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자녀들의 관계는 예배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도 하고 봉사도 하고 희생도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잖아요?
우리는 내 죄를 속죄해 주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구약성도들은 예수님의 속죄를 상징하는 제사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이 다섯가지라고 했죠.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지난 주는 번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소제에 대해서 함께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은 두 가지 면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속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제사드리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입니다.
레위기를 읽으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저절로 경외심이 듭니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하게 기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게 사람에게는 가장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이 없고 사람이 스스로 존재한다면 자기를 위해 살 때 행복하겠죠.
그런데 사람은 창조주의 피조물이기에 자기를 행복하기 위해 살수록 허망합니다.
오늘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 것인지 소제를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소제는 어떤 제사인가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우리 말 소제로 번역된 이 제사는 히브리어로 ‘민하’입니다.
지난 주 살폈던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입니다.
번제물을 태울 때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걸 생각하면 기억하기가 좋을 것입니다.
‘민하’는 곡물을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민하’는 선물, 조공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소제라고 번역한 이유는 한자 ‘소’가 희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민하가 곡식의 흰가루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자 ‘소’에는 평소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제’는 평소에 드리는 제사라는 뜻도 됩니다.
둘을 합치면 완벽하게 소제의 의미가 드러나죠.
흰 곡식가루로 드리는 일상의 제사, 번역 잘 한 것 같습니다.
다른 네 가지 제사는 동물로 드리지만 소제는 유일하게 곡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다른 제사들은 죄와 관계가 있지만 소제는 죄와 관계없이 자원해서 드리는 감사 제사입니다.
긴 본문을 읽었는데, 10절까지는 소제 드리는 방법이고 그 뒤는 부연 설명이라고 보면 됩니다.
2. 소제를 드리는 방법입니다.
소제가 재미있는 것은 가루로 드리는 방법이 있고 요리해서 드리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을 그대로 받으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려고 그만큼 자신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1) 곡식의 가루로 드리는 소제가 있습니다.
1절,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가루로 드리는 소제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죠.
고운 가루, 올리브 기름, 유향입니다.
주된 예물은 고운 가루입니다.
고운 가루라는 단어는 손가락으로 비볐을 때 거친 것이 없는 부드러운 가루를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밀가루나 쌀가루는 고운 가루죠.
그러나 고대에는 고운 가루는 아주 귀한 식자재였습니다.
중세시대가 돼서야 풍차를 이용해서 곡식을 빻는 기술이 생겼다고 합니다.
자동 제분기가 나와서 밀가루가 대량 생산된 것은 삼백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 시대엔 곡식을 절구에 빻든지, 아니면 맷돌을 돌려서 갈았습니다.
절구나 맷돌로는 아주 고운 가루가 나올 수 없죠.
고운 가루를 얻으려면 껍질을 벗겨낸 곡식을 계속 간 다음, 키질하는 것처럼 바람에 날려서 모았다고 합니다.
고운 가루를 얻는 공정이 꽤 길고 복잡한 것이죠.
그러다 보니 입자가 고운 가루는 극상품에 속합니다.
역대상을 보면 솔로몬왕이 먹던 식료품 중에 고운 가루가 들어갑니다.
왕실에 납품했을 만큼 귀한 재료였다는 것이죠.
누가 고운 밀가루처럼 깨끗하고, 누가 자신을 온전히 갈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소제의 예물도 당연히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곡식이 갈려서 가루가 되듯이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어디에 주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십니까?
하나님께는 그렇게 제물이 되셨고, 우리에게는 영생하는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음식이 만나입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 보면 만나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만나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고 하셨잖아요?
주님은 찧고 빻아져서 음식이 된 만나처럼 자신을 십자가에서 짓이겨 우리 생명의 떡이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제는 예배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당시에도 곡식은 누구나 드릴 수 있는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물로 드릴 때는 노동과 수고가 필요한 것이죠.
오늘 아무 수고 없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수는 없었잖아요?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5인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매일 3시간 정도 맷돌질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소제로 가져간 고운 가루는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내일 하나님께 소제를 드려야지.
그렇게 온종일 맷돌을 갈면서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이니 기쁨으로 예물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봉사에도 그런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이 있으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소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매일 곱게 갈아지는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잖아요?
우리 스스로 맷돌에 들어갈 리가 없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시련이라는 맷돌에서 우리의 성품을 고운 밀가루처럼 갈리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껍질이 거칠게 남은 성품은 다른 사람 목에도 걸리기 쉽습니다.
