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강추위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생 최대의 힘든 겨울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포항지진 두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2백여가구가 체육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인 분께서 뜨거운 바닥에 등 좀 한번 지지고 싶다고 한 숨을 쉬시더군요.
추운 겨울 집 밖 생활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제천 화재 참사 유가족들도 가족을 떠나보내고 시린 겨울을 보낼 것입니다.
이번에 드러난 문제점 중에는 교신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매일 해야 할 교신장비 점검을 원칙대로 하지 않은 것이 참사를 키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죠.
이 문제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매일 믿음의 훈련을 꾸준히 해나가지 않으면 위기상황에서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본문이 바로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우리 믿음에 꾸준히 더해야 할 훈련들을 지시합니다.
이것을 행하는 동안 넘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훈련이 부족할 때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훈련할 때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고 합니다.
훈련이 부족할 때 구원을 확신하기도 어렵다는 뜻입니다.
지난 에 영재발굴단이란 프로를 보며 제가 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열 살 짜리 첼로 영재 진우가 하루에 여덟 시간을 연습하더군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 취미생활, 운동, 돈 버는 데 대한 사람들의 집념과 집중력과 흥미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에 비할 때 현세와 내세의 가장 중요한 영적 생활을 위해서는 왜 이렇게 나태하기만 할까요?
우리 믿음을 위해 뭘 좀 하려면 다리가 질질 끌려 오잖아요?
또 하나 이 프로그램을 보며 생각한 게 있습니다.
제작진들이 가정형편상 해외 콩쿨에 한번도 참가하지 못한 진우를 위해 음악의 본고장 독일여행을 기획합니다.
진우는 베를린음대의 교수에게 처음으로 개인 레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진우 연주를 세심히 듣던 교수가 진우가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요구를 합니다.
그 곡이 만들어지고 연주되었던 그 시대를 알고 있냐는 것입니다.
어떤 시대에 곡이 만들어졌는지, 어떤 청중들 앞에서 그 곡이 연주되었는지 그 분위기를 알아야 그 곡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작곡자가 청중을 염두에 두고 곡을 썼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서곡을 연주할 때 당시 연미복을 입고 우아하게 청중들에게 인사하는 그런 모습을 생각하며 연주해 보라는 거예요.
진우가 이 말에 충격을 받는 표정이더군요.
단지, 사람이 만든 곡을 잘 연주해 내는 데도 그런 노력과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받을 때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인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베드로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칠십이 가까운 베드로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노안이 와서 글씨도 잘 안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쓴 베드로전서를 보면 실루아노가 대필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요즘 같이 누구나 종이에다 생각을 적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파피루스나 양가죽 같은 데 문서를 기록하는 일은 비용도 많이 들고, 특별한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또 이 편지는 인편으로 보냈습니다.
몇 날, 혹은 몇 달을 걸려 사람이 직접 찾아가 전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14절을 보면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안다고 합니다.
유서와 같은 편지를 베드로사도가 쓰고 있는 것이죠.
베드로사도에겐 평생에 영광스러운 짐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죠.
그리고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서 이끌어야 할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신약성경 서신서에서 드러나듯이 당시 성도들도 다 연약하고, 미숙하고, 문제투성이였지만 그의 어깨에서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배경들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이 편지가 어떤 마음으로 씌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죽음을 앞둔 긴급한 상태에서, 반드시 꼭 써야 할 말을 써 보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냥 안부편지나 덕담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편지에서 베드로가 다룬 중요한 문제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문제점도 짚어보고 해결책도 찾아보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1. 베드로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성도들의 신앙훈련의 부족입니다.
먼저 편지의 서두는 따뜻한 축복과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믿음의 복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3절에 보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만 있는, 세상에는 없고, 세상에서는 받을 수 없는 유일한 것, 생명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하는 생명을 소유했다는 게 얼마나 뿌듯하고, 죽음에 두려움을 쫒아내고, 또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거기에 하나님께만 있는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사람은 털면 털수록 숨겨놓은 탐욕과 시시함과 거짓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만의 속성인 거룩과 지극한 선과 높고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멋진 단어를 써가며 단순한 인사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은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큰 시련과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입니다.
