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수천년 인간역사를 관통하며 면면히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보배로우신 분으로 믿고 그 이름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대로라면 예수님을 보배로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영원한 내세의 운명이 갈리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치약에서 발암물질 하나만 검출되어도 다 내다 버리고 환불소동을 벌이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엔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늘 베드로사도의 편지는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왜 우리는 믿고 저들은 믿지 않는지, 왜 복음이 우리 같은 이방인들에게서는 믿어지고 택함을 받았던 유대인들에게는 거부되었는지.
또 예수님을 믿게 된 결과로 우리가 현재와 내세에 받게 될 영광과 칭찬이 무엇인지.
이 중대한 문제의 답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 더욱 구원의 확신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에 왜 예수님이 ‘산 돌’이신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모퉁이 돌’로 상징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상징 가운데 ‘모퉁잇돌’이라는 좀 낯선 비유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모르는 성도님들에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짝을 맞추며 믿음의 원리를 이해하는 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성취의 정교한 관계를 깨달으면 우리 믿음의 확실성은 더욱 공고해 집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 영양가가 높은 신령한 젖이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의 말씀과 베드로사도의 해설이 섞여 있어서 좀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요지는 우리의 구원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철저히 준비하셨고,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지금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성취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성취가 있고 부정적인 성취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들에겐 긍정적인 예언이 성취되었고, 유대인들에겐 부정적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죠.
좀 복잡한 것 같지만 하나씩 살펴보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
1. 먼저 구원의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신다는 말씀입니다.
6절에 성경에 기록되었으되라고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28장16절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 사실이 이렇게 예언되고 계획 된 일이 실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한절 말씀 안에는 구원을 위한 완벽한 복음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배로운 모퉁잇돌은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시죠.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죄의 수치와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류의 구원을 이루실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구원자를 시온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시온은 다윗성과 예루살렘 성전 일대를 부르는 독특한 명칭으로 구원과 관련 된 특별한 지명입니다.
이사야59장20절에도 그리스도께서 시온에 오신다는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
그러니까 6절에서 언급하신 시온에 임하는 모퉁잇돌은 구속자라는 결론이 나오죠.
구속자를 시온에 두신다는 것은 시온만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민족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속자를 통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계획이시라는 것이죠.
미가서 4장2절에 보면 시온의 구원이 장차 이방나라에 퍼질 것을 역동적으로 예언해 놓았잖습니까?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이 말씀대로 서신을 받는 이방인 성도들도, 우리도 시온에서 나온 구원의 도가 전해져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방식은 여기서도 일관되게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인간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행위나 노력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전제입니다.
그걸 임상실험으로 보여준 게 이스라엘민족입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대속제물로 예수님을 준비하시고 그 사실을 믿는 자가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소아시야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에 의해 구원을 받았는지를 이사야서의 예언을 통해 확고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시온에 두신 구속자를 믿고 죄로부터 구원받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고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2.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모퉁이돌’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산 돌’이다 ‘모퉁이 돌’이다로 상징한 것은 이미 하나님나라의 건설, 교회를 세우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를 성경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비유합니다.
우리도 인생을 집에 비유하잖아요?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를 ‘모퉁잇돌’이라고 했을까요?
현대건축을 생각하면 모퉁잇돌이라는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을 떠다가 큰 건물을 짓던 고대사회에서 ‘모퉁이 돌’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알만한 말입니다.
세계유적들을 보면 큰 건물은 전부 돌로 지어져 있잖습니까?
예루살렘에 가보니 거기 건물들은 지금도 다 돌로 지어져 있더군요.
돌이 아닌 건축재로는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퉁잇돌을 중시하는 건축방식은 그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을 세울 때 제일 먼저 코너에 놓는 돌입니다.
건축을 시작할 때 설계도에 그려진 대로 제일 먼저 모퉁이 돌을 놓고 좌우로 이어 가며 돌을 놓고 그 위로도 돌을 쌓아 건물을 짓는 것이죠.
