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교회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 특정한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에서 회람하도록 보낸 것입니다.
그것이 세대와 나라를 건너 와 오늘 주는나의산성교회에까지 전해진 것이죠.
베드로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믿었던 자신에게 좌절하고 통곡했지만 결국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죽음으로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를 떠올리며 오늘 우리에게 전한 말씀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서신서를 읽을 때는 한 줄 한 줄 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빈이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았는데 유치원생이 어떻게 그렇게 글씨를 잘 쓰는지 대단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엄마, 감사해요. 신세 많이 졌어요.’ 라고 썼더군요.
오진경 집사님이 이 부분을 읽을 때, 왜 어린 성빈이가 이런 어른스러운 말을 쓰게 되었지 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해 보게 되는 것이죠.
오늘 편지를 쓴 베드로사도의 마음을 헤아리며 깊이 말씀을 살펴볼 때 큰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앞의 1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에게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칭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 성경은 성도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생활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입니다.
먼저 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악독하다, 남을 기만하고 위선적이고 시기심이 있고 남을 비방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잖아요?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이미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베드로도 인정하는 성도들입니다.
그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요즘처럼 교회에 좀 다녀보고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때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1장에 보면 이들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유대인과 로마인들의 박해를 받으며 실제 도망 다녀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선 안락과 안전을 포기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생명까지도 언제든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것저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을 내 놓아야 된다거나, 직장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타고 다니는 차를 내 놓아야 한다거나, 현금 천 만원을 내야 한다거나.
그래도 사람들이 교회에 지금처럼 모일까요?
초대교회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적어도 요즘 교인들과는 믿음의 출발이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계속해서 버려야 할 죄의 잔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교를 각오한 성도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 해도 여전히 우리 감정과 의지를 휘두르는 죄의 본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얼마나 모순됩니까?
순교할 각오를 한 사람이 무슨 미련이 남아서 남을 시기하냐는 것이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봉사하는 분들이 서로 비방하고 그럽니다.
우리 죄의 근성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말해주는 것이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이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은 세상기준으로 볼 때도 창피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안팎을 채우고 있다면 우리는 그냥 세상에서도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나라의 기준으로 볼 때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현세와 내세의 우리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죄성이 사라지겠지만 현재의 인격성 자체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된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내세의 우리입니다.
이미 성도들의 천국생활은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 천국생활이 아니라면 죽은 다음에 선택의 기회가 없는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성화되고 변화되는 것들도 다음 세상에서 다시 기회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마땅히 버려야 할 과거의 악행과 습관들을 여기서 다듬고 깨끗하게 제거해 나가며 지금 천국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의 소속이 하나님나라로 바뀌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거듭 그것을 말씀하셨잖아요?
이런 현재의 구별 된 삶이 없다면 길에 버려져 밟힌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성도들에게 죄를 버리는 거룩한 삶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입니다.
받는 것만 은혜가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도 은혜입니다.
성경이 거듭 경고하시는 말씀에 경각심을 갖고 우리에게 버려야 할 윤리적인 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도 듣고 나서 덮어 두지 말고 성령께서 내게 무엇이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인지를 깨닫게 하신 그것을 힘써 해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절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한 쪽으로는 부지런히 버릴 것을 버리며 한 쪽으로는 신령한 것으로 계속 채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 간의 비중이 점점 기울어 지는 것이죠.
특히 신령한 젖을 찾는 성도들의 자세를 갓난아기들이 엄마의 젖을 찾는 것에 비교하는 이유가 있겠죠?
그만큼 성장과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간절하게 찾으라는 뜻입니다.
태어난 아기들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엄마 젖을 찾고 젖을 빱니다.
갓난아기들이 젖을 빠는 힘이 씨름선수보다 더 세다는 걸 실험한 프로가 옛날에 있었습니다.
아기들이 빠는 힘이 1미터 정도 빨대로 우유를 빠는 것과 같다고 하죠.
씨름선수들도 몇 번 빨다가 지치는 그걸 아기들이 생존을 위해 해낸다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배고프면 엄마 팔뚝을 빨기도 하는 데 몇 번만 빨면 바로 피멍이 맺힙니다.
그래서 젖먹던 힘을 다하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성도들이 신령한 젖을 이런 태세로 찾고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령한 젖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령한 젖은 새롭게 태어난 영을 자라게 할 수 있는 영적인 공급원입니다.
일반 세상에 속한 것 중에 신자들의 영혼을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은 한 개도 없습니다.
영이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은 신령한 젖 뿐입니다.
신령한 젖은 영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영적인 은혜를 취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한껏 사용해서 신령한 젖을 매일, 계속 먹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임하시죠?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가 믿음을 자라게 하죠?
