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 (베드로전서1장3절-9절)

남수연 2020. 4. 21. 15:06

https://www.youtube.com/watch?v=sY-4tmnIpDk&t=198s

<2020년4월19일>

지난 주 중앙방역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들으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거듭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제 코로나 발생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톰 라이너라는 종교 전문가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세상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당신의 교회 또한 그럴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언론에서 온라인 예배에 대해 조사한 결과가 있는데요.

응답자의 15% 정도가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로 바꾸리라 예측됩니다.

제가 요즘 주일예배실황을 보내드리고 성도님들이 잘 예배하고 있는지를 통계로 봅니다.

평균 시청률을 보면 많은 성도님들이 예배 시간 전체에 참여하지 않는 게 나타납니다.

아무래도 생활하는 공간에서 예배하다 보니 예배에만 집중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더 염려되는 것은 온라인예배를 택한 성도들이 점점 가나안 성도의 대열에 합류될 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회가 큰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을 때, 예배의 형태가 어떻든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경험한 성도들에게도 그 이전과 같은 세상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베드로사도가 쓴 이 편지를 받을 교회도 박해를 받고 흩어진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도 이 성도들은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든 경제 위기든 전쟁이든 어떤 외적인 환경이 달라진다 해도 우리도 되돌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성경 속 옛 성도들의 믿음을 배우고 더 확신 있게 주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베드로전후서는 성도들의 고난을 다루는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성경 중에서 고난이란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수신자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흩어진 성도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 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디아스포라라는 이 단어는 박해를 받아 분산 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편지를 쓴 시기는 네로황제의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이라고 봅니다.

현재도 고난 중에 있지만 앞으로 더 큰 고난이 예견되어 있는 것이죠.

편지를 쓴 장소는 1절에 바벨론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에 바벨론은 고대문명의 폐허만 남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성경에서 세속 문명의 중심지를 바벨론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현재 세속문명의 중심지인 로마를 은유해서 바벨론으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실제 베드로사도는 이 편지를 쓰고 얼마 되지 않아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바울사도 역시 네로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하죠.

베드로사도는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열정으로 따랐던 제자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단 한권의 성경도 쓰지 않았다면 왠지 아쉬웠을 것 같습니다.

이 베드로서는 헬라어 원문으로 볼 때 문장이 매우 아름답고 유려하다고 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도 그런 점을 좀 느낄 수가 있죠.

어부 출신의 투박했던 베드로가 이렇게 우아한 문체의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편지의 마지막에 밝혀집니다.

이 편지를 실루아노가 대필했다고 하죠.

바울과 2차 선교여행을 갔던 그 실라입니다.

로마 시민권자였던 실라가 유창한 헬라어로 베드로의 말을 대필해서 이 서신을 쓴 것이죠.

우리는 혼자서 많은 일을 잘 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지체가 협력해서 주님의 나라를 받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갔지만 여전히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칭찬하고 꿋꿋이 믿음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성도들은 크고 작은 시련을 만납니다.

물론 세상사람들도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거기에 더해 믿음을 위한 고난을 선택해 살아갑니다.

스스로 짊어지는 이 믿음의 고난은 때로 성도들의 마음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삶의 짐들은 내려 놓고 싶다고 내려 놓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고 가는 것이죠.

그러나 믿음을 위한 짐은 사실 내려 놓으면 그만이거든요.

고난이 올 때 제일 먼저 이 짐을 벗고 싶을지 모릅니다.

힘들면 신앙의 모든 의무를 먼저 내려 놓으려 하잖아요?

그러나 성도의 부르심과 가치는 예수님을 위해 자청하는 고난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골로새서124절에서 고백하죠.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신약성경의 성도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고난을 당했고, 고난 받는 형제들을 기꺼이 섬기며 주님의 사랑을 대신했습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을 위한 고난의 십자가도, 고난당하는 형제들과 같은 짐을 지는 것도 회피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는 믿음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선택한 장성한 신자들보다 내게 어서 젖병을 물려 달라고 보채는 어린 신자들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다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셨죠?
그렇다면 성경이 보여주시는 성도의 삶을 목표로 가야 하리라 믿습니다.

