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레위기19장1절-10절(너희는 거룩하라)

남수연 2015. 4. 22. 16:57

 

오늘은 신자들의 거룩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거룩이란 말을 들으면 일단 사람들은 약간의 거북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마 거룩이란 말 자체가 이미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거룩에 대해 잘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의 거룩에 대한 현실을 그리스도인의 구멍난 거룩이란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거룩이 무너져내렸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신자들에게 세상과 등을 진 것 같은 거룩은 버거운 명령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반드시 추구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구원하시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거듭나게 하신 이상 반드시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214절은 심지어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하지 않은 것은 구원과 관련이 없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거룩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절대 놓치거나,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또 성도의 권세는 결단코 거룩한 삶에서 옵니다.

죄와 뒤섞인 삶은 스스로가 자신감이 없어지고 세상 속에서 절대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구원받은 신자들에겐 이미 크던 작던 거룩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오늘 거룩이란 주제로 말씀을 나눌 때 거룩에 대한 열망을 다시 되살려 성도의 축복과 권세를 되찾게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한 뒤 시내 광야에 머물러 있습니다.출애굽기19장에서 시내산에 도착했고, 이 레위기를 거쳐 민수기 1011절에 가서 그 시내산을 떠납니다.

그 사이 이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은 시내광야에 머물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은 법을 제정하시고 가르치게 하십니다.

나라가 세워졌으면 헌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의 예법과 사람과의 관계인 사회법을 이 레위기에서 제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냐는 문제에서 가장 큰 테마는 거룩입니다.

레위기에는 거룩이라는 말이 90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오늘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우선 거룩하라는 명령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나 붙들고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게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된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룩을 명령받은 것은 사실 이루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부르심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레위기2026절에서 이 사실을 좀 보충해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여기에서도 보면 너희를 소유로 삼으려고 만민 중에서 구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니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염되고 더러운 것을 어떻게 하나님이 소유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원초적인 죄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인간이 죄로부터 거룩해지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속죄의 피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도 이미 시내산에서 짐승제물의 피를 갖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출애굽기24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어떻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그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모세가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뒤 그 피를 반으로 나누어 양푼에 담습니다.

그 반은 하나님 앞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언약서를 백성에게 낭독한 뒤 백성들에게 그 피를 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퍼포먼스 같은 의식이 장래에 있을 어떤 사건을 상징하는지 아시겠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시내산에서 제물의 피가 이스라엘을 정결한 이 사건이 상징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신약시대의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을 히브리서 913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믿어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룩하심처럼 우리도 거룩해져 가는 성화의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가 이해하고 감각할 차원이 전혀 아닙니다.

그 성스럽고 위대하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성경을 통해 가늠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본질적인 거룩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겉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룩하라면 자꾸 겉을 종교성으로 꾸미려는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은 오늘 명령 뒤에 이어지는 부분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우상숭배하지 말고, 화목제물은 이렇게 드리고, 추수할 때는 이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의 거룩으로 부터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죠.

우리의 거룩은 이 계명대로 사는 도덕적인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지킬 때 우리는 주님의 거룩을 닮아 거룩해 집니다.

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세상사람과 다를 바 없이 부도덕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이 왜 성도들에게 우러나오질 않습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여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다 명령하신대로 지키지를 않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거룩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룩을 얼마나 진지하게 취급하시는 지가 오늘 본문에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부모를 경외하는 문제와 안식일 지키는 문제가 뒤바뀌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십계명에서는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계명인 안식일 준수가 앞에 나옵니다.

모세가 오늘 본문에서 그냥 두서없이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열거했겠습니까?

부모 공경을 안식일 준수보다 앞에 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거룩을 요구하시는지를 눈에 확 띄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절대로 안식일을 잘 지키는 하나님 공경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가정들에서 교회 열심히 나가는 형제들이 부모님께 소홀함으로 우애가 금가고 전도가 막히고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도 형식이고 쇼라는 것입니다.

뒤에서 전체적인 율법들 속에 십계명이 섞여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세세한 계명이나 하나님의 친수로 직접 쓰신 십계명이나 경중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선이고 임금은 체불하고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제사를 드리다가 형제와 불화한 게 생각나면 가서 화해하고 와서 드리라.

기독변증가인 제임스 패커는 말합니다.

거룩함은 영성과 도덕성이란 두개의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두 기둥 중 어느 하나가 가라앉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봉사를 많이 하는 성도들 중에 도덕성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이 거의 교회 장로입니다.

방산비리의 중심에 있던 0 전 참모총장, 교회에 밀실을 만들어 놓고 돈세탁을 했던 무기중개상 0광그룹회장, 그리고 이번에 자원외교비리의 수사대상이었던 0남기업 회장이 다 교회장로이고 기독실업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임스 패커의 말대로 도덕성이란 기둥이 빈약하니 전체가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영성과 실천적인 도덕성이 함께 견고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천정은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견고한 두 기둥에 세워진 신앙만이 성숙하고 성장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다운 삶으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무리 종교적으로 꾸민다 해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눈이 더 무섭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질타를 받는 것도 이유 있는 모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순종하고 지키는 것은 우리를 절대로 괴롭고 불리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레위기17장에서 시작된 방대한 율법조항들은 27장에서 이렇게 끝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이 계명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들이 우리 자신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실질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까?

물론 구약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게 복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거듭 약속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대개 환경이 순조롭게 풀립니다.

문제가 좀 생겨도 쉽게 해결되고, 곤고한 지경에 오래 빠지는 일이 잘 없습니다.

물론 그냥 교회만 다니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경우입니다.

