다, 궁합이 안 좋다, 길일을 택해야 한다,
아직도 우리 눈을 가린 풍습의 수건들이 너무 많죠.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신념이 너무 강해서 그것과 다른 것은 절대로 용납을 못합니다.
그 신념이 수건이 된 것이죠.
학교에 다니면서는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인 양 배웁니다.
진화론은 세상의 기원에 대해 가정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창조론도 그 가설 중 하나로 쳐야 공평한데 그렇게는 안 하죠.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진화론에 깊이 빠졌다고 합니다.
진화론이 답인 줄 알고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에 헛점이 너무 많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둘 중 하나를 믿는다면 차라리 창조론이 더 타당하다 생각하고 교회로 나갔다고 합니다.
요즘 컴퓨터를 켜면 시작 화면에 아름다운 사진들이 뜨죠.
지난 주 화면에 기가 막히게 예쁜 열대 조류 사진이 뜨더군요.
설명을 보니 과테말라에 사는 새라고 합니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 형형색색 깃털과 붓으로 정교하게 그린 듯한 이목구비를 보며 우리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이신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진화론에서는 단순한 생물이 생존을 위해서 더 고등한 생물로 스스로 진화를 선택한 것이라고 하잖아요?
혹시 그렇다쳐도 저 아름다운 색깔과 자태를 그 생물이 스스로 디자인해서 입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들여다 봐도 저 새가 그런 머리가 있어 보이질 않잖아요?
생물이 자기 두뇌 이상의 레벨을 선택을 했다는 게 얼마나 모순입니까?
그냥 생존만을 위해 진화했다면 지구는 온갖 기괴한 모양의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생물과 자연은 기능만 좋은 게 아니라 완벽한 진선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동물들도 참 신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자들도 배고플 때만 사냥한다고 하잖아요.
나만 생존할 목적으로 진화했다면 다 잡아 죽였겠죠.
자연세계를 보면 분명히 누군가 아름답고 선하게 디자인한 것입니다.
진화론은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는 수건입니다.
사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1장1절을 믿으면, 성경의 모든 게 다 믿어집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갈등과 의혹이 자꾸 믿음의 눈을 가리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고 주인이시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예수님을 통해서 성경을 보면 그런 모든 수건들이 다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고, 영생과 구원과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우리 믿음은 언제든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때로 그런 의혹이 문득 들 때가 있죠.
하나님이 과연 계실까.
하나님은 증명할 수 없다 해도, 예수님은 실존이시잖아요?
하나님의 성육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로 돌아가면 의심의 수건이 벗겨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을 자꾸 가리는 수건을 벗고 예수님을 명료하게 볼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왜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거면서 그 수건을 벗지 못했을까요?
왜 고린도성도들은 그 말에 솔깃한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게 사람에게는 더 쉽게 이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종교를 가질 때 그냥 의식을 따라 하는 게 더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고 자기 죄와 싸우는 것은 쉽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성경과 삶에서 찾아 만나는 것은 복된 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마귀가 고린도교회에 율법주의자를 침투시킨 것은 그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되기가 쉽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율법적인 신앙이 되고 있다는 증거는 나처럼 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섬기며 살게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강박증처럼 다 쳐내지 않으십니다.
그랬다면 세리와 창기들이 어떻게 그렇게 주님을 따라 다녔겠습니까?
우리가 그래봤자 티끌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 주님과 자꾸 사귐을 가지려 노력하면 티끌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점점 더 자신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보는 대로 변화합니다.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러면 우리도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우리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좀 더 예수님을 생각하고 배우고 따르는 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어느덧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서로에게서 발견하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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