지금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위력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삶에는 의도치 않게 휩쓸리게 되는 재난들이 있습니다.
포항 시민들이 만난 지진 같은 자연재해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전쟁 같은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다수가 함께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도 개인적으로 삶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외압적인 고난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때 성도들을 지탱해 주는 것은 이렇게 장성한 믿음과 신성한 성품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아직 이런 보배로운 믿음의 실질적 혜택을 누릴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또 본서를 읽어 보면 베드로가 염려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떠난 뒤에 교회 내에 진리를 왜곡시키는 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을 미혹할 거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떠날 때도 똑같은 걱정을 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노리는 사탄의 계책들은 거의, 항상, 적중합니다.
믿음에 바로 서지 못한 사람들은 그 덫에 속절없이 넘어집니다.
훈련이 부족한 성도들은 아름답고 고귀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언제든 시험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사도는 마땅히 도달해야 할 믿음의 경지를 향해 힘써서 훈련하라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신앙 훈련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점점 식어지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이나 기도학교, 전도학교 같은 데 잘 모이질 않습니다.
훈련하자는 부담스러운 말은 어느새 교회에서 금기사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일도 훈련이 안되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없습니다.
첼로를 단 일 년 배우고 전국대회1등을 차지했던 영재소년도 하루 여덟시간을 훈련하잖아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되지 않은 신앙은 항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며 스스로의 목을 가누기도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5절에서 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모든 열심을 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든 열심을 내서 할 훈련을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는 믿음이 나오죠.
그런데 그 믿음에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더해가야 한다고 합니다.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믿는 것을 성도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믿음만능주의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믿어’
단지 이것이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성도들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떤 점을 훈련해야 할지를 베드로사도가 가르쳐 준 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합니다.
믿음에서 그치면 안되고 그 다음에 덕으로 우리를 보강해 가야 합니다.
‘덕’은 마음을 닦아서 얻는 좋은 인격과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일반 사람들도 ‘덕’을 갖추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베드로사도가 말하는 ‘덕’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덕목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신 덕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덕성이 있죠?
정직하고 진실 된 행동, 무한한 자비, 깨끗하심, 차별이 없는 사랑, 거짓되지 않은 겸손 그런 덕성입니다.
이런 덕을 믿음에 덧입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덕목에서 약점을 보이는 순간 세상은 이구동성으로 비방합니다.
세상적인 도덕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태도는 우리에게 수치일 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에 덧입도록 매의 눈으로 스스로를 살피며 우리 자신을 훈련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합니다.
구원받는 복음의 지식도 점점 더 확실하게 보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더해져야 합니다.
성경을 잘 배우고 성경에서 배운 하나님을 실제 생활에서 존중하고 따를 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시나브로 더해집니다.
작년보다 올해, 어제보다 오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더해지고 있음을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부하나님의 자애로운 눈길과 성자하나님의 미소와 성령하나님의 기뻐하심을 거의 항상 인식하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절제를 더해야 합니다.
평창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이 오직 경기만을 위해 땀 흘리는 것을 보면 절제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성도들을 승리를 위해 달리는 운동선수에 비유했습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시간을 받았지만 해야 할 일은 더 많습니다.
세상에서도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해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오늘 말씀대로 훈련까지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절제해야 할 부분들이 생깁니다.
생존을 위한 직장생활을 줄일 수는 없으니 세상적 재미를 위한 시간들을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취미들이 사실 일시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입니다.
TV시청이나 스마트폰, 게임, 이런 것들을 우선적으로 줄이고 훈련 할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취미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절제하며 사는 재미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훈련에 순서에서 먼저 지식이고 그 다음에 절제를 더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저절로 절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절제할 것들을 골라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말로만, 생각으로만 하지 말고 훈련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절제에 인내를 더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인내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겐 계속해서 어려운 일들이 닥칩니다.
믿은 대로 되고, 입으로 선포한대로 되는, 그런 신앙은 마술 같은 이야기지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신앙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오히려 성도들이 더 많은 박해를 받고 인내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덕을 더하고 절제를 더하며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여전히 삶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제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내는 그냥 참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좋은 결말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하나님이 항상 그러셨듯이 이 일에도 반드시 좋은 결말을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무수히 인내해야 합니다.
