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가 세상을 복되게 살기 위한 통찰은 성경에서 계속 배우고 숙련해야 합니다.
평창올림픽이 일년 앞으로 다가와 요즘 스포츠뉴스에서 빙상종목 소식을 많이 접합니다.
고난도의 스키점프를 하는 선수들의 숙련된 기술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그렇듯이 말씀으로 숙련된 성도의 모습은 원숙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목표로 평생에 믿음과 인격을 다듬어가야 합니다.
오늘은 베드로사도를 통해 귀중한 영적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쓴 시기는 네로황제의 박해가 극심할 때입니다.
베드로사도와 바울사도가 악명 높았던 네로황제 박해 시기에 순교했죠.
바울은 참수형을,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충실했던 사도들이 왜 이런 흉악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을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죠.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만 말하면 살 수 있었습니다.
만일 자신이 전하는 이 믿음에 티끌만한 의혹이라도 있었다면 그들도 사람인데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았겠죠.
베드로후서를 보면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측하고 있었고 바울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떨결에 피살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입으로 증거한 이 모든 진리가 진실이라는 것을 목숨으로 증명한 셈이죠.
이 복음과 진리를 듣고 이것이 진실임을 믿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처럼 박해와 고난 가운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꽃을 피워 꼭 구원의 열매를 맺자는 간곡한 권유가 사도들의 편지입니다.
본서에는 ‘고난당하다’라는 말이 열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때 성도들의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죠.
본문 말씀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고난시기를 지나는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에 입각해서 살아가야 할지를 본서의 앞에서부터 계속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장 문 앞에 로마군인들이 들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베드로사도는 무슨 말씀을 이들에게 주셨을까요?
성도들이 붙잡혀 가 수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베드로사도의 당부는 믿음을 굳게 지키고 부부간에 존중하고, 성도들을 돌보고, 직장생활에 충실하라는 것들입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현실을 대강 살지 말고 믿음과 생활을 함께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정세를 보면 정치를 잘 모르는 시민들조차 나라가 어찌되려나 하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또 다시 터진 가축질병에,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 물가, 문득 덮치는 전쟁의 위기감, 강대국과의 외교적인 굴욕감도 피부에 와 닿습니다.
게다가 기업들이 하나 둘 무너지는 뉴스를 보며 사회기반이 흔들리는 불안감마저 듭니다.
이런 때는 사는 게 참 고난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렵고 혼란스런 시기지만 이럴수록 믿음으로 중심을 잘 잡고 배운 도리를 따라 성실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시대의 교회는 로마황제의 박해를 이겨내고 그 믿음을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전수해주었습니다.
초기 성도들이 베드로의 권면을 잘 듣고 그 믿음을 지키고 승리한 것이죠.
오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신앙의 삶에 승리를 가져다 주리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주제어는 교만, 염려, 마귀, 고난입니다.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는 문제들이고 매일의 행복과 불행에 직결되어 있기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먼저 겸손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고 베드로사도는 권고합니다.
고난이 오든 형통하든 성경에서 일관되게 요구하는 성도들의 삶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게 좀 묘한 게, 남이 내게 겸손하게 해주면 좋은데 내가 겸손해지는 것을 과연 원하는지 생각해보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회생활 중에 나보다 위에 있고 내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대할 때는 자신을 낮추는 편이죠.
그런데 내가 갑이고 상대가 을이라면 굳이 겸손하게 대할 필요성을 못 느끼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계속해서 겸손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교만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우리에게 물려주신 하나님의 성품에는 교만이 없습니다.
예수님 모습에 교만은 없잖아요?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을 버렸을 때 획득한 끔찍한 죄성이고 마귀와 공유한 속성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하나님과 통하는 게 아니라 마귀와 통하는 통로인 것이죠.
그래서 교만이 고개를 들 때 꽉꽉 밟아서 그 통로를 차단해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겸손은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하고 좀 다릅니다.
겸손이라면 남에게 고분고분하고 굽신굽신하는 것이 먼저 떠오르죠.
왠지 무시당할 것 같고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신학자 칼빈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자신의 권세나 지혜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께만 모든 선한 것을 구하는 것이 겸손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복이라는 것이죠.