소제에서 배울 것은 자원하는 기쁨과 수고, 그리고 고운 밀가루와 같은 심령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2) 가루로 드리는 소제에는 반드시 첨가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름과 유향입니다.
기름은 가정에서 사용하던 올리브유입니다.
하나님이 이 소제에 반드시 기름을 섞으라고 하셨다면 이유가 있겠죠.
성경에서 기름은 일관성 있게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서9장14절은 이렇게 알려주시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의 대속이 성령을 통하여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성령님과 함께 행해지셨던 것 아시잖아요?
그렇기에 주님을 상징하는 소제물에 기름을 함께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와 봉사를 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성정만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를 꾸준히 할 수 없습니다.
예배와 봉사에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길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우리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유향은 유향나무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굳힌 향료입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드렸던 예물이죠.
유향은 하나님께 올리는 향을 제조할 때 들어가는 귀한 향료입니다.
유향은 손끝으로 만지기만 해도 이삼일 간 향기가 남는다고 합니다.
유향은 예수님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상징하는 것이죠.
사람이 겉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만도 품성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아주 가까이 하면 어쩔 수 없이 죄인의 본성이 드러나죠.
죄인이라 그런 것이기 때문에 너무 실망했다, 이상한 사람이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예수님을 가까이서 봤던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하죠.
1장41절,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루 만에 어떻게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단정지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 어떨까요?
주님의 깊은 눈이 내 마음을 뚫어보시는 게 느껴지겠죠.
그러나 그 눈빛에 내 굴곡진 인생 전체를 이해하시는 긍휼하심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남들은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아십니다.
요한사도는 이렇게 증언하죠.
1장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소제에 드려진 유향은 주님의 아름다우신 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까이 하냐에 따라 내게서 느껴지는 향기는 다를 것입니다.
유향을 준비했던 예배자의 손에서 유향의 향기가 났겠죠.
우리가 예수님을 가까이 할수록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말씀을 순종하며 주님을 가까이 따를 때 주님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수로 예수님의 향기를 내겠습니까?
우리가 서로에게서 그런 향기를 맡을 수 있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3. 다음은 요리해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입니다.
4절에서 10절까지 말씀인데 정리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화덕에 구워서 드리는 소제입니다.
화덕피자 같은 것 생각하면 되겠죠.
가마솥 같은 화덕을 불에 달구고 반죽한 고운 가루를 화덕 안쪽 벽에 붙여서 구워낸 음식을 말합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갔더니 달군 항아리 속에 만두와 찐빵을 철썩 붙여서 굽는 걸 보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무교병과 무교전병을 소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무교병은 과자 같은 음식이고 무교전병은 둥근 모양의 빵입니다.
2) 5절에 철판에 부친 것을 소제로 드릴 수 있습니다.
부침개처럼 기름을 섞어서 부쳐서 만든 음식입니다.
3) 7절,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죽해서 냄비에 넣고 찐 두툼한 빵 같은 음식일 것 같습니다.
이걸 보면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음식을 조리해서 먹었는지를 알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나 소박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먹는 그 음식을 그대로 가져오라고 하시잖아요?
이걸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너희 먹는 것 좀 같이 먹자.’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가까이 와서 네가 가진 것 그대로 우리 교제하자,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격식을 갖추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제가 될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작은 문제나 소소한 감사 제목을 갖고라도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4. 소제에는 넣지 말아야 할 것과 넣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모든 소제에는 누룩과 꿀을 넣으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로 쓰여집니다.
천국이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과 같다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의 좋은 변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죄도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죠.
소제에 누룩을 넣지 말라는 것은 순수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행은 다분히 위선적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도 순수하기만 하겠습니까?
내가 항상 우선이고 내 영광이 우선인 게 우리의 예배와 봉사에 섞여 있는 누룩입니다.
제가 어느날 설교가 잘 안된 것 같아서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설교를 잘 하려고 하니?’
하나님은 설교가 아니라 찬양 가사 한 줄로도 얼마든지 성도들에게 믿음과 은혜를 주십니다.
기도 한마디에 하나님 마음을 깨닫고 눈물 나기도 합니다.
시골교회 목사의 세련되지 못한 설교로도 옛날 성도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충심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까?
설교 잘하는 설교자들이 그 영광을 자기가 취하지 않던가요?
