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N7gRtFWre14&t=2169s
현대 교회에는 종말과 재림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약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내용은 오히려 이단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생활수준이나 소득 정도가 높아지면 종교적 신념은 약화된다고 합니다.
혹은 지금의 삶에 너무 만족해서, 혹은 지금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마지막 날에 무심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뼈대 중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영광스런 날을 다시 소망하고 더욱 사모하는 믿음을 더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계합니다.
베드로후서 전체를 읽어보면 베드로사도가 이 편지를 쓰게 된 사연을 알 수 있습니다.
때는 주후 65년경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삼십년이 훌쩍 넘은 때이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재림하실 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가도 재림의 징후가 없고 박해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모진 박해를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은 고난 중에 주님이 오셔서 극적인 영광을 받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전해준 사도들마저 하나 둘 순교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교회 안에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믿음을 휘젓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재림과 심판에 대해 조롱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이 구약성경 어디에 있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말이 어디에 있냐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세상이 그대로니 제자들이 전해 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재림과 종말에 대한 약속이 구약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성도들의 구원과 악인에 대한 메시야의 종말적인 심판은 예언서에 수없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지구의 종말도 없고 하나님의 심판도 없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원의 개념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먹고 마시며 정욕대로 행동하는 무리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경각심이 없으면 부도덕과 방종과 타락이 따릅니다.
이 문제로 베드로사도가 두 번 째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요즘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같은 말을 하려면 교회 안에서도 눈치를 보는 이상한 풍토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련 된 교회일수록 더 한 것 같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심판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굳이 이 세상을 심판하고 멸하시려는 것입니까?
지금처럼 다들 자기 몫의 삶을 계속 살며 이 지구가 영원까지 가게 하면 안되냐는 것이죠.
이것이 베드로서의 불순종의 사람들이나 지금 세상 사람들이나 똑같이 갖는 생각입니다.
그냥 놔두시기만 하면 사람들끼리 행복하고, 잘 해나갈 텐데 왜 실력행사를 하시냐는 것이죠.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상태로는 그런 소박하고 행복한 지구는 존재할 수없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입니까?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 서로가 사랑하고 하나님과 사랑하던 에덴동산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 창세기3장 바로 다음 4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가인은 아벨만 죽인 게 아닙니다.
아들 아벨을 사랑했던 부모도 죽인 것입니다.
지난 6.10 항쟁 기념일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 죽었던 학생들 부모의 삶을 특집으로 꾸민 프로를 잠깐 보았습니다.
그 잘나고 귀한 아들을 그렇게 억울하게 보낸 부모들은 그 이후로는 사는 게 산 것이 아니었더군요.
가인의 악은 사람에게만이 아니었습니다.
죄의 본성을 다스리라고 진심으로 염려하신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이 아우를 죽이는 악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이 죄를 짓잖아요?
그 다음에 이어서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이번엔 라멕이라는 자가 사람을 죽여 놓고 공을 세운 듯이 떠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살의는 겉잡을 수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라멕은 최초로 아내를 둘 가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라멕은 두 아내의 마음에 지옥을 심은 것입니다.
성경이 왜 이들을 기록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 속에 뭐가 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뜻함을 가장한 인간의 박애주의에 속으면 안됩니다.
어제도 뉴스에 나왔던 끔찍한 사건들, 남편의 아들을 여행가방에 구겨 넣어 죽이고, 아내의 딸을 후라이팬에 지지는 그 무서운 사람의 본성, 그것이 몇 몇 범죄자나 정신이상자들에게만 있다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꺼운 구약성경이 사람의 속을 파헤쳐 보여주는 것이잖아요?사람들끼리 잘 해낼 수 있다는 말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내 힘으로 착하게 잘 살 것 같은 생각도 빨리 버려야 합니다.
악이 창궐하면 사람의 선한 의지는 힘없이 사라집니다.