사실 아직도 자신의 힘을 믿는 구석이 아직 남아있다면 인생의 쓴 맛을 덜 봤다는 뜻입니다.
살아갈수록 깨닫는게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구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실패자들보다 복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성공할 힘을 우리는 계속해서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둘 다 깨닫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겸손에는 교만도 없지만 열등감도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럴만한 모델이 없지만 예수님이 가장 완벽한 겸손의 모델이십니다.
누군가엔 공손하고 온화한 얼굴로 누군가엔 오만하고 무뚝뚝한 우리들은 본질적으론 교만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진짜 겸손을 이룬다면 누구나에게 예수님처럼 항상 일정할 수 있는 것이죠.
제가 마리아 앤더슨이라는 미국 성악가에 대해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마리야 앤더슨은 흑인여성으로 최초로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한 세기적인 성악가입니다.
6.25전쟁 때 참전한 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나라에도 온 적이 있죠.
그 때 전쟁에 지친 피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음향시설도 없는 운동장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세계적인 성악가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란 이유로 수모를 당한 일화들이 많습니다.
호텔투숙을 거부당하기도 하고 식당 출입을 못해 굶고 무대에 선 적도 있지만 스스로가 말하기를 이 모든 멸시를 견디고 정상에 설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 앤더슨은 말합니다.
어느날 큰 감동의 무대를 마치고 기립박수를 받은 뒤 기자가 인터뷰를 합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입니까?’
앤더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성악가로 인정을 받은 날 어머니께 달려가 이젠 더 이상 남의 집 빨래를 안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던 그 순간입니다.’
너무 충격적인 겸손 아닙니까?
흑인으로 멸시를 당할 때나 영광의 순간이나 앤더슨에겐 똑같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라는 확고한 정체성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를 감출게 없이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이 모습이 성경적인 겸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잘 된 순간 우쭐될 이유도 없고, 안된다고 자기비하에 빠질 이유도 없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들의 겸손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만한 본성대로 계속 산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망칩니다.
본문 바로 앞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에다 무슨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교만한 마음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은 나쁜 평판을 돌려받습니다.
아무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좋은 것을 돌려주겠습니까?
교만한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내가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요즘 뉴스에서 가끔 보게 되는 김기0씨나 우병0씨 같은 사람을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하잖아요?
가족끼리도 그렇고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이건 부모자식간이건 상대가 교만하게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할 때 제일 상처를 받습니다.
어떻게 관계가 좋아지겠습니까?
하나님과도 사람들과도 자신을 낮추지 않는 한 관계는 망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불행이 들어오는 통로지만 겸손에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의 눈은 겸손한 자를 찾으셔서 그를 높여주십니다.
또 이 말씀을 반대로 하면 교만한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은 낮추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본성적인 교만을 잘 다스리며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힘쓰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겸손이 하나님 앞에서의 순복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겸손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정말 염려 안하고 살길 원하십니까?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염려는 우리의 벗입니다.
걱정 근심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염려하는 성격은 넘어지고 시험에 들기가 쉽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염려는 자기를 스스로 걱정하는 것이라 염려가 있으면 굉장히 예민해져 남에게 상처도 잘 받고 상처도 잘 줍니다.
염려가 습관이 되면 간이 콩알만해져서 작은 일에도 겁이 덜컥 납니다.
미래가 불안하기에 나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기에 염려하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나를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돌보겠어요?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내가 너희를 돌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수심에 쌓여있고 염려하며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계속 문제와 내 자신의 해결 능력만 계산하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다면 늘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염려를 벗어나려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염려가 생기면 문제를 즉시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하나님이 염려를 맡아주시고 우리에겐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최근에 이 말씀대로 깨달음을 얻고 많이 편안하게 지냅니다.
얼마 전에도 아는 분과 상담을 했는데, 이 분의 문제가 참 심란해서 자꾸 생각이 나고 저까지 마음이 무겁고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기도하며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또 근심만 해서 뭐하겠어요?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그렇게 심령을 누르던 먹구름이 말끔히 사라지더군요.
하나님께서 그 분께도 분명히 힘을 주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문제들은 당장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단지 마음의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깊이 고민하는 큰 문제들은 이미 우리 능력을 벗어난 일이기에 정말 결사적으로 기도하며 감당할 힘을 하나님께 받아야 합니다.