성도들은 먼저 진리 위에 믿음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3절에서 확인해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지난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보내며 살펴 본 바로 그 내용이잖아요?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믿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산 소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은 다 같지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인간의 본성인 종교성에 뿌리를 둔 믿음이 있습니다.

성경과 진리에 대한 체험이 없이 반복적인 신앙의 행위들이 돌탑처럼 쌓여진 신앙 같은 것이죠.

돌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삽니다.

혹은 막연하게 하나님 눈치를 보며 뭔가를 받아내려는 기복적인 형태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지나치게 감정의 영역에 믿음을 두는 사람이 있고, 영의 세계를 탐닉하듯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사도는 정확하게 우리 믿음의 기반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 그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하늘의 기업에 견고한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매 주 성경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야 나의 인격으로 이해하고 동의한, 책임감 있는 믿음이 되고 바르게 성장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배우며 그 말씀이 가르치시는 예수그리스도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 이런 믿음의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은 하늘에 유업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4,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오늘 흩어진 성도들이 땅의 가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하늘의 완전한 유업을 바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늘의 도성을 바랐던 경건한 성도들은 누구든 이 땅을 나그네 같이 살았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유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이 떠도는 성도들에게 베드로사도는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의 유업을 상기시키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은 땅의 것으로 위로 받지 못합니다.

땅의 것을 일부러 버렸는데 다시 땅의 소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넌센스죠.

하나님께서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십니까?

우리 영이 거듭나면 영원히 머물 처소가 어딘지를 아는 것 같습니다.

거듭난 영혼은 하늘의 유업을 사모하고 그것을 떠올릴 때 산 소망을 얻게 되는 것이죠.

지금 많은 것을 갖고 누리는데도 기쁨과 소망이 메말랐다면 거듭난 영의 안식처인 하늘의 유업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땅의 재산과 가업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따라 성실히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주셔서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간직하신 영원한 유업을 생각하며 기뻐할 때 현재의 삶에서도 자족하는 마음과 여유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유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고 현실에는 시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 베드로사도는 지금 성도들의 어려움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우리가 이 땅의 재난에 대비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이번에 코로나전염병은 모든 사람이 무차별로 겪는 시련이 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부유한 나라들이 코로나 철퇴에 휘청거리고 있죠.

세계에서 재산이 가장 많은 왕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입니다.

정확히 계산할 수조차 없는 재산은 대략 천조가 넘는다고 하죠.

이 사우디 왕가에서도 150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하더군요.

전염병이 누구라고 피해 가겠습니까?

어쩌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민폐시민이 되고, 하필 감염자가 다녀가서 가게 문을 닫아야 하고, 또 국가 봉쇄로 무역거래가 끊겨 잘 나가던 회사가 타격을 입기도 하는 것이죠.

누구든지 가정사에서 아픔을 만날 수 있고 원치 않는 질병을 만나기도 합니다.

은혜자매가 지난 주 4차 치료를 위해 입원했습니다.

제가 병원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데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들어가시는 권사님과 용품이 든 쇼핑백을 들고 따라가는 은혜 자매 뒷모습이 왜 그렇게 안쓰러운지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잖아요?

지난 주 세월호 6주기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우리가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련의 정체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1) 우선 모든 문제 앞에서 우리는 잠깐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라 해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 문제가 영원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 모든 상황을 의논할 것이고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겨나가도록 도와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장 문제가 터지면 우리도 잠깐 근심합니다.

그러나 결국 일이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더 깊이 경험하며 오히려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일하고 쾌적한 삶이 아니라 강인한 불굴의 삶입니다.

2) 성도들의 고난은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7절에서 말씀하죠.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것이니라

귀중한 황금이 되려면 뜨거운 용광로를 거쳐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고난으로 얻어지는 게 값지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고난을 통해서 값진 경험을 얻고 지혜를 얻습니다.

