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말씀인 디도서는 바울사도가 디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우면 동역자들에게 맡기고 다음 선교지를 향해 떠났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한 때 디모데에게 맡겼죠.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는 에베소서이고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개인 편지가 디모데전후서입니다.
오늘 디도서는 그레데교회에 남겨 둔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레데는 그리스의 크레타섬입니다.
디도서를 읽어보면 그레데교회의 상태가 많이 심각합니다.
1장12절을 보면 당시 그레데사람에 대한 평판이 이렇다고 합니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그레데사람들의 거짓말이 얼마나 유명한지 헬라말로 ‘거짓말하다’는 ‘그레데사람처럼 말한다’입니다.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는 말은 물질적인 생각이 배 속까지 꽉 차 있는 데 실제로는 열심히 일을 안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해야 하니 디도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바울 사도도 그레데 교인들에 대해 안 좋게 평가합니다.
16절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런 성도들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디도에게 보낸 해답은 성도들을 엄하게 꾸짖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앞에 보면 연령과 성별에 따라 어떻게 훈계할지를 세세하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가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원어 성경엔 ‘왜냐하면’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너 자신이 본을 보이며 엄하게 가르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은혜로 양육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되는 것이죠.
오늘은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양육하시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대체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오늘 말씀이 그것을 알려 주십니다.
말씀을 듣고 ‘내가 점점 이런 사람이 되어 가겠구나, 지금 나는 잘 되어 가고 있나, 나도 이런 사람이 되도록 더 신경을 써야겠구나’
이렇게 우리 스스로도 노력하려는 것이죠.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좋게 가르치려 해도 자식이 방문 쾅 닫고 들어 가버리면 소용이 없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심판하지 않고 무조건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번역이 좀 헷갈리게 되었는데 영어성경도 그렇고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로 되어 있습니다.
말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죠.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열렸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자녀가 된 성도들을 양육하십니다.
아이들이 자기를 양육하지 않고 부모가 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도 우리는 하나님께 양육을 당한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하나님이 무엇을 가르치고 훈육하시던가요?
한 주 동안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지도하신다는 것을 한 개도 깨닫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직무유기로 양육을 안 하신 게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양육하신다고 하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이 받으신 자식들은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치신다고 확고히 말씀합니다.
우리를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안 하신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방문 쾅 닫고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죠.
또 신앙이 아직 어려서 말씀 듣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양육하기를 절대로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으로 우리를 양육하실지 12절에 나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정욕을 버리도록 하신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복음은 막연한 종교심이나 긍정적인 에너지가 아닙니다.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행할지가 바로 믿음입니다.
정말 믿는다면 행동이 따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양육을 곱게 잘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은 이걸 버리고 있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게 하시는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의 정욕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내용면에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을 불신하는 세속 세상이 만들어 낸 것이 세상정욕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에서 금하신 것이 곧 세상의 정욕입니다.
디모데후서에는 말세에 세상 정욕대로 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열거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하나님은 이런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이런 것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까?
문제는 성도들이 이렇게 양육받는 것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도 죄의 본성이 있기에 세상정욕 대로 사는 걸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불행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사람들도 세상정욕을 좇지만 거기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삽니다.
한 인터넷매체에서 설문 응답자들을 분석한 결과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응답자들은 삶에서 스트레스 감정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 외에는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는 대답이 우울하고 고독하다는 부정적인 답변보다 월등히 높게 나왔습니다.
기독교 비율이 1퍼센트도 안되는 일본의 경우 이번에 발표한 것을 보니 생활에 만족한다는 비율이 74.7퍼센트나 되더군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 극도의 시련을 당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만족과 행복을 느끼며 산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에게 성실히 수고하고 얻은 것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주실 생각만 하며 벼르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 인간을 미워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세속적으로 보자면 신자들이 더 힘들게 삽니다.
세상 흘러가는 대로 본성의 욕구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오히려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다 보니 기도해야 하고, 성경 읽어야 된다는 의무감에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성질대로 하고 나면 죄책감 들고, 성질 죽이고 살려면 손해 보는 것 같고, 신앙 때문에 더 갈등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본성적으로는 정욕적이고 세상적인데도 우리가 세상 정욕대로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벌써 세상의 정욕대로 나가서 살았겠죠.
노련한 부모나 교사는 아이들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슬기롭게 양육하고 성공을 거둡니다.
TV에 반려견 조련사들 보면 정말 신기하죠.
개들을 유심히 관찰한 조련사들은 개의 특성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핵심적인 해결책으로 아주 쉽게 개를 길들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단점과 약점을 교정 받으며 양육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도가 달마디아로 갔다고 말합니다.
현재 유고 지역입니다.
그레데 교회의 성도들이 어느 정도 양육되었기에 본토인 장로들을 세우고 떠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디도가 게으르고 악한 성도들을 포기하고 실패한 채 떠났다면 지금처럼 크레타섬에 디도기념교회의 유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죠.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 그레데성도들도 하나님은 양육해 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양육에는 성도들의 적극적인 수용의 측면이 포함됩니다.
우리 스스로도 성경에서 금하는 세상의 정욕을 힘써 버리도록 노력해서 경건한 믿음의 자녀로 양육되어 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세상의 정욕은 버려야 하지만 대신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이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먼저 신중함은 근신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영어성경에는 자신을 컨트롤한다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이성과 논리보다 더 강력한게 감정입니다.
‘나 이유 없이 저 사람 싫어.’
그러면 게임 끝난 거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과 말을 잘 통제하는 신중한 사람으로 양육합니다.