국가적인 범죄에 동조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양 있고 착하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에 폐허 속 맨바닥의 삶, 생존을 위해서라면 남의 살이라도 뜯어가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진실입니다.
세상이,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웃으며 이웃에 정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 세상을 종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자녀들을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을 비웃으며 평생 죄를 짓고 산 사람들을 영원한 형벌로 철저히 관리하십니다.
다시는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심판당하는 이들을 동정할 처지가 아닙니다.
긍휼이 많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이 심판을 면하도록 십자가에서 죄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만민 중에 영광을 받으실 주님의 날을 고대해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이 세상의 종말인 그 날은 언제 올까요?
이 편지가 쓰여진 당시에도 예수님의 재림이 늦다고 했는데 그 후로도 이천년이 더 지났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예수님의 재림이 왜 늦어지는지를 해명합니다.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는 의미도 있지만 재림까지의 기간이 하나님께도 특별하시다는 데 포인트가 있습니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간절히 바라는 일을 기다릴 때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냐고 하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고통당하는 성도들, 박해받는 성도들을 볼 때 당장 구원하고 싶지만 그렇게 못하시기에 하루가 천년같이 길게 느껴지신다는 것입니다.
또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한편으로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려야 하시기에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평생 자식을 기다리잖아요?
나간 자식을 위해 그 구원의 문을 닫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심판의 시계를 맞춰 놓고 무정하게 지켜보시는 게 아닙니다.
9절에서 말씀하죠.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재림까지의 기간이 이천년이 지나게 된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늦추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고뇌가 느껴지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뭘 안다고 하나님을 심판하겠습니까?
미국세계선교센터의 자료를 보면 세계 인구 중 단지 1%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1430년이 걸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후 서기 1430년이 되어서야 전 세계인구의 1%가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천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시기 까지 몇 십년을 기다려 주시던가요?
우리교회에는 거의 칠십년을 기다려 주셔서 나오신 분도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주변에서 아직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까지도 그렇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영원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 날은 반드시 오는 데 도둑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종말의 시각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지만 이날이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의 날은 한밤중에 들이닥친 도둑처럼 예고 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미 그날이 올 것을 알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도둑이 오는 시간은 모르지만 도둑이 올 것을 안다면 집주인이 잠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들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잠자지 말고 깨어서 주의 날을 준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날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10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 해석이 필요 없이 이 세상이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이 천둥 같은 소리를 울리며 사라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이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간다고 했습니다.
천체에 대격변, 엄청난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죠.
또 땅의 물질들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 중에 하나가 원소들이 서로 끌어당겨 뭉쳐지는 힘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소를 융합해서 물질세계를 만드셨듯이 다시 모든 물질이 원소로 풀어지는 것이겠죠.
그렇게 인간이 잠시 머물던 지구와 자연계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날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가르쳐 주셨고, 다니엘서와 이사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이날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가장 단순한 영적 이치라 해도 완전하게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모든 게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이고 그날이 되어봐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천국도 그렇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지 상상이 안됩니다.
적어도 이 땅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은 육체를 가진 피조물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부활의 생명체에는 지금 세상 것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하나님이 이 지구를 다시 손보셔서 지상천국을 누린다고 하지만 오늘 말씀만 보아도 그게 틀린 걸 알 수 있잖아요?
우리가 살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천국에 갔더니 화려한 맨션에서 살더라 이런 것은 다 틀립니다.
바울사도가 다녀와서 함구하였다면 천국이 우리가 이해할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하신 만큼만 주님의 날에 대해 이해하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2) 그 날엔 이렇게 만물이 사라지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은밀하게 행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듯이 다 드러납니다.
10절,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
마지막날의 환상을 본 사람 중에 다니엘이 있죠.
다니엘은 이렇게 자기가 본 환상을 기록합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니엘 7장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심판의 책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일생을 다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심판이 어디 있냐고 도발하는 사람들의 눈엔 이런 말씀들이 가려져 있는 것이죠.
계 20장12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달리 해석할 여지없이 마지막 날엔 모두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합니다.