말씀에 삼가며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들을 보면 누가 봐도 대체로 저 사람은 참 형통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킬 때 우리에게 더 귀중한 복은 땅의 축복만이 아닙니다.

이 계명을 지킬 때 점점 더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는 믿게 되는 것이고, 그런 믿음이 현실에서 이기고 내세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냐하면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계명을 지킬 때에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요한일서52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즘 얼마나 만물이 아름답습니까?

지난 주 차 안에서 무심코 도로 변에 서있는 느티나무를 보았습니다.

나무에 돋은 새순이 얼마나 예쁘던지, 거기에 산들바람을 보내셔서 가지가 상쾌하게 흔들거리는 데 제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아름다우시리라 그냥 직관적으로 알아지는 거예요.

사람이 만든 창작물도 그것을 보면 만든 사람의 인격과 정신이 다 드러나지 않습니까?

미술작품을 보면 작가의 예술혼이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음식도 차려놓은 것을 보면 만든 사람의 솜씨와 인격까지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아름다움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계명과 율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가 보이잖아요.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만큼 자식에게 약자가 있습니까?

며칠 전 TV에서 억척 엄마라는 다큐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부산 자갈치시장에는 그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 새벽4시에 일어나 대야에 생선 몇 마리를 놓고 치열하게 자식들을 벌어 먹인 우리 엄마들이 있었습니다.

국제시장에는 치맛자락 속에다 걷지도 못할 만큼 무겁게 미군부대 군용품을 차고 장사를 하던 엄마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물건들이 깡통이 많았잖습니까?

단속이 나오면 그 무거운 물건들을 치마폭에 싸 앉고 무슨 힘으로 그렇게들 도망갔다 또 돌아와 보따리를 펼쳤는지 모르겠다고 하던군요.

그게 바로 자식을 먹여살리려는 엄마의 힘이라는 것이죠.

거기 어떤 자식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그 때, 우리를 버리지 않고 다 끌이고 있어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맙다구.

하나님 눈엔 이렇게 살다 늙고 병든 부모들, 그리고 자식 앞에 영원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부모들이 안쓰러우신 것입니다.

그러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죠.

하나님께는 늙은 부모들도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말씀하시는 화목제물의 규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제는 자발적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제물을 잡아서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먹는 제의입니다.

그걸 싸가지고 가서 혼자 두고두고 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틀 내에 소나 양 한 마리를 먹어치우려면 많은 사람을 불러 함께 드려야 하는 게 화목제입니다.

요즘처럼 잘 살아도 소고기는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인색하지 말고, 형제들과 나눠 먹으라고 셋째날 까지 고기를 남기면 아예 죄로 취급해서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계명으로 못박아 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예배의식에 대한 거룩과 경각심을 위한 계명이기도 하지만 형제와 이웃을 생각하고 같이 좀 먹고 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수할 때 싹 거두지 말고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뒤적이면 뭐라도 좀 건져가게 좀 흘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계명을 읽기만 해도 우리가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의 따뜻하고 깊은 인자와 자비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거룩입니다.

이런 계명들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18절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시잖아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대로 지킬 때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계명을 지킬 때 유익은, 지켜봐야 비로서 나의 악함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신 말씀들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이 달에 돈이 좀 여유가 생겼는데,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좀 나눠주라는 말씀이죠?

그게 잘 됩니까?

혹시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와주려던 액수가 점점 작아지다 나중엔 흐지부지 되는 때 없으셨습니까?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다보면 아, 내가 이만큼 탐욕스런 인간이었구나, 음란한 죄인이구나, 교만하고 악한 자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망할자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내게 절실하구나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매일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단언하건데 그것은 정말 망할 자입니다.

의로워진 상태가 절대로 아닙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다 된 줄 알고 속는다니까요.

 

몇 년 전에 재미있는 책이 한권 나왔습니다.

책 제목이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입니다.

미국의 남성잡지 편집자 제이콥스라는 사람이 성경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실제 381일을 살아보고 기록한 종교체험기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인 뉴요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신을 모르고 사는 자기의 영향으로 사랑하는 아들이 진정 소중한 것을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한번 그대로 살아보고 아들에게 종교에 대한 어떤 결론을 전수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종교체험기를 위해 저명한 신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두고 성경을 샅샅이 뒤져서 계명을 요약했더니 7백여가지가 나왔습니다.

말씀을 절대 취사선택하지 않고 그대로 지키자는 원칙을 갖고 그의 종교체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요절복통할 일들이 책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실제 381일을 살았다고 하니 정말 기인이죠.

이 사람이 이 프로젝트를 다 마치고 어떤 결론을 얻었을 것 같습니까?

그는 솔직히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신성함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상식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깨달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열세달 전 과거의 그 방식대로는 살지 않겠다고 합니다.

성경말씀대로 살아보니 삶이 너무 안정되고 행복하고 감사해졌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구태의연하고 따분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다른 든든한 삶의 지평에 자신을 세워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신론자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다보니 하나님의 신성을 거기서 깨닫게 되고 자기의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겠습니까?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알게 되고 우리도 그 거룩과 사랑을 덧입게 되는 줄 믿습니다.

또 말씀을 행할 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저력도 생깁니다.

오늘 말씀대로 지켜보기를 결심하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의무이자 가장 큰 축복입니다.

생활의 염려와 고생에 지쳐 세속의 물결에 나를 맡기지 말고 거룩한 삶을 위해 철저히 말씀을 지키며 믿음의 여정을 잘 계획하고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되는대로 살았는데 거룩과 성숙이 되어지는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말씀대로 삼가 지키고 삶에 신중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도, 이웃을 향한 사랑도 완전히 이룰 수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레위기 185절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2015년4월19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