아무리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하려 해도 우리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사람관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나님 섬기는 것도 자꾸 나를 위해 하려는 그런 불순함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은 고운 가루처럼 순수하시잖아요?
우리를 보실 때 마음이 복잡하지 않으셔요.
우리도 하나님을 의심하고, 계산하고, 이용하고, 그런 마음 없이 순수한 마음 드리시길 축복드립니다.
누룩이 불순한 동기를 말한다면 꿀은 구미에 맞는 것만 찾는 마음일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죠.
우리가 구미에 맞는 대로 하나님을 섬겼다면 그나마 이렇게 오래 충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린 믿음은 입에 단 것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내가 좋은 것보다는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모든 소제에 넣어야 할 것은 소금입니다.
13절,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소금으로 간을 맞추라는 건 아니실 것입니다.
소금은 변치 않겠다는 약속의 뜻이 있습니다.
고대엔 조약을 맺을 때, 소금을 가져와 나누어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소제물에 소금을 넣으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피차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다 해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끝까지 받아주신다는 것이죠.
소금 언약이 예수님과 관계된다는 것을 역대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왕이 남유다왕을 치러 왔을 때 남유다왕이 한 말입니다.
대하13장5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릴 왕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언약하신 거 모르냐?
그런 말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쿠데타고, 남유다가 다윗왕조였잖아요?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 감사를 표현하든지 소금언약이신 예수님 안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4.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져온 소제물은 기념으로 일부만 취해서 불살라 화제로 드립니다.
남은 음식은 제사장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3절에 보면 고운가루 소제물의 경우 가루 한 웅큼과 유향과 기름만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아른과 그의 자손 제사장에게 돌리라고 하십니다.
9절에서 조리한 소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대표로 조금만 드리지만 나머지도 ‘지극히 거룩하다’고 하십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제사장에게 주라고 하신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조공을 제사장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받을 자격이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 당시 제사장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지극히 거룩한 제물을 자녀들에게 나눠주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식탁에서 우리를 먹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제사장은 농지를 주지 않으시고 제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번제처럼 완전히 다 불사르는 제사도 있지만 다른 제사에서는 제물 중 일부를 제사장의 것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고기만 먹고 살 수 없잖아요?
백성들이 일상으로 먹는 음식들을 제사장들이 먹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먹을 것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전에 어떤 성도가 유튜브에 짧은 영상을 하나 올렸습니다.
치킨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당시엔 사 먹을 형편도 못 되었다고 합니다.
그날 교회 모임을 갔는데, 누군가 치킨을 잔뜩 사 와서 속으로 울면서 먹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댓글들이 그런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늦은 나이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데 향수병이 걸렸는지 추어탕이 그렇게 간절이 먹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어떤 집사님이 찾아와 추어탕이 담긴 큰 통을 주고 가더랍니다.
우리 삶의 어려움이 여전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런 작은 사인만으로도 우리는 넉넉히 시련을 이겨냅니다.
저희 어머니가 췌장암 말기일 때 제가 모시고 미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남편과 만나서 뉴욕도 가고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고 그랬습니다.
미국 마트에 들렸는데, 어머니가 자꾸 고기를 사는 거예요.
미국 고기가 그때 엄청 쌌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사냐고 하니까 장조림을 해서 가져가자는 것입니다.
할 수없이 고기를 잔뜩 사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주방이 딸린 숙소였는데, 간장 냄새가 밖으로 나갈까 봐 조바심하면서 장조림을 한 솥 끓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왜 그러셨겠어요?
제가 장조림을 좋아한다고, 그 힘든 몸을 이끌고 간 여행길에서도 제 반찬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뭐 좋아하는지 죽을 때까지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뭘 좋아하는지, 뭐가 있어야 할지 모르시겠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하셨으니 평생에 우리를 만족히 먹이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소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는 제사입니다.
숨쉬는 것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고단하지만 일할 만한 건강 주셨잖아요?
퇴근하고 맛있는 간식 봉지 하나 들고 걸어갈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은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편50편은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으로 감사하지만, 고운 가루를 준비했던 구약성도들 같은 수고도 있어야 하겠죠.
매 주일 드리는 주일예배와 봉사, 말씀묵상, 기도, 섬기는 삶이 고운 가루를 만들어 드리는 수고입니다.
또 시련 속에서 인내하며 곱게 갈아진 심령을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제입니다.
거기에 예수그리스도로 소금을 치고 성령님 안에서 아름다운 소제로 드려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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