예배를 드릴 때, 거룩한 생활을 할 때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게 됩니다.
세상사에서도 성령 안에서 행할 때는 모든 것이 신령합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직장 일을 하면 일하면서도 신령한 젖을 먹게 되는 것이죠.
우리에게 이런 신령한 젖이 부족하면 성령께서 그걸 자꾸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좀 더 해야 하는 데, 성경을 더 열심히 읽어야 하는 데, 성질을 좀 고쳐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새생명에 신령한 젖을 먹여 키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사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나라가 진짜 누워서 우유만 먹고 있는 미숙한 자녀들로 넘치지 않겠습니까?
우리 부모들도 자식을 먹이는 게 제일 큰 관심사죠.
제가 아는 집사님 아들이 케냐로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일 년 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장을 다니고 휴가를 다 모아 단기선교를 간 겁니다.
해수욕장도 가고 싶고, 해외 휴양지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귀중한 휴가를 땡볕과 흙먼지 속에서 가난한 마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이렇게 헌신합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날, 어머니 마음 속엔 무슨 생각으로 복잡했겠습니까?
뭘 해서 먹일까죠.
물도 안 좋았고, 며칠 제대로 못 먹었으니 갈비찜을 해줘야겠다 생각했을 것 같은데 아니더군요.
속을 먼저 잘 풀어줘야 한다고 된장국을 끓이고 평소에 잘 먹던 콩나물을 무쳐 놓았다는 거예요.
갑자기 기름진 것으로 과식하게 되면 탈이 난다는 것이죠.
부모들은 자식에게 언제 뭘 먹여야 되는지 압니다.
또 자식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흐뭇합니까?
미운 사람은 반대로 언제 제일 밉습니까?
뭘 아구아구 먹는 모습이 제일 밉잖아요?
하나님은 신령한 젖을 먹을 때가 되었다고 우리 마음을 자꾸 감화시키십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먹어야 하는 데, 입으로 말까지 하면서 막상 먹지는 않는게 우리 문제입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예배드리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우리의 내적 생명 뿐 아니라 외적 성품도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그런 신령한 젖으로 체질이 강해지면 시험을 당해도 넘어지는 정도가 다릅니다.
잠시 시험을 당해도 곧 다시 일어나는 영적 복원력이 강해집니다.
베드로사도는 갓난아기가 젖 맛을 알 듯 그렇게 하나님을 맛보아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맛본 사람은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점점 더 사모하며 신령한 것으로 채우려는 열망이 점점 더 강력해집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고 상담하러 오는 성도들에겐 제일 먼저 꾸준히 성경을 읽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대부분 못 읽는다고 대답하겠죠.
그러면 어떻게 신앙이 성장하길 바라냐고 조언한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신앙의 깊고 넓은 지식들을 섭취하지 않으면 가물은 땅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빈약한 줄기 같은 신앙이 됩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깊게 내리고 신령한 것들을 쭉쭉 빨아들이는 성도들은 보기에도 든든한 아름드리 나무 같이 잘 성장하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고 젖먹던 힘을 다해 따를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4절부터 8절에서 베드로사도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더 영양가 높은 신령한 젖을 제공합니다.
몸에 좋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들이 대개는 먹기가 아주 쉽지는 않죠?
베드로는 예수님을 ‘산 돌’, ‘모퉁이 돌’이라는 비유로 구원자되신 진리를 설명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도 많이 언급합니다.
신약성경도 이해하기 힘든데, 구약성경까지 자꾸 인용되면 더 어려운 생각이 들죠.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십자가에서 나를 속죄하기 위해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의 전부라면 그 진리조차 확실하게 믿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라 아는 만큼 믿어집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는 의혹과 의심이 깔려 있게 마련입니다.
잘 모르고 믿는 것을 맹신이라고 하는 데, 그건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자기 기만이고, 요행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자 유일한 살 길인 예수님을 잘 알려 주시려고 하나님은 성경 역사를 통해 다각적인 상징과 비유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런 상징성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확신하도록 하신 것이죠.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유월절 양으로, 성막으로, 장대에 매달아 놓은 놋뱀으로, 번제단 위의 제물로, 왕으로, 목자 등으로 다양하게 예시해 놓았습니다.
각 비유물들은 예수님의 특정한 역할이나 성품 등에 대해 알려줍니다.
오늘 베드로사도가 그 중 한 가지 상징을 골라 구원의 풍성한 진리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돌’이라고 비유해 놓은 말씀들입니다.
왜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비유할 때 돌의 이미지를 입혀 놓은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원수를 이기는 강대하심, 그리고 보호와 안전을 느낄 수 있도록 반석 같은 돌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 돌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집을 짓는 것, 건축하는 것, 도성을 세우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돌이라는 이미지로 구약성경에서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사도는 특별히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해석합니다.
