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주간도 무더위로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하러 모인 모든 성도님들께 심령까지 상쾌한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과 세명의 친구들이 신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위대한 도전을 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역사로는 이스라엘 멸망 후 바벨론 포로시대에 속하며 지금으로부터 이천오백여년전 역사입니다.
제가 자꾸 역사를 언급하는 것은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상기하고 우리 신앙이 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는 역사가들이나 학생들만 알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니엘서 1장은 이스라엘의 패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뒤 패전국의 왕과 왕족들의 운명은 뻔하죠.
죽거나 능멸을 다하고 왕족의 후손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요즘 덕혜옹주라는 영화가 인기 상영 중인데요.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잃었을 때, 고종황제의 막내딸인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끌고 가 일본인과 강제결혼을 시키고 우리 민족의 재기 욕구를 말살시키려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내일 광복절을 맞으며 우리에게 주권이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과 광복을 위해 희생한 선조들, 그리고 광복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니엘과 다른 왕족 친구들의 형편이 덕혜옹주 처지나 똑같은 것입니다.
바벨론왕은 이스라엘의 준수한 왕족청년들을 환관으로 훈련시켜 자기를 모시게 함으로 제국의 위엄을 떨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비극적 이야기는 단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한 민족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측면에서는 우상숭배와 불신의 결과로 인한 참혹한 이 징벌 이후 우상이라면 펄쩍 뛰는 유일신 신앙이 되긴 합니다.
나라가 망해보니 그 처지가 어떤지 알게 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구원의 동반자로 부르신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계획의 다음 단계를 차질 없이 진행시키고 계셨습니다.
2절을 보면 이들이 전쟁에서 진 내력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이 패배와 포로생활의 수모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몰락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한 역사단계가 끝난 것을 말합니다.
이제 구원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을 향해 펼쳐질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포로기시대 역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당대에 온 땅을 지배하던 바벨론제국에서 온천하의 통치자이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비록 불순종하고 포로로 잡혀 갔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해 여전히 해내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패망직전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서 계속 경고하시잖아요?
‘바벨론과 싸우다 개죽음 당하지 말고 항복하라, 조용히 끌려가 거기서 자식을 낳고 집을 짓고 살아라.’
이런 예언을 계속하니 예레미야가 매국노라고 붙잡혀 매를 맞고 구덩이에 던져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결국 부모세대는 그 경고조차 무시하다 처참히 죽고 공포에 질려 바벨론으로 끌려간 소년들을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그들을 통해 온 천하에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 바로 다니엘서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길러내신 인물들이 다니엘이나 에스더왕비,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들의 활약을 통해 느브갓네살왕 뿐 아니라 다리오, 고레스 모두들 자기 입으로 이렇게 시인하죠.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서는 역사의 마지막에 예수그리스도의 나라가 굳게 세워질 것을 꿈의 해석과 환상을 통해 예언합니다.
지난번 수련회에서 아가서의 전체적인 내용을 아셨듯이 다니엘서 전체는 이런 배경을 갖고 읽으면 됩니다.
그 다음, 다니엘과 포로소년들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을 비교해 보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영적인 바벨론이라고 성경은 묘사하잖아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바벨론세상에서 미미한 취급을 받으며 살기는 다니엘의 처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어디 신자들을 인정합니까?
저도 어디가서 목사라고 하면 초라한 신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벌써 사람들이 좀 열등하게 깔고 보는 경향이 신기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한구석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평범한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심을 나타내고 영광을 받으시길 작정하셨습니다.
우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를 통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에 대해서 세상에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게 아니면 다 천국으로 데려가셨죠.
오늘 소년 다니엘과 친구들이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를 살펴보며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데 도전받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다니엘과 친구들의 신앙의 도전이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바벨론 당국에 발탁되어 삼년 간 바벨론의 문물을 배우고 학문을 익힌 뒤 왕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 온 처지에 이것은 생존과 새 인생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소년들은 환관장의 관리 하에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고 왕궁에서 지급되는 산해진미로 길들여졌습니다.
권력을 갈망하게 길들이는 것이죠.
그런데 그 중 당돌한 네 소년들이 신앙의 바벨론화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당시 왕궁의 고기들은 먼저 신전에 바쳐졌던 것들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고 환관장에게 채식만 먹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제안이나 양해를 구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환관장의 눈에 나면 목숨이 위태로운 모험입니다.
