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출해서 광야까지 끌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선민이 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사는 방법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지켜야할 각종 규례와 계명을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킬 때 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조건부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본문에 약속하신 축복을 보니 읽기만 하여도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복은 다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우리의 생업을 축복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6절부터 8절엔 우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9절에 보면 우리 가족을 번성하게 하고 창대하게 해준다는 말씀입니다.
자녀가 잘 되는 축복은 나에게 주시는 축복 중에서 최고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보면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쫒아서 살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이런 복을 우리에게 주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조건을 우리가 잘 지켜야만 이와 같은 복을 주신다는 것이죠.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약속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 조건은 3절에 나와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례와 계명을 준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규례와 계명은 레위기 전체에 나와 있는 데 아주 작게는 집에 생기는 곰팡이를 처리하는 법부터 각종 절기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법까지 아주 소상하게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다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이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구약에 약속하신 복이니 복도 없게 되겠네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도 그 것을 다 지켜야 하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것들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고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살아야 할 방식은 율법과 계명의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것을 모르고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려는 흉내만 내기에 급급했다면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를 넘어 그 동기까지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인터넷 동영상에 어이없이 잔인하고 가슴 아픈 장면이 올라왔습니다.
이슬람권 한 남자 아이가 빵을 한 조각 훔쳤다는 이유로 훔친 손을 벌하기 위해 대형 트럭의 바퀴 밑에 팔을 넣고 바퀴가 그 팔을 깔고 지나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까짓 빵 한 조각 훔친 죄를 물어 이 어린 것에게 그토록 잔인한 처벌을 하는 이슬람의 율법에는 사람을 향한 사랑은 찾아볼 수 없고 문자적으로 이슬람율법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이 주신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말씀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계의 종교 인구를 보면 65억의 인구 중에 기독교가 21억명, 이슬람교가 13억명, 힌두교가 9억명, 불교가 3억 7천 600만 명 등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이 54억이고 나머지 11억만이 무교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종교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은 추종자 1900만명으로 세계종교 인구 10위에 뽑혔습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인간이 종교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다해도 다른 무언가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 받은 영성이 타락하자 숭배할 다른 영을 찾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조각하거나 쇠를 부어 만들지 말라고 하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각 종교와 우상들의 배후에는 간교한 사단이 존재해 자기의 소원대로 인간의 숭배를 받고 있으니 거기에 절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타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1절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바로 너를 지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 지금 누구한테 절을 하고 있느냐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라고 스스로를 말씀하십니다.
질투는 뜨거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임을 다 아시죠?
스가랴 8장 2절에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야고보서 4장5절에는 더욱 송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우리가 무엇이 길래 하나님이 이런 질투와 사랑으로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지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언젠가 어린 딸을 키우는 여선생님이 아침부터 눈이 퉁퉁부어 왔길래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여전히 눈물이 핑돌며 하는 말이 출근할 때 할머니 댁에 딸을 맏기고 오는 데 할머니 댁 앞에만 가면 딸의 엉덩이가 들썩 들썩하고 현관문이 열리면 할머니 품에 와락 안기며 엄마 얼른 가라고 뒤도 안돌아 보는 게 너무나 속상하다고 말하더군요.
자식을 향한 질투의 대상이 자신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그 속박 아래로 들어가는 자녀를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석상 앞에 가서 절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무죄는 아닙니다.
우리 한국기독교계의 큰 지도자였던 한경직 목사님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다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 보다 우리의 마음을 더 뺏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저울질 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기도 시간을 방해하는 TV프로그램이나 운동이 우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여 우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골로새서3장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5절에도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절히 탐내는 것은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것이죠.
자신이 습득해 온 지식과 학문을 신봉하는 것 역시 우상숭배입니다.
좀 더 많이 벌기위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다면 재물이 우상입니다.
이 돈은 특히 인간에게 우상이 되는 것을 흔히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셧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본질을 파악하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라고 말입니다.
천하의 우상들이 다 인간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 졌다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자기 배를 위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심이라는 것이니 우상의 최고봉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교만한 마음이 자기의 의지대로 조정할 수 있는 각종 우상을 만드는 근본 된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자기를 위해 우상을 섬긴다 해도 사단은 결국 그걸 이용해 교묘하게 인간을 지배해 왔습니다.
사단에게 매여 종노릇하게 된 것이 인간의 신세입니다.
자신을 위하려던 인간의 수를 사단이 이용해 먹은 것입니다.