말씀을 통해 계속 우리를 교정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29장20절에서 조급한 말에 대해 이렇게 경계시키시죠.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성급하게 말하지 말아야겠구나’ 우리를 고쳐가게 되는 것이죠.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사는 결과는 늘 분란과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품으로 양육하십니다.
다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양육하십니다.
그 의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로우신 삶입니다.
세상엔 70억개의 자기 의가 있잖아요?
분쟁이 생기면 다 자기가 옳기 때문에 시비가 가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임 부녀회장인 자신을 대우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을 잔치에 쓸 고등어탕에 농약을 집어넣고도 양심이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할머니 왈, 농약냄새가 나서 안 먹겠지만 혹시 먹고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자기가 옳다하는 게 기준이라 양심의 가책이 들지도 안하는 것입니다.
똑똑한 정치인들이 밤낮 싸우면서 왜 그렇게 합의를 못 내놓겠습니까?
자기가 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겐 오직 예수님의 의가 기준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양육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의로운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만 내가 의롭다고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하는 데 어떻게 내가 의롭겠습니까?
교회가 요즘 얼마나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양육 받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면 우리는 하나님보시기에도, 사람보기에도 의롭다 인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건전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의가 사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예수님의 의에 맞춰 양육하셔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너무 고지식하고 답답하다고 할지 몰라도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을 속으로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행하며 세상을 선도하도록 우리가 점점 더 의롭게 양육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은혜로 양육을 받는 성도들의 특징은 점점 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항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에 기울게 됩니다.
스스로 세상의 나쁜 정욕을 피하려고 노력하게 되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경건의 방편들을 통해 우리를 경건하게 양육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에서 주일예배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을 조사했습니다.
자녀들의 학원 수업과 예배 시간이 겹쳐졌을 때 어디를 보낼거냐고 물었습니다.
절반 이상이 학원을 보내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 중 60%가 안수집사와 장로였습니다.
평신도보다 중직자들이 더 주일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참 이상한 통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신자들에겐 당연한 의무이고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섬김인 것이죠.
예배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수록 우리는 점점 경건하게 됩니다.
숙련된 신자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개인적으로 기도도 하고 말씀도 읽고 신앙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완전히 하나님께 집중해서 드리는 예배와 성찬과 설교가 없다면 온전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은 이교적, 미신적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게 본성에 더 가깝고 우리 조상들에게 받은 부끄러운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또 인기를 얻고 있는 ‘신과 함께2’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무속신앙을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줍니다.
1편에는 없는 성주신이 등장하잖아요?
집식구들을 보호하는 가택신으로 사람을 도와주는 존재로 나옵니다.
전체적인 주제인 환생도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김수홍병장이 생전의 선악간 행위와 관계없이 환생하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희망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들 자기가 억울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믿는 분들 입에서 사주니, 백중기도니 삼제니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올 때 저는 가슴이 철렁합니다.
한주간 동안 받아들인 이런 모든 미신과 무속적인 더러움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씻고 경건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배에 나와서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에 나와 성도들이 함께 어울리고 교제할 때 함께 경건해집니다.
그래도 교회 모임은 좀 경건하잖아요?
예배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성도가 어떤 모임에서 경건을 배우겠습니까?
또 개인의 경건한 기도생활, 청소년부가 열심히 하고 있는 QT, 말씀 묵상, 이런 신앙의 방편들을 힘써 행할 때 우리는 점점 더 경건한 성도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다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양육되며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3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은혜 안에 우리가 잘 양육을 받고 있다면 한 가지 소망이 점점 절실해지고 그것이 이뤄지길 기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복스러운 소망, 하나님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날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어떤 사실 때문에 제일 놀랄 것 같습니까?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그리스도가 크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맞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우리 주 예수님 앞에 서실 날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삶을 누리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님의 영원한 나라를 기다리는 것은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점점 더 강하게 갖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때로 삶이 기댈 데 없고 바랄 것이 없는 어려움 중에 있다면 그때 하늘의 소망을 갖도록 우리를 양육하실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가장 행복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가장 행복한 순간보다 더 행복한 곳이 천국입니다.
사람이 사랑할 때 행복하잖아요?
천국은 우리 마음에 그런 사랑이 충만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날마다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는 정말 크게 놀랄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이유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선한 일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과 기도와 말씀, 봉사와 전도는 하나님의 선한 일입니다.
이 선한 일을 더욱 열심히 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고 평생 하나님의 교훈을 빛내며 열심히 살아갈지를 잘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청소년부는 장차 어떤 일을 하며 주님을 섬길지를 지금부터 열심히 기도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번에 은퇴하는 펜싱 남현희선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도전이 되더군요.
다시 살아도 이만큼 노력할 수 없다며 자신에게 99점을 준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도 이렇게 최선을 다해 사는 데 나는 과연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몇 점짜리로 살아가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번 이산가족2차상봉 때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졌다 67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죠.
아버지의 유전자 때문일까요?
둘은 유독 술한 체질이라 술을 못 먹는다고 합니다.
이 묘한 동질감에 놀라며 아버지와 아들은 물잔을 들고 건배를 했습니다.
이모를 만난 조카는 어쩌면 이렇게 엄마와 똑같으시냐며 울먹였습니다.
천국에선 우리가 서로를 보며 놀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서로 닮았지?’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을 닮도록 양육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경건하게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게 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얻을게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죠.
나와 복음을 위하여 희생한 것은 금세에 백배나 받고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좋은 것을 심는 데 나쁜 것을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세와 내세에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따라 우리를 성장시켜 나가시길 바랍니다.
버릴 것은 버립시다.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의 정욕들이죠.
그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마지막 날을 점점 더 소망합시다.
그리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충만하게 받으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8년8월26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