덕혜옹주가 조선 징병자들 앞에서 일본 충성을 촉구하라고 세웠더니 ‘저는 조선의 옹주 이덕혜입니다’ 라고 말한 조마조마한 순간과 마찬가지로 심장이 얼어붙을 광경입니다.
환관장의 눈에 이 말이 어떻게 들리냐에 따라 목숨도 위태한 순간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들은 급변한 환경 속에서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 정신조차 수습하기 어려운 처지 아닙니까?
평소에 신앙이 좋은 성도들도 현실이 다급하면 신앙이 하늘로 붕 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십대의 청년들은 이런 절박한 처지에서 이런 무모한 믿음의 용기를 내게 되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앙세계가 보이는 보이는 상식세계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상식과 자연세계만을 체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여기에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신앙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갑니다.
신앙의 세계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세계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상식적인 생활과 신앙생활이 따로 놉니다.
그런데 점점 은혜를 알고 성령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자연세계와 계시의 세계가 서서히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처음에 뭔가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의문스러웠던 신앙의 세계들이 점점 자연적인 삶과 일체되고 조화를 이룹니다.
밥을 먹을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일을 할 때나, 오락을 즐길 때나 신앙이 비빔밥처럼 묘하게 잘 섞여지게 됩니다.
신앙 안에서 보면 이 두 세계는 의외로 조화롭게 잘 어울립니다.
그게 원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창조하신 본래 모습이잖아요?
어색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땅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가 정면충돌 할 때입니다.
직장에서 주일근무하라면 주일예배를 드려야 되는 상황과 대치됩니다.
가족들과 제사 문제로 갈등이 생깁니다.
상식세계에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여가와 오락이 신앙생활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느냐가 성도들의 삶에 종종 제동을 겁니다.
그럴 때 서슴없이 세상쪽의 요구를 따르시렵니까?
오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 갈등 상황에서 신앙의 세계를 선택합니다.
바벨론왕궁으로 끌려와 왕에게 목숨이 달린 것 같았지만 그 상황을 지배하고 계신 더 크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확고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일도, 사랑하는 사람도, 잠 못 이루는 고통도 하나님 앞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스쳐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상식과 신앙의 두 세계에서 조화있게 살아가면서 신앙의 관점으로 세속세계에서 영원하고 가치있는 것을 골라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우선으로, 최대한으로 신앙의 세계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으로 선택하고 세속의 혜택을 포기한 성도들에 의해서 확장되어 왔습니다.
믿음이 주는 좋은 혜택도 누리고, 세상으로 부터도 모든 것을 챙기려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영적 바벨론에서 기업을 찾으려고 좇는 사람들이 바벨론과 함께 망하는 장면을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줍니다.
성도들은 힘든 결심이라 할지라도 신앙의 세계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영광스럽게 하심으로 그 선택을 보상하셨고, 그들을 통해 바벨론에서 영광을 받으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선택하며 사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나마 신앙을 유지하며 사는 것은 어느덧 최소한의 신앙의 기준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주일예배, 그리고 성도간의 교제, 개인의 기도생활과 성경읽기와 같은 기본적인 준거를 나름대로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말씀을 근거로 마음과 인격을 가다듬고 타인에 대한 명령들을 실천해 갈지를 계속해서 더 삶의 기준으로 세워가는 것이죠.
그것의 정도에 따라 균형 잡히고 신실한 성도들이 되기도 하고, 교회는 나오지만 인격이나 덕을 세우지 못하는 성도가 됩니다.
삶의 위기의 순간, 더 중하고 가치 있는 신앙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매일 평범하고 일상적인 신앙을 훈련함으로 가능해집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야 할 식사에 대한 율법을 알고 그에 따라 훈련되어 왔습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서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왔다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이 ‘할랄’이라는 음식법이 있듯이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코셔’라는 철저한 음식법을 갖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엔 돼지고기나 부정한 동물의 고기나 귀신에게 바쳐졌던 음식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
패망 당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귀신에게 바친 제물을 서슴없이 먹었다고 에스겔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어려서부터 이 율법을 철저히 따라 자신을 지켜 왔습니다.