참아내야 할 사람이 곁에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주님의 성품으로 연단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든 환경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획 아래에서 일어납니다.
성급한 기질을 잠재우며 항상 최대한 인내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합니다.
경건은 이런 타인과의 관계적인 면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중을 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본래적으로 경건이라는 성품은 없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의 성품인 경건이 물들게 되는 것이죠.
사람이 무슨 일에, 누구와 시간을 많이 보내냐에 따라 닮아 간다는 것은 다 아시는 바입니다.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힘으론 가질 수 없는 고상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경건을 더해가게 됩니다.
사람이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스스로 삼가는 태도에서 경건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 성경책을 높이 끼고 점잖게 걷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다음은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해야 합니다.
형제우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성도들 사이에선 형제 사랑이 최우선 덕목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이 있고 분쟁이 있다면 모두 함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진리를 주장한다고 미움과 분쟁이 되면 모두가 다 틀린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 필그림한인교회가 동성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한 미국장로교단(PCUSA)를 탈퇴했습니다.
대형교회인 필그림교회가 교단에서 탈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교단 측은 탈퇴 시 교단법대로 모든 재산권을 교단에 넘기라는 법정 소송을 했습니다.
필그림교회는 127억의 건물을 갖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전교인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교인1259명 찬성, 반대 36명의 압도적인 결과로 127억 교회를 깨끗이 포기하고 전 교회가 새로운 예배처를 찾아 광야로 나왔습니다.
법정 소송이나 피켓 시위나 예배당 앞에서 큰 소란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갈등이 세상의 조크거리가 되지 않도록, 교회의 분쟁이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상대의 입장을 형제애로 존중해 주면서 진리를 지켜낸 성숙한 성도들의 결단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가 진리를 수호하는 데 있어서도 형제사랑의 대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족 간에 왜 갈등이 생깁니까?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진리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되 방법은 항상 사랑이어야 합니다.
형제 우애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힘써 더해야 하는 것임을 잘 기억하고 감정이 아닌 믿음과 의지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 아가페는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아가페 사랑이 용서와 구원의 동기가 되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이 사랑이 없으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각 나라의 교회사를 보면 왜 순교의 피 위에 구원의 역사가 비로서 피어났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그런 사랑이 아니면 사람은 꿈쩍도 안합니다.
가족을 전도하려고 할 때도 무조건적인 이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더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사랑인 것은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가장 큰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일곱가지 덕목을 힘써서 훈련할 때 우리는 항상 생명과 경건의 충만한 능력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당시 성도들이 구원의 진리만 믿고 그 이상의 훈련은 아무 것도 안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성도들도 다르지 않잖아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의 색다른 감동과 왠지 뜨겁던 그 신앙감정은 반드시 희미하게 사라집니다.
훈련이 되지 않은 신앙은 힘을 잃고 장기적인 침체의 늪으로 빠지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그런 성도들을 향해 믿음의 불씨를 다시 일으키고 힘쓰고 애써서 다시 훈련을 시작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고 구원에 도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풍성한 영적, 육적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훈련할수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훈련이 안 돼서 침체되고, 어린 신앙에 머물고, 결국 미혹하는 시험에 빠져들 것을 경고합니다.
우리 모두 다시한번 신앙의 훈련을 다짐하고 바짝 고삐를 쥐기 바랍니다.
훈련은 정해 놓은 계획이 필요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형편 되는 대로 하는 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상 어떤 일보다 앞세워 정해 놓은 시간과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예배, 정해 놓은 기도시간, 정해 놓은 성경 분량, 이런 것이 훈련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믿음에 점점 더해가야 할 덕목들을 수시로 점검하며 부족한 성품들을 성령님께 의지해서 힘써 닦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 훈련과 신앙의 삶은 우리를 더욱 강인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훈련이 부족할 때 작은 시련도 힘겹고 불행감은 증폭됩니다.
생명과 경건이 충만하도록 훈련하는 것, 그래서 점점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성품이 묻어나는 것은 힘들게 노력한 이상, 큰 행복과 만족을 줄 것입니다.
훈련을 단단히 결심하고 더욱 견고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쓸모 있는 장성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8년1월14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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