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말라기3장13절-18절)

남수연 2013. 10. 3. 13:42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성경입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라고 시작됩니다.

그동안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되었던 경고의 종결이라고 보아야 하겠죠.

숱하게 보낸 선지자들을 듣지 않은 백성들에 대해 명백하게 다가 올 심판을 선고함과 동시에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법정공방을 벌이는 것 같은 독특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시면 이스라엘은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꼭꼭 집어가며 증거를 대시면 이스라엘은 묵묵부답 묵비권을 행사하는 대화식으로 여섯가지 정도의 죄목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처럼 그런 시대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그들과 극명하게 대조시키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을 돌아보고, 또 은혜의 말씀으로 메마른 우리 심령이 생기를 얻고 용기를 얻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말라기서 전체를 훑어보며 본문에 드러난 이스라엘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구약시대 말의 이스라엘의 형편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약시대 말 현대 성도들의 모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장에 보면 논쟁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랑이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냐며 반문합니다.

왠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자식 키워본 사람들은 한번쯤은 다 들어봤기에 느낌 아실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께 대해 갖는 섭섭한 마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의심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의 내면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공통점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일관되게 지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신 것에서 확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이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계속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자꾸 확인하고 기도를 통해 체험하려고 하나님께 자꾸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낌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말씀의 감동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기도를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것을 통해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게 사람들의 가장 큰 재앙이고 환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이미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독수리의 날개로 그 민족을 업고 오신 하나님의 은혜도 사랑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성전의 예배는 진정성이 없는 형식만으로 때워지게 됩니다.

사랑을 모르니 드릴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열정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의 없는 예배와 제물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얼마나 성전제사가 불경스럽게 드려졌는지를 따지십니다.

제사장들조차 흠이 있는 동물로 제사드리는 것을 당연시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걸 뭐하러 건강하고 흠없는 동물을 쓰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제물을 가져다 각을 뜨고 번제로 태워 올리는 이 번거로운 짓을 왜 하냐며 코웃음을 쳤다는 것입니다.

동물제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를 어긴 자들은 구원언약에서 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죄들을 속죄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동물제사입니다.

죄 없는 동물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고 내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누군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통해 각인을 시키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러 오실 것을 예표하기 위해 주신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죄의식을 못느낄 만큼 죄가 굳어지니 속죄제사가 번거롭고 쓸데없는 짓처럼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죄를 느끼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었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율법으로 바르게 지도해야 할 제사장조차 이렇게 속죄와 예배를 경멸히 여겼으니 백성들이야 어땠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삶이 형편없이 저속하게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이 이렇게 일상의 문제로 계속 파급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가 없는 교회와 가정은 결국 죄의 물결에 잠식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정을 깨고 거룩한 혼인의 의무도 버립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마음대로 이방여인들과 잡혼을 하고 약한 자를 학대하는 악습이 만연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런 곳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신세타령을 할 만큼 삶이 고달프고 박복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죄를 책망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뻔뻔하게 응대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죠.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 있다

그러자 그들은 다리를 건들거리며 하나님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죄 가운데 오래 강팍해진 영혼은 스스로 죄를 자각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말씀을 통해서도 잘못된 믿음을 교정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을 통해 우리를 비춰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부족한 것들을 깨닫고 늦기 전에 고칠 수 있는 것이 성도들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지도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칠 기회를 수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앞 3장7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고 교정받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대적하는 말들을 정확하게 기억했다가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 말입니까?

남편이, 혹은 아내가 이 결혼생활이 무의미하다.

자녀가 부모에게 호적 파서 나가겠다 이런 거나 다름이 없는 비수 같은 말입니다.

최근에 영국의 존 헌트라는 사람이 교회 세례인 명부에서 자기 이름을 완전 지워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교회에서 아예 호적을 파겠다는 것이죠.

영국 무신론자 단체에서는 이런 사람을 위해 자체적으로 세례무효화 증명서를 5천원 정도에 발급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어느 종교에서도 없는 전무후무한 기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지금 그런 상태나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명령을 지켜봤자 별 유익도 없으니 더 이상 믿을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재미도 없이 사는 것이 처량하기만 하다는 것이죠.