오늘 그 장소가 멀리 바벨론 땅으로 옮겨졌고, 그 장소가 바벨론왕궁이었다 할지라도, 그 기준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신앙훈련을 게을리 한 사람이 위기의 순간에 믿음으로 뭔가를 해 낼거라는 생각은 아름답긴하지만 환상입니다.
오히려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서 그 사람의 진짜신앙의 현주소를 보게 되잖아요?
우리의 신앙은 부단히 훈련되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신앙 훈련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 능력에 대해서 과소평가합니다.
영적인 삶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비대하지만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은 신앙의 깊이를 훈련하지 않아서입니다.
신앙이 다 얕습니다.
얕은 신앙은 개인도, 교회도, 작은 시련에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적인 선택과 세상적인 선택은 항상 갈등을 일으키다 본성적으로는 결국 세속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선택을 위한 유일한 길은 훈련으로 아예 습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복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연습은 뇌작용 까지 바꾸고 결국 사람의 둘째 속성이 된다고 오스왈드챔버스는 예리하게 권고합니다.
위기가 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할 뿐 아니라, 이렇게 훈련된 우리의 본성도 함께 그 위기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전엔 작은 오해나 시험에도 발끈하고 마음이 괴로워 지옥을 넘나들었는데지금은 점점 시험에 강해지고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고상하고, 지적으로나 인품에 있어서 뭔가 남과 차등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어려서부터의 교육으로 인한 훈련의 결과입니다.
성향은 타고 나지만 성품은 전적으로 훈련에 따른 결과입니다.
요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감격적인 소감을 말하는 선수들에게서 한결같은 공통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들의 삶은 오직 연습, 또 연습이었습니다.
양궁 기보0 선수는 남들보다 백발을 더 쏘는 연습벌레라고 하죠.
연습 뒤엔 기력이 떨어져 25일간이나 연속 치킨을 시켜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격 진종0 선수의 경우 취미활동조차 낚시나 사진촬영을 하며 집중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이번에 2천 안타를 친 LG의 박용0 선수, 그 역시 ‘오늘은 결국 내일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뜻을 이루기 위해서도 이런 연습과 훈련은 필수입니다.
신앙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얻기 위해서는 오직 연습과 훈련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훈련되어 온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신앙이 훈련되고 더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진보가 없는 신앙만큼 따분하고 지루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어쩜 그렇게 똑같습니까?
저도 성장하지 않을 때 가장 제 자신이 괴롭습니다.
우리 인격은 점점 더 예수님을 닮도록 조금씩 더 온유하고, 관대하고, 정이 넘치고, 남에게 더 베풀고, 여유 속에서 강인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연습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연습은 우리가 할 일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런 다니엘과 세친구들의 결심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십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동일하게 주시는, 남들과 똑같은 그런 일반적인 은혜만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졸부아버지처럼 무조건 자식에게 쏟아 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성품이 훈련을 통해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특별히 섬기려고 결심하고 훈련할 때 하나님은 일상의 은혜를 뛰어 넘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의 말도 안되는 제안을 들은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심지어 내게 호감을 갖지 않았던 사람에게서도 예기치 않은 호의를 받게 하십니다.
환관장이 이런 말도 안되는 제안에 대해 불호령을 내린 게 아니라 자신에게 해가 없다면 제고해 볼 수도 있었겠다는 너그러운 답을 하게 하십니다.
노예로 끌려 온 주제에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부하겠다는 말에 대한 반응으로서는 생뚱맞을 정도의 관대함이죠?
환관장의 완곡한 거절에 대해 다니엘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다음엔 자신을 직접 관리하는 감독자에게 또 부탁을 하며 제안을 합니다.
우리는 겨우 마음을 정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보려다 약간의 장애가 오면 즉시 합리화시키며 뜻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니엘은 장애에 막혔을 때, 다른 길을 또 찾아냅니다.
사랑은 언제고 그렇듯이 길을 찾아내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길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오셨기에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거부했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섬길 길을 찾아냅니다.
다니엘은 열흘만 시험적으로 고기와 술을 뺀 채식만 먹은 뒤, 다른 소년들과 비교해 달라고 감독관에게 간곡히 제안을 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감독관에게 임해서 이 제안대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는 드디어 채식이 허락됩니다.
하나님은 이 소년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하셨을까요?