왜 살아있는 돌이라고 표현하는지 무심하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이런 걸 잘 묵상하고 깨달아 신령한 젖을 먹을 때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더 강하게 성장해 갑니다.
성경도 매일 아는 수준 정도로만 들으면 신앙이 정체됩니다.
돌이 살아있다, 뭔가 좀 추상적이고 막연하지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안되잖아요.
성경엔 그냥 멋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쓰는 말씀이 없습니다.
‘산 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데 ‘산돌’의 반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산 돌’의 반대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은 돌’이죠.
‘죽은 돌’에 대해 알면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했는지 더 잘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은 돌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 돌판이 상징하는 율법과 함께 생각할 때 예수님의 ‘산 돌’로서의 사역에 대해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하셨다면 반대로 십계명 돌판은 죽은 돌이 됩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바울도 로마서와 고린서 등에 보면 이 율법을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이 죽음을 가져오는 조항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십계명 돌판을 준 것은 말씀대로 지켜서 구원받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었던가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는 것을 성공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차원에서 완벽히 지켜낼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간음 안하는 인간이 몇이나 됩니까?
고대시대엔 간음이 죄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간통죄가 형사법으로서는 폐지되었잖아요.
예수님은 이 간음하지 말라는 의미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어도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유죄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계명 돌판과 많은 생활법을 주신 것은 지키다가 실패해서 죄를 정확히 깨닫게 되면 성공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인간이 죄가 없다고 발뺌하잖아요?
죄를 시인하는 것만 해도 성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해결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 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물을 가져오고, 제사를 드리고 나서도 왠지 찝찝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또 죄를 짓고, 다시 속죄제물을 가져오고.
이래선 안되겠다,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할 때, 그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것이죠.
인간이 해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의 돌판은 그걸 지켜 구원을 받는 생명의 돌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에 처하게 하는 죽음의 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죄인들에게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법 아래에서 심판을 받게 되니까요.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가 이 정죄하는 율법을 무효화 시키고 죄인을 살려주는 생명의 돌이 된다는 것을 에베소서2장15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원수 된 것 곧 법조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율법이 그걸 지켜내지 못하는 인간에겐 원수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독소 조항이라는 게 아니라 인간이 그걸 지켜내지 못하니까 죽이는 조항입니다.
그걸 예수님의 육체로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돌의 저주아래 있는 사람들의 죄를 끝낸 살아있는 생명의 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베드로사도가 먹이려는 신령한 젖입니다.
또 살아있는 돌이실 뿐 아니라 그 산 돌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도 산 돌이 됩니다.
이걸 에스겔선지자를 통해 미리 언약해 놓으신 것입니다.
겔11장19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 안에 돌같이 하나님을 향해 죽은 마음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부드러운 살처럼 되어 하나님을 따르며 그 율례들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의 말씀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라.
이제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본성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새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고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가 우리에게는 큰 관심이 가지 않지만 당시에는 십자가로 구원받으면 그럼 율법은 무엇이냐가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보면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해설한 곳이 아주 많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학자들 중에는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구원받고,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율법문제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계속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잖아요?
계명을 지켜봐야 그게 얼마나 본성상 지키기 힘든지를 알게 되고, 그걸 깊이 절감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좀 어렵게 들리고 이해가 안되는 것은 영적인 진리라서 그렇습니다.
뉴스보고 사람 사는 얘기들으면 못 알아들을게 없죠.
그런데 그런 것으로는 신령한 우리의 새생명을 절대로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신령한 양식을 잘 못 먹고 맛을 모르는 것은 너무 많은 시간들을 세상양식을 먹는 데만 쓰기 때문입니다.
다음6절부터 8절까지는 또 다른 의미로 돌을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상징해 놓은 구약성경을 통해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의 구속의 지식을 줍니다.
계속 돌처럼 딱딱한 말씀 같아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까봐 모퉁이돌 부분은 다음 주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된 우리가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또 베드로사도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그 힘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달리 말하면 신령한 젖을 공급받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자라지 않으면 둘 중 하나입니다.
영양 공급이 중단되었거나,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먼저는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들이 거듭난 생명으로 태어납니까?
본문 앞 1장23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렇게 복음과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우는 중에 알 수 없는 성령의 작용하심으로 어느덧 새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나 새신자나 모두 신령한 젖을 공급받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적극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깨닫고 절망케 하는 죽은 돌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친히 몸으로 담당하셔서 우리를 살리신 산 돌이십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 모두가 산돌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으로 정교하고 강하게 결속하고 세워져 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7년7월23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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