모퉁이 돌을 놓으면 비로서 실제 건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퉁잇돌이 없이는 집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큰 건물일수록 모퉁이 돌도 웅장하고 기념비적인 귀한 돌을 씁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은 보통 1미터 정도의 고급 대리석으로 쌓았고 큰 것은 십미터 짜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왔을 때 눈이 휘둥그래서 말하잖아요?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이런 웅장한 건물에서 모퉁잇돌이 빠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대한 모퉁잇돌이 빠졌다면 건물은 무너져 내릴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감탄하던 그 성전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고 예루살렘성전은 그 말씀대로 무너져 지금 자취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없이 세워진 집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졌다고 자만했었죠.
하나님과 언약한 아브라함 자손이고, 십계명 돌판과 율법을 받았고, 예루살렘성전을 가진 완벽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모퉁이 돌을 준비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건축을 이제야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말씀이죠.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놓으신 뒤 산돌이 된 성도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산돌이신 예수님과 생명으로 이어져 산돌로 지어져가는 교회는 정말 신비한 연합체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 없이는 하나님의 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 인생도 영생하는 복된 집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면 꼭 예수님이 모퉁잇돌로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퉁잇돌이 되신 성도들의 인생집은 이생에서도 고상하고 견고하고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인생들을 뒤흔드는 수많은 폭우와 재해에 얼마나 많은 집들이 무너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기초로 튼튼히 놓여진 성도들의 삶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견뎌냅니다.
내 인격에, 우리 가정에, 반드시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모시고 삶을 건축헤 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3. 그런데 이 모퉁잇돌에 대한 부정적인 예언과 성취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정적인 예언은 시편118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니
어떤 이들이 귀중한 모퉁잇돌을 버린다는 것이죠.
또 이사야8장에는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바로 이 부정적인 예언대로 성취된 대표적인 이들이 이스라엘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선택되어 구약성경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예수님을 죽이고 구원에서 제외 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참 기이한 구속사의 한 단면입니다.
대체 왜 그 건축자들은 중요한 모퉁잇돌을 버렸을까요?
왜 이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구원이 되지 못하고 이들에겐 걸려 넘어지고 망하게 하는 바위가 되었을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이스라엘사람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에 넘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정말 이스라엘민족들이 지지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예레미야35장14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한탄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니고 오직 내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격하게 이 땅의 자기 삶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태반의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누구나 선망하도록, 인간 본성에 딱 맞는 눈부신 세상을 사람들은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의 유일한 열망은 이런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보다 여기가 더 좋잖아요?
천국이 더 좋아서 지금 당장 천국에 가고 싶으신 분들 있으신가요?
저것들을 다 못 가져서 불행하지, 저걸 다 가지면 여기서도 얼마든지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잖아요.
사람들의 목적은 오직 이 세상에서 최대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히지 않는 그 신기루 같은 성공과 행복을 잡으려 내달리다 추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기업인으로 기대를 모았던 카페베네, 망고식스의 젊은 창업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식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성경은 이 세상이 결코 인간의 본질적인 소원인 완전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악하고 죄인이라 그게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그걸 주겠다고 사람을 기만하고 사기 치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부러움과 관심을 모았던 안젤리나 졸리와 브레드피트의 결혼파경을 보십시오.
안젤리나 졸리가 이혼 후 얼굴마비와 고혈압에 시달리며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지 심경을 밝혔더군요.
자신이 어려서 엄마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며 자랐기에 혹여라도 자기 자식들에게 걱정스런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사워를 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이 주는 돈과 성공과 행복에 모든 것을 걸지만 이렇듯 세상은 사람을 기만하고 내동댕이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합니다.
이 세상을 이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다고 합니다.
주일이면 등산가고 운동하고 모임에 참여해서 안된다고 거절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좋아하는 것도 끊어야 하고 교회생활에 얽매여서 싫다고 거절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가는 것보다 차라리 확실히 눈에 보이는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천국 같은 이 땅을 누리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때처럼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하고 버립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면 이들이 불순종하고 믿지 않게 된 이면에 하나님의 관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모퉁잇돌을 버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들이 먼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믿음을 방해하셨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그대로 두셨다는 뜻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신학용어로 ‘유기’라고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든 관여치 않으시고 스스로가 원하고 선택하는 대로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집스럽게 제 갈 길로 가니까요.