금란 감리교회 시무하시는 김홍도 목사님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평안남도 양덕에 근무하셨는 데 위로 딸 둘을 낳아 기르다가 죽고 세 번째로 형님이신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님을 낳아 다섯 살 쯤 되던 해였습니다.
그 동네는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고 그 소를 잡기 위하여 얼마씩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걷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어머니께 돈을 내라하니 그분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낼 수 없소."라고 거절하자 모두 그럼 큰일 난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우상 숭배요, 사신 숭배이므로 김 목사 어머님께서는 단연코 거절해 버렸습니다.
며칠 후에 그 귀여운 아들이 갑자기 앓기 시작하는데 하루 밤 사이에 열이 40도로 오르고 눈을 뒤집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산신령께 제사를 드리지 않아 산신령이 노하여 그러는 것이니 이제라도 경을 읽고 굿을 해야 산다고 말을 했습니다.
게다가 기도를 잘하던 어린 김선도 목사님이 정신없이 헛소리를 하면서 "엄마. 박옥순 데려다가 경 읽어 줘."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를 버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버리느냐 하는 막다른 길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신 고집부리다가 자식 죽이겠다고 야단이고 의사도 왔다가 급성 폐렴인데 시간이 늦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김 목사님 아버님은 손발이 차갑게 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들을 내려보며 "선도야, 너 죽을테면 죽어라.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할 수 없지. 너를 잃을지언정 나는 예수를 버릴 수 없다. "라고 말한 후 산에 올라가 찬 바위를 끓어 안고 간절히 "하나님,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을 잃을지언정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에 마을 한 노인이 무슨 풀잎을 끓는 물 속에 넣어 그 물로 찜질을 하면 열이 내린다는 얘기였습니다.
얼른 내려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찜질을 30분쯤 계속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린 아들이 재치기를 하며 얼굴에 혈색이 돌고 한 시간도 안되어 일어나 밥과 과일을 먹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김선도 어머님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미신 종교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이적도 일어나고 권능도 일어납니다.
접신한 점쟁이들 과거의 일들 잘 맞추지 않습니까?
악한 영이 지배하여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점보러 가서 나쁜 일 있다고 들으면 그 일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악한 영이 역사하는 것이죠.
무당 말대로 하면 병이 낫기도 합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것이죠.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말입니다.
갖은 방법으로 인간의 죄성에 맞게 미혹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점점 터부시 하는 것이 많아지고 점쟁이의 점괘에 지배 당해 나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결정 못하고 두려움에 갖혀 살게 됩니다.
절대로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자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두려운 경고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혹시 어떤 우상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면 담대하게 결단하고 우상을 훼파하고 주님의 축복 안으로 들어오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둘째로 2절에 보면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에 안식일 지키는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결정적인 증표라는 것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안식일을 지키는 지 아닌 지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증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월드컵 축구 중계를 하면 안 나오고 동호인 모임이 있으면 빼먹고 돈을 좀 더 벌려고 가게 문을 여느라 안 나오고 이러면 약속 된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5장15절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종이 되었던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신앙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일을 지킴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의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밖으로 드러난 믿음의 증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일을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내 안식일이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주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원래가 하나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도록 주어진 날은 6일 밖에 없었고 애초에 제7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날,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같은 개념입니다. 원래 우리에게 주신 것은 10분에 9이고 나머지 10분의 일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더 얹어 주신 것이니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요 앞에 주차장의 절 반이 사실은 시유지였다는 걸 건물주인 권사님이 지난 주에야 아셨다고 합니다.
모르고 사용했는 데 알고 보니 주인이 있어 다시 찾아간 것입니다.
저는 젊을 때부터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혼 전에 제가 보증을 선 문제로 해서 물질에 어려움을 많이 당하고 월급이 압류가 들어오기도 했었습니다.
월급을 타면 항상 모자라니 십일조를 하는 것이 참 어렵더군요.
그래서 적당한 금액만큼만 헌금을 하고 하나님이 이해해주시려니 했습니다.
어느 월급날, 그 당시에는 누런 월급봉투에 월급이 나올 때였습니다.
시내에 나가 누구를 만나고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탔는 데 버스 위로 올라탈 때 가방이 어깨에서 툭 떨어지러라구요.