어떤 내용을 심판 받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일생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결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산이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이렇게 예수님의 강림하심과 종말이 있으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고 합니다.
11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라고 하시죠.
주의 날이 우리 세대에 임할지, 아니면 몇 십 년 몇 백 년 뒤에 임할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제 나이만 되도 그 시간이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것을 항상 기억한다면 끝까지 방향을 잃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님이 일각이 여삼추 같이 우리 보기를 고대하듯이 우리도 하나님 보기를 기대하고 소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근심도 없고 기쁨과 행복 가운데 영원히 살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주의 날을 고대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만일 그런 삶을 목적으로 배우자를 선택한다면 그건 결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요한복음에서 밝히셨죠.
14장3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나라에서 함께 있게 하고 싶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하고 싶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지금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겠고, 하나님은 구름 위에 앉은 옥황상제 같은 느낌이라면 하나님 만나는 게 두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1)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성령님 안에서 키워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만나고, 생활과 기도 중에 하나님을 체험해 가야 합니다.
지난 주 조혈모세포를 채집하기 위해 입원했던 은혜자매가 과정을 잘 마치고 퇴원을 했습니다.
내일 다시 무균실에 입원합니다.
지난 주엔 쇄골 아래를 뚫어 심장으로 들어가는 정맥혈관에 히크만 관을 삽입했습니다.
그리로 다섯시간 동안 피를 뽑고 조혈모세포를 채취하고 다시 팔뚝에 꽂힌 주사바늘로 피를 집어넣는 과정을 했습니다.
이 과정을 몇 번 해야 조혈모세포가 다 채집되는 데, 은혜자매는 한 번에 다 끝냈습니다.
열 명 중 한명이나 이게 가능하다고 합니다.
몸은 허약해 보이는 데 어떻게 조혈모세포가 그렇게 많은지 간호사가 신기하다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이 은혜자매를 긍휼히 여기시고 기도를 들으신다는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점점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나를 다 아시는 예수님의 심오한 인격을 알아가고 그 따스한 눈을 마주치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신비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점점 알아가고 어느새 마음으로 사랑하며 다른 아무 것도 주님과 바꿀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기에 주의 날이 더욱 기다려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또 주님을 만나기 위해 거룩과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과 성결이 없이는 주님과 동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주는 행복과 기쁨은 세상에서 얻는 것에 비할 수 없죠.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삼백년을 그렇게 동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좋으니까 그랬던 것이죠.
그런데 앞에 구절에 있듯이 돼지가 그 씻을 것을 잊고 돼지우리로 다시 돌아가듯이 사람들이 옛 삶을 자꾸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은혜를 받을 때는 새로운 무언가에 매료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죄의 본성에 더 잘 맞는 세상이 생각나는 것이죠.
세속과 죄를 멀리하는 싸움이 평생 성도의 고난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선교지에서 박해받는 분들의 그런 박해는 없잖아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예수님 앞에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서기 위해 이 거룩하고 경건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이 싸움을 꾸준히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 날과 안 한 날은 분명히 다릅니다.
말씀을 묵상한 날과 아닌 날은 분명히 다릅니다.
주님의 날에 사람들이 받을 가장 큰 충격은 지금 이렇게 섞여 살던 사람들이 영원히 분리되어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일상에서 하나님 편에 서는 게 분명하지 않다면 그 날에 우리가 어느 편에 세워질 것인지 어떻게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주님의 가르침대로 죄를 버리고 거룩하려는 삶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속할 자라는 걸 내 스스로에게 증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가서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데려가시겠다고 말씀하셨죠.
그 날을 기쁨으로 기대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있다는 걸 기억할수록 이 땅에서의 하루하루를 더욱 소중하고 알차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주님의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하나님은 그 선상에서 사회에서의 일과 지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명도 주시며 마지막 날까지 계속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어도 무엇으로든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셔서 만족과 기쁨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주님 곁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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