오늘날 교회 밖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구경만하다 돌아서는 분들이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결정대로 놔두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다 예수님이 천국과 우리 인생의 모퉁잇돌이 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도 교회 밖 사람들처럼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여기 세상이 싫어서 오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이 싫으면 교회가 아니라 절로 가셨겠죠.
우리도 똑같이 이 문명세상의 편리함과 세련됨과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을 이 세상과 세상이 주는 것들보다 훨씬 더 보배로운 모퉁이 돌로 믿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9절에서 밝힙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우리는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1장2절에서도 분명하게 밝힌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지혜가 있어 사실을 잘 분별했거나, 내게 유리한 것을 잘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보배라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에게 어떤 방식이든 관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내가 교회 오기를 선택해서 내 발로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 믿게 되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깨닫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온 게 아니라 하나님이 데려다 놓으셨다는 것이고, 내가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이렇게 택함을 입고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믿은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이 말은 베드로사도가 한 말이 아니고 구약성경에 나온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함께 나라를 세워보자고 하셨을 때 제안하신 축복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고 따르면 이런 영예로운 내 백성을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퉁잇돌을 버린 이스라엘은 그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 축복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택함을 받은 천국 특별 시민이 되었습니다.
왕적인 제사장들입니다.
언제든 어떤 사제나 목사나 중보자가 없이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의지해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 찬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제사장들입니다.
또 파멸 될 이 세상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며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영구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그래서 어떤 악의 세력도 건드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놀라운 신분의 변화와 영적 변화와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들을 때 감격이 되십니까?
부귀영화, 무병장수, 만사형통 이런 게 없어도 정말 이런 복으로 만족하십니까?
하나님 주신 이런 축복이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왜 하나님이 안 주시겠습니까?
삼손 같은 힘과, 빌딩 열 개와, 박사학위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축복이라면 왜 하나님이 안 주셨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이 좀 잘 되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어깨가 축 쳐지고 낙담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을 살면 좋은 일도 만나고 나쁜 일도 만납니다.
오히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현세적으로 내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는 믿음이라면 이런 인생사에서 의혹과 원망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삶은 늘 우리를 속일 것입니다.
자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1)
너무 아름답고 축복 된 말씀이죠?
그런데 여기 부자가 될 것이다. 사업이 잘 될 것이다. 자녀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이 만족하고, 네 뼈가 견고하리라고 하시잖아요?
우선은 삶이 메마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고 견고히 붙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꼭 ‘물 댄 동산,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을 넘치는 재물의 축복이라고 우리는 해석하길 좋아하는 것일 뿐입니다.
베드로사도를 통해 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전히 예수님을 잘 믿으면 당장 형통하고, 믿고 기도한대로 이뤄진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형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만이 이뤄집니다.
내 욕심대로 구하는 것을 다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교계의 원로이신 박조0 목사님은 부귀영화가 복이라는 목회자는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삶에 메마르고 혹독한 날이 올 때도, 미풍이 불고 꽃이 피는 좋은 날이 올 때도, 베드로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복을 아는 우리는 모든 날을 담대하고 용기있게 마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들, 잠시 후 하나님 앞에 설 때 한 개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소유하고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오늘 베드로가 말씀한 것들 뿐입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
이 지위와 축복만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가 가져 갈 축복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과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과거 어둡고 칙칙한 삶에서 불러내셔서 이런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오늘 베드로사도는 말씀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나왔는지 믿는 성도들은 그 입에서 저절로 하나님이 하신 선하신 일을 칭송합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왜 이런 과분한 대우를 하시는 지 하나님이 정말 감사해,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야.
그러면서 항상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며 그 사랑을 선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모시고 인생을 건축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삼고 거대하게 지어져가는 영구한 하나님의 집의 산 돌이 꼭 되시길 바랍니다.
현실이 아직 힘들고 메마르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을 사랑하고 하루하루 만족하고 감사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7년7월3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베드로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드로후서1장1절-11절 (더욱 힘써 이것을 더하라) (0) | 2018.01.19 |
---|---|
베드로전서2장11절-17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0) | 2017.08.15 |
산 돌이신 예수그리스도 (베드로전서2장1절-8절) (0) | 2017.07.28 |
베드로전서4장7절-11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0) | 2017.06.01 |
베드로전서5장6절-10절 (근신하라 깨어라) (0) | 2017.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