그들의 눈에 불신자들, 이방인들의 삶이 부러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보니 오히려 교만한 자가 더 복을 받고 악을 행하는 자가 더 번성해 보이니 더 이상 하나님께 매력을 못느끼겠다고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종교생활의 결과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인격자로 만나고 그 안에서 풍성한 영적인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신앙이 아니면 언제든지 이런 허무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죽은 다음 영생이 불확실하고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이 모든 게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인격적인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현세에 복을 받고 흉한 일을 막아달라는 일종의 거래일 뿐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다 소원대로 안되자 지금 허탈과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상실엔 민족적의 역사적 배경과 하나님께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핑계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그 들의 신앙적인 열망과 감격은 너무나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한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126장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이렇게 큰 감격과 기쁨으로 돌아와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남은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이 나타나 다스리며 영광스런 민족의 번영을 이루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정은 생각한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돌아온지 백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페르시아 총독이 그들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아닌 이방인 관료들에 의해 여전히 수치스런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셨다고 놀라던 주변나라들도 점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 우리도 충분히 이해가 되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데 모든 일이 막히기만 하고 기대가 좌절될 때 마다 실망감을 이기기가 참 힘이 듭니다.

주변사람들에게도 잘 안 풀리는 내 처지가 왠지 창피한 생각이 듭니다.

좀 잘 되서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당당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 세레머니를 멋지게 하던 박주0 선수가 요즘 아스널에서 벤치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기도세레머니를 시작하지 말 것을 하고 본인도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메시야왕국의 회복과 번영을 기대했던 이스라엘이 큰 실망감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믿음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불편한 환경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인도하실 때 아들 이스라엘은 어떤 환경이든 신뢰하며 믿음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의도는 아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아들을 위한 최선 아닙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교육보험을 들고 건강을 위해 스포츠센터에 보낼 때 어린 아들과 일일이 상의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알아서 합니다.

콜린이란 미국소년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시도해 보는 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스카이다이빙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젊지 않은 소년의 어머니가 함께 스카이다이빙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무슨 용기가 나서 그런 일을 시도 하겠습니까?

아들이 두려울까봐, 엄마이기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과정 중엔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려야 하는 벼랑 끝의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 순간도 내가 끝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영생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인도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면 하나님께는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고 그 과정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자식이 아버지를 신뢰하고 따르는 그런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구원을 받을 때도 믿음이고, 인도를 받을 때도 믿음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고 따르고 싶지만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핵심은 증거가 없어도 상대의 인격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아버지를 신뢰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가르쳐주신 대로 거룩한 백성으로의 선한 일을 행하면 됩니다.

미가 6장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보여 달라, 당장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 일은 맡기고 지금은 알고 있는 옳은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11절 말씀대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물론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다윗왕국의 회복은 이 땅의 왕국은 아닙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가장 완전한 복을 누리며 사는 예수님의 왕국입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님이 약속을 잊은 것도 변한 것도 아니십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구원자를 반드시 보낼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본문으로부터 4백년 뒤 이 일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좀 오래 걸리긴 했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굳게 믿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신약성경시대에도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이 어디 이뤄지냐고 조롱하는 무리들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때에 맞춰 일하십니다.

오늘 17절에도 말씀하시잖습니까?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의 날과 이 세상의 모든 계획도 정하신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며 바짝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우리 인생이 결코 실패하지 않고 풍성한 열매가 넘치는 복된 결실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16절을 보면 똑같은 상황 중에 구별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도 피차에 말했다고 합니다.

똑같이 힘든 현실 속에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무리들과는 다른 종류의 말을 서로가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분명히 들으시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사실이면 되고 그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한다는 믿음의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여전히 삶은 어렵고 악한 자가 형통하게 보인다할지라도 약속하신 메시야의 왕국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그 믿음의 말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낙심할 상황을 겪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대해 어떤 말을 할지는 우리의 선택과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환경이 꽉 막혀있을 때 한숨이 나오고 헤쳐 나갈 일이 막막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도 되지 않고 어둠 속에 앉아 소리 죽여 우는 인생의 밤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인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내 모든 절망과 어둠 속에서 나를 건져주실 유일하신 소망이고 내 편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손을 내밀어 잡아야지 어쩌자고 하나님을 섬기는 게 헛되다고 그 손을 뿌리치겠습니까?

현실이 당장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게 영생을 주셨고 지금도 인도하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증거입니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나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 주님께서 들으십니다.

