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약성경은 창조 때부터의 길고 긴 역사를 기록하고 있죠.
전에 구약성경을 열 시대로 구분해서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생각이 나는지 한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시대, 정복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시대, 침묵시대
이 연대표를 머리 속에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서는 구약성경 마지막 책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에 속할까요?
포로귀환 시대입니다.
포로귀환 시대의 대표적인 선지자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학개와 스가랴선지자는 포로귀환 후 성전 건축을 이끌었던 선지자입니다.
말라기선지자는 이후 다시 타락한 귀환 공동체의 신앙과 부도덕한 삶을 책망한 구약성경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이후로 4백여년 간의 침묵시대가 옵니다.
마지막 구약성경이라면 특별한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말라기는 오늘 한번만 나누고 마치기 때문에, 구약역사 전체 맥락에서 무슨 의미를 가진 성경인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과 각 구절들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이해해야 내용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2. 말라기서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또 다시 타락한 죄악상을 폭로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불신앙, 성의 없는 제물로 때우는 예배, 이방여인과의 결혼과 우상숭배, 정의가 사라진 사회, 성전봉사를 위해 필요한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것.
이런 여러가지 문제들을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바벨론땅의 안전한 정착생활을 포기하고 신앙을 위해 귀국한 이스라엘이죠.
그런데 왜 이 정도로 엉망이 되었는지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인간 내면의 죄성이죠.
하나님을 싫어하고, 무성의하게 섬기고, 치우친 자기 사랑으로 이웃을 해롭게 하는 것이 항상 신앙이 변질되는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반대를 요구하시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해라.
우리는 보통 일방적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죠.
이것을 구약성도만의 취약점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본성은 모든 인간들, 거듭난 신약성도들도 공유한 본성입니다.
이렇게 구약시대 마지막 순간까지 해결되지 못한 이스라엘의 실패는 무얼 증명하는 것일까요?
사람의 죄성을 고치는 데는 백약이 무효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있는 단점, 약점, 항상 빠지기 쉬운 죄, 그거 고쳐집니까?
그걸 거의 뿌리 뽑지 못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눌러 놓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평생 죄짓고 살다 죽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구약시대 마지막에 와서 빼도 박도 못하게, 그런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확증하는 것이 이 말라기입니다.
3. 결국 구약시대 마지막 실패까지 보여주고 하나님은 사백년 간 침묵하시는 것이죠.
말라기서와 마태복음 사이에 4백년 동안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왜 오랜 기간 침묵하시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1) 우선은 징계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이대로 가면, 타락과 불신앙이 극치에 이르겠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말씀과 선지자가 없으면 바른 교훈을 받고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죠.
아모스선지자도 말씀이 없는 기근을 징계라고 했습니다.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지만, 그들의 죄악을 당연시 여기진 않으시는 것이죠.
호세아서3장4절도 이때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내 됨됨이를 계속 지도받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도 곧 암흑기가 됩니다.
2) 두번째 이유는 구약성경 시대와 신약성경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백 년 공백이 없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예수님 사역이 더 구약성경의 그림자에 가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언약에서 새언약으로 바뀌는 구분을 확실하게 두시는 것이죠.
3) 세 번째는 이 침묵기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언어가 통일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죠.
세계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건설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종횡무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4백년 간 인간의 지성과 학문이 눈부시게 발달합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리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다 이 시대에 나옵니다.
지성의 깨우침이 없이는 복음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중세 카톨릭이 또 하나의 암흑기인 이유는 성경을 금서로 만들어 깨우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구비 된 시간이 바로 4백년의 침묵기입니다.
신학에서는 신구약 중간기라고 합니다.
지난 주 백목사님이 이 시대 역사를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4.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여섯가지 죄 문제 중에 마지막 죄에 대한 하나님과 백성들의 논쟁 부분입니다.
2장17절,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이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괴롭다고 하셨더니,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다고 합니까?
‘우리가 언제요?
이런 뻔뻔함은 어지간한 확신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이렇게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확신에 차 있다는 데서 우리는 경고음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옳을까요?
내가 확신하는 것들이 과연 일말의 오류도 없을까요?
지금 정국을 보면 정반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가 확신하는 게 옳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것을 떠나 요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옳은 걸까?
내가 잘하는 줄 알았던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평소 주장하는 것들이 지나친 확신은 아닌지 종종 멈춰서 판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발뺌하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한 말을 그대로 들려주십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하나님께 대해서 상당히 삐딱하죠.
스스로 죄와 타협하며 조금씩 이탈한 신앙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포로귀환 이후,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했던 민족의 영광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배하며 세금을 뜯어가는 저 악한 페르시아 편이신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정의로우신가?’
그런 불만과 회의감이 팽배해 있는 것이죠.
학개 선지자가 성전 건축을 적극 독려하면서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실거라고 했습니다.
스가랴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약속은 다 어디 갔냐는 것입니다.
사실 스가랴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이런 것입니다.
9장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게 어떤 약속입니까?
겸손한 메시야가 오신다는 약속이잖아요?
딱 봐도 그들이 원하는 정치적 메시야는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위대한 왕이 와서 부강하게 해 준다고 믿은 것이죠.
학개선지자도 이런 말로 성전 건축을 독려했습니다.
2장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도 참성전인 예수님이 오셔서 만방에 평강을 주실 것에 대한 예언이죠.
하나님은 근본적인 구원과 축복을 약속하신 것인데, 사람들은 계속 육신의 복으로 받아들이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줄곧 유일하고 완전한 영혼의 구원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없어서, 구원이나 받으라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예수그리스도 안에 모든 좋은 것이 있잖아요?
지금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똑같습니다.
지금도 예수님 믿는 걸 현세 문제 해결되고 편안히 사는 걸로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말라기 시대 성도들은 비록 더디다 해도, 하나님 약속대로 예수님의 초림을 믿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사는 게 옳은 것입니다.
5. 결국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약속을 지키셨죠.
하나님은 이들의 억지에 대해 다시 한번 그 계획을 약속하십니다.
두 가지 사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이미 신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이게 누구에 대한 예언인 줄 압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이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7장27절에서 이 구절이 세례요한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이 구절을 잘 보면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는 분이 누구신지를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내 앞에 사자를 보내신다면 그 다음은 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오신다는 것이죠.
사백년 뒤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시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두 번째 예언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준비한 다음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구원자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이것은 사백 년 암흑기를 지나 예수님이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기대했던 방식이 아니라는 뜻도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가 왕궁에 태어나 왕이 되셨다면 갑자기 임하신다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셔서 삼십 년을 무명의 목수로 사신 예수님이 삼십 세에 이스라엘에 나타나실 것에 대한 예언이죠.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메시야왕은 그렇게 홀연히 성전에 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했던 여섯 가지 죄에도 불구하고, 4백년 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2024년12월18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수요기도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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