다시 매고 버스 안에 자리를 잡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가방을 보니 지퍼가 열려 있고 월급이 봉투 채로 사라졌더군요.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달 부터는 아무리 부족해도 십일조를 최우선으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얼마나 떳떳하고 기쁜지 돈이 부족해서 오는 어려움을 능히 이기게 되고 십일조 했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시라고 큰소리 탕탕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물질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그 후 몇 년이 더 걸렸지만 하나님은 여러 방법을 통해서 서서히 물질의 짐을 다 벗게 해주시고 오늘날 까지 제 생활에 필요한 돈이 부족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맞습니다.
주일이 원래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사야 58장 13절에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라고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여 경건하게 지냄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2절에 내 성소를 경외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계신 성전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에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지은 곳이 바로 성소입니다.
하나님이 성소를 경외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거하시기 위해 유일하게 지정하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을 경시여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함이 부족한 것입니다.
영등포 쪽방촌에 사는 두 연인의 결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집이라고 할 수 없는 한 칸 공간에 서로 얼굴을 비비며 그곳이 보금자리라고 기뻐하며 사는 것은 사랑 때문 아니겠습니까?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향하던 걸음이 사랑이 식어지면 집에 대한 애착도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없는 부부는 그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밤이 늦도록 밖을 헤매고 다닙니다. 호사스런 가재도구들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전 된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성소를 경외하라고 하시는 것은 성전이 곧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에베소1장 23절에도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며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의 몸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겠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0장 2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고 봉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께 오늘 약속하신 모든 축복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축복을 약속하십니까?
먼저는 우리에게 육적인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그 당시 농경시대에 꼭 필요한 비를 주시고 소출을 풍성하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너희의 타작이 포도 딸 때 까지 미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타작하는 시기는 3,4월이고 포도 수확기는 7,8월입니다.
타작 기간을 3개월이나 주신다니 엄청난 대풍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크십니다.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에 조금씩 조금씩 응답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조금씩 채워주시는 것은 우리를 훈련하고 연단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때가 되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할 만큼 성숙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육적 축복에는 법칙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영혼이 잘 됨이 육신의 잘 됨에 우선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축복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축복을 우선 추구하셔야 합니다.
영적인 축복 뒤에 오는 육적인 축복이야 말로 우리를 타락시키지 않고 진정한 축복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순서를 그렇게 두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축복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거하는 곳에 평화를 주셔서 우리를 두렵게 할 자가 없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무 두려움 없이 잠자리에 드는 행복한 삶을 약속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잠 자리에 들 때 아무 염려와 두려움이 없으십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하루의 시작이 기쁘고 기대되십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주님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에겐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만 이 두려움 없는 평안이 약속되었습니다.
이사야 57장 2절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
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그리고 영적인 또 다른 축복은 7절에 보니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쫒고 승리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는 언제나 우리 앞에 함정을 파고 우리를 환난과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걸림돌을 넘어지기 딱 좋은 자리에 귀신같이 던져 놓아 실족하여 넘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어길 때 죄의 세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따라 살아 갈 때만이 대적을 쫒아내고 이겨서 영적인 대승을 거두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축복으로 11절과 12절에 놀라운 축복을 약속을 주십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을 우리 가운데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12절에 보면 우리 중에서 행하여 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리 저리 거닐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에덴동산에서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거닐으셨던 것 기억나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함께 거하시며 거닐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행한다는 구절 속에서 저는 예수님이 성전이 거니시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죄로 가까이 오실 수 없던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야 비로서 우리 가운데를 걸어 다니십니다.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성전을 걸어다니셨을 까 생각하니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거하고 싶던 사랑하는 백성들 속을 이제야 걷게 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신 후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임마누엘의 축복이 성도님들 가정과 심령 가운데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레미야29장1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에게 평안과 소망을 주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지금도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키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 계명들을 지킬 수 있게 거듭났습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계명들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으면 즉시 완성 됩니다.
그 이상의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육적 축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새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아무 사랑의 헌신과 봉사가 없다면 우리에게 단지 구원이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고린도전서3장15절에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불 가운데서 받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가까스로 생명만 건진 믿음인 것이죠.
오늘 말씀대로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데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까?
마음에 있는 우상을 성령의 능력으로 부수는 결단이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이라고 못 박으셨습니다.
주일은 주님을 예배하고 선한 일을 힘쓰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하십시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몸 된 교회를 정성껏 섬기고 주님께 충성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힘써서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물질의 축복과 함께 영적인 큰 축복을 풍성하게 쏟아 부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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