반드시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성도들의 두 가지 말의 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구속력과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겐 모든 것이 예스, 아멘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의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이젠 광야에서 다 죽게됬다고 슬피 울며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내 귀에 들린 그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부정적인 말이나 원망하는 말을 하고 나면 그것이 우리를 억류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껴보셨습니까?

그 말이 점점 더 염려와 근심을 불러 일으키고 당장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말이 믿음을 꺾고 죄의 본성을 부추기는 역할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말을 하고 나면 내 인격이 절하되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우리의 입에 파숫군을 세워 입을 통해, 약속하신 축복이 날라 가지 않게 잘 지키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이렇게 믿음의 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성도들을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희를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너희를 아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으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그런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의 가치가 그 정도로 매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 어떤 댓가를 치르셨는지를 기억한다면 그만큼 하나님께 우리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를 삼으셨기에 어떤 악한 세력도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 영혼을 노략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등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켜 주시기에 악한 마귀의 세력이 만지지도 못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과 맞바꾼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 은혜를 감사하며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며 섬기듯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아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자녀들을 볼 때 참 부모 마음이 기쁩니다.

남의 자식이라도 그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면 참 존귀하고 반듯해 보입니다.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인격이 비천해보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참 존귀하게 보이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성도들에게서는 고귀함과 신비스런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경홀히 대하는 영혼은 그가 어떤 지위와 어떤 인격을 가졌다 해도 근본을 모르는 망나니처럼 천하게 보이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고귀함이 확실히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서울대학교 어떤 동아리에서 전도당할 것을 대비해서 전도퇴치카드를 만들었다고 하죠.

카드 내용을 보면 당신은 한권의 책을 보고 맹목적으로 믿지만 저희는 더 많은 책을 읽고 합리적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석한 두뇌로 모두가 선망하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잘생긴 남학생입니다.

당당하게 전도퇴치카드를 보여주는 사진을 보니 아름다운 청년이 왜 그렇게 교만하고 비틀려 보이던지요.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책과 사람의 책을 비교한다고 들먹이는 모습이 참 안쓰러워보였습니다.

자신이 지금 거부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죠.

얼마 전 기독교방송에서 열심히 전도특강을 하던 환한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청년의 집안은 원조 불교집안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버지는 일본의 용하다는 절로 원정 불공을 가고 어머니는 대구 범어사에서 협공으로 치성을 드리다 청년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교1등의 똑똑한 청년은 불교중학교에서 불교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매일 있는 불공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목탁을 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자신이 목탁을 칠 때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지 않는 학생들을 봐두었다가 하나씩 불러내 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시험배정에 기독교고등학교가 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엔 수업에 성경시간이 있었습니다.

염주를 양 쪽에 걸고 기독교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전 불교회장은 성경시간마다 이기죽거리며 도무지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도사님이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두 번 죽는 데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이 땅에서의 첫 번 째 죽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영혼이 나가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판결을 받는 두 번째 죽음이 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데 갑자기 청년의 마음에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나는 분명히 지옥에 가게 될 것라는 생각에 정말 사시나무 떨리듯이 몸이 떨려 간신히 교목실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평소엔 아줌마라고 불렀던 전도사님께 쓰러지듯 다가가 전도사님 제발 저 좀 구원해주세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날 구원받기 위해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서 왜 그때 전도하지 않았냐고 한 대씩 패고 다녔다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두 청년이 한 사람은 영적인 눈이 감겨 현세보다 더 사실적인 영원한 세상과 하나님을 알지 못해 전도퇴치카드를 만들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그 날 이후 전도자가 되어 영혼을 구원하려 온 삶을 아낌없이 헌신하는 모습이 얼마나 다르던지요.

창조주 앞에 겸비한 것이 인간의 지혜요 영화입니다.

아버지를 섬기는 아들을 그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아끼듯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을 따라 섬기는 우리를 하나님도 아끼신다고 말씀합니다.

삶이 고단하고 기도대로 이뤄지지 않아 낙심하고 계십니까?

조금만 더 인내하며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면 우리 마음에 현실을 이겨낼 평안과 담대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자들이 되어 입으로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을 하고 감사와 믿음의 말을 하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소유를 삼으시고 자식처럼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셔서 우리 삶의 지경을 복되고 풍성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013년9월19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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