이번에 방역을 잘 한 나라로 손꼽히는 대만 같은 경우 이미 사스 전염병 때 응급시스템이 마비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후 전염병에 대한 매뉴얼을 철저히 준비 해 놓았고 이번 코로나에 초기부터 제대로 적용했던 것이죠.

세상에서도 값진 것을 얻으려면 고생과 수고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안 해 버리면 발전은 없습니다.

대개는 하기 싫은 것을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하죠.

제가 가만히 살펴보니 하기 싫은 일이 거의 유익한 일이더군요.

한동안 제가 운동을 못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올림픽 공원에 차를 놓고 한 바퀴 돌고 갈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초목이 다 아름다운지 어디를 보든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한 기분으로 걷는 것은 딱 십분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건강을 생각해서 땀이 나고,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 걸 견디며 그냥 열심히 걸어야 합니다.

벤치에 앉아 라일락 꽃향기에 취하고, 기분 좋게 천천히 걸으면 목적했던 건강은 챙길 수 없는 것이죠.

정금을 위해 뜨거운 제련이 필요하듯, 정금 같은 영혼을 위해 시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둘의 가치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불로 제련된 값비싼 금도, 사람이 얻은 경험과 실력과 기술도 세상을 떠나는 순간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세상과 함께 다 사라지는 것이죠.

다만 성도들이 고난을 통해 연단된 믿음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겪게 되는 모든 시련에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곧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련을 잘 견뎌 연단 된 믿음을 이루면 예수님의 날에 반드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누구나 다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저도 재난소득을 70%에 줄지 전 국민에게 다 줄지 관심이 많습니다.

성도들의 모든 어려움은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주님의 계획 중에 있습니다.

크고 작은 난관들을 만날 때마다 단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대로 행한다면 힘든 과정에서 아름답게 연단 된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주님의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다고 하시잖아요?

고난이 없이 연단되는 믿음은 없습니다.

 

4. 마지막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 문제에 늘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달콤하고 행복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에서도 사랑은 책임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또 백퍼센트를 주지 않는 다면 사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께 대한 사랑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

베드로사도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집도 버리고 땅도 버리고 직업도 버렸습니다.

현대의 신자들은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가면 뒤에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코로나사태가 터지자 사람들은 악의에 찬 댓글로 교회를 비방하더군요.

우리는 이 전염병을 종식시킬 수 있으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뿐인데 세상은 교회를 이기적이다, 전염병의 온상이다 비난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은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뇨

참 성도가 세상에 은신하려 한다면 결국 세상은 내편이 아니라고 내 팽개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망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세상의 원리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술 먹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허세부리고, 부정하고, 악을 조장하는 세상 문화를 악하다 하기에 거기 동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서의 성도들은 세상의 악한 것 뿐 아니라 세상의 좋은 것들까지도 신앙을 가로 막을 때 포기해 버렸습니다.

왜 현대의 신자들은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편안한 길을 가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불편한 상황을 감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게도 부족한 물질을 쪼개서 성도와 교회를 돕는 것도, 누군가에게 내 곁을 내 주고 내 좋은 것을 나눠주는 것도 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너희가 그렇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부족하고 작은 사랑이지만 이렇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점점 더 키워가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장 좋은 유산을 하늘에 간직해 두셨습니다.

집값이 오르고, 재산이 늘어가고 월급 오르는 데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왜 하늘에다 준비하신 엄청난 유산은 생각지 않고 사십니까?

성도들이 일상적인 어려움에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차고 기쁨을 다 잃어버린 채 사는 것은 이런 천국의 소망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도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 성도들의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통과할 것이고 칭찬받는 믿음으로 연단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모든 것을 버리고 나그네 된 성도들은 고난 중에도 크게 기뻐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한 것이죠.

우리도 하늘에 간직 된 나의 유업을 생각하며 기쁘게 매일 주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