이들이 다른 소년들이 누리는 화려한 식탁을 거부하고 채식을 한 것이 무려 삼년입니다.
한창 성장기의 소년들이 얼마나 고기로 만든 음식들이 그리웠겠습니까?
훈련은 간단히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17절에 보니 하나님은 이 훈련기간 동안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이 뜻을 정하고 계속 자신을 훈련하고 믿음을 지켜갈수록 하나님도 점점 학문과 지혜를 주셔서 이들을 출중하게 만드셨습니다.
다니엘에게는 특별한 사역을 위해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아는 영적 지혜도 주셨습니다.
이 당찬 믿음의 싸움에서 하나님은 네 소년의 손을 번쩍 들어 주십니다.
느브갓네살왕이 삼년 뒤 소년들을 대면해 보니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보다 뛰어난 자들은 없었습니다.
이들의 지혜와 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열배나 나은 것을 왕이 알아보고 그들을 등용합니다.
그리고 21절에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느브갓네살왕 부터 고레스왕까지의 기간은 약 칠십년입니다.
그 긴 세월동안 정세가 격변하며 시날지역에 왕들이 여러 번 바뀌지만 그 때마다 다니엘은 유력한 정치인으로 등용이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니엘서 1장,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은 행복하게 권력을 누리며 잘 살았다로 끝나는 것이 다니엘서의 기록목적이 아닙니다.
이후 다니엘의 세 친구는 더 큰 신앙의 도전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고 하나님을 더 영광스럽게 바벨론 제국에 나타내 보입니다.
훈련은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금씩 더 깊고 강도 높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과 세상에게 확증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믿음의 결단으로 불속에 던져지고, 금지된 기도를 계속하다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기적적으로 건지시고 결말은 항상 왕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들의 지위도 점점 더 높여지죠.
우리가 신앙을 바르게 갖고 지속적인 훈련으로 견고한 믿음에 서게 되면 상식세상에서 얼마든지 신앙으로 유력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이 주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다 차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뜻을 정하고 자신을 훈련하고 사는 청년들이 세상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삶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도 중요한 인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어낸 인재들은 절대 세상을 바르게 세우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우리 자녀들, 다음세대를 다니엘과 같이 믿음으로 키워내길 원합니다.
솔직히 우리 세대는 상식의 세계가 너무 커서 신앙의 세계를 늘려가는 게 어렵습니다.
당장 통장에 돈이 없으면, 하나님을 뒤로 하고 돈 벌러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겠어요?
어린아이들은 인간의 상식을 따지기 전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정말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 말씀이 아이들한테도 타당하게 들리고, 나름 옳다고 인정할 때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청소년부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게 믿어지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럼요’하고 대답하는 데, 그 얼굴에서 진짜 믿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직 죄와 예수님의 속죄와 거룩한 삶에 대해 더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도 장년세대들은 젊은 세대보다 장점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그래도 젊은이들 보다 의지가 강하지 않습니까?
의지를 발동하면 얼마든지 기도 시간을 정해서 꾸준히 노력할 수 있고, 성경읽기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감정보다 의지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신앙적인 훈련을 통해 다 바뀌어야 한다고 인식하면 틀림없습니다.
외적인 경건의 훈련 뿐 아니라 내적인 성품도 훈련해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찔림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죄의 뿌리에 관련된 것입니다.
집념을 갖고 죄를 잘라내며 우리를 연단해야 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한 자매는 실제로 자신의 입에 반창고를 붙이고 마스크를 쓰고 일주일씩 말을 하지 않으며 죄질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또 봉사와 헌신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귀중한 것으로 조금씩 더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도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 훈련이 우리 힘만으로 되지 않기에 우리의 시선은 산상수훈의 계명을 주시고 지키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훈련도 또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우리를 주목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최대한 생각하는 훈련은 가장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이렇게 훈련된 성도만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께서 모든 걸 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쉽게 기억해 내고 이겨나가게 될 것입니다.
훈련되지 않은 신앙은 상식의 이 세상에서도, 영적 계시의 세상에서도 무능하고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구슬땀을 흘리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영광스런 메달을 목에 걸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깊은 바다처럼 요동치 않는 인격을 얻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충만히 나타나시길 위해 열심히 훈련하길 원합니다.
그날에 우리 모두 예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6년8월14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