한 두 번 기도로 될 수 없기에 걱정이 엄습할 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평안 가운데 문제들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게 아니고 단지 마음에 걸리는 문제로 인한 우울감이나 염려도 즉시 기도하고 떨쳐버려야 합니다.
사소한 감정의 문제도 집요하게 마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탁 풀려질 때까지 짧게라도 몇 번이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생활로 바쁜 성도님들께는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잠깐 하나님을 떠올리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몇 주 이렇게 집중해서 하고 있는데 정말 확실하게 근심이 줄어듭니다.
또 염려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기도하게 되니까 거의 종일 하나님과 교감이 이뤄지는 면도 좋습니다.
이 말씀대로 잘 순종하셔서 저처럼 근심을 털고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사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편지에 가장 마지막에 베드로사도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원수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인간에겐 공동의 적이 있는 데, 그가 바로 마귀, 사탄, 악한 영들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거듭나 영적인 상태가 되어도 영적인 존재인 마귀에 대해서는 오감으로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그런 존재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괴한 마귀의 존재에 대해 성경에서만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십니다.
마귀의 기원에 대해, 마귀가 가진 권세와 힘에 대해, 그 힘으로 얼마나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지, 그리고 마지막에 가장 무거운 심판이 확정된 것에 대해.
그런데 이 마귀와 영적인 존재들이 단지 멀리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그를 대적하라 라고 하죠.
분명히 우리에게 접근하고 공격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라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불리한 것 아닙니까?
이 싸움이 불공평하고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은 아닙니다.
‘대적하라는 것’은 상대해서 이길만 하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분명히 오히려 우리가 더 유리하고 더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안에 우리가 안전히 보호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곧 우리에게 덧입혀졌고, 성령께서 우리를 안보하시기에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걸까요?
정신을 차리고 믿음으로 굳건하면 일차적으로 마귀의 공격을 무디게 하고, 마귀의 공격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병약한 동물이 맹수의 먹잇감이 되는 것처럼 위약한 믿음은 악의 세력들의 공격의지를 타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마귀의 일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방법은 간단하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뜻을 잘 알면 반대로 마귀가 하는 일도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충분히 밝혀주셨잖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 새로워진 양심에 걸리는 것, 이런 것을 예리하게 살펴 가려내고 거부하면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 중에 있으면 마귀를 대적한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진 것입니다.
마귀의 일이 대단히 신비스러운 영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게 아닙니다.
가룟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밀고해서 돈을 좀 챙겨야 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정을 내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를 대적하며 사는 게 그렇게 영적인 사람만 하는 수준놓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정신만 바짝차리면 됩니다.
개그프로그램을 보니 ‘정신 바짝 차리자’ 그런 코너가 있더군요.
연애하는 대도 그렇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는 데, 마귀에게 엮여 고생하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베드로사도는 경각심을 주잖아요?
근신하라, 깨어라, 믿음을 굳건하게 하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지 않으면 삼켜지지는 않았다 해도, 그 발톱에라도 상처를 입습니다.
대개 우리 주변의 악한 영들의 시험은 사람의 죄나 단점을 이용해 서로를 시험하고 할큅니다.
시험에 들었다면 원인제공자도 문제지만 대개 그 문제에 나도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큰 시련과 시험은 거듭되는 죄나 문제들을 서서히 엮어 마귀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작품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순간 뻥 터트리는 것이죠.
그렇기에 항상 정신을 차리고 매순간 마귀의 일을 대적해서 일이 커지지 않게 대처하고 우리 안팍의 악을 몰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끼어들어 주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을 막고 불행하게 하고 믿음의 삶을 망쳐보겠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 본문의 성도들처럼 국가나 단체 차원에서 조직적인 큰 박해와 고난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경건하게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어느 시대건 강도는 다르지만 항상 박해와 불이익이 따릅니다.
베드로사도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라
이 말씀은 단지 다른 사람도 고생하니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양각색의 고난을 받으며 마귀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견고한 진은 성도들의 믿음의 싸움을 통해 점점 무너져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12장11절에 보면 이렇게 밝힙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성도들이 박해 가운데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 게 아니라 이긴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순교로 마귀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힘입어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은 곧 마귀의 영토를 무너뜨리고 하나님나라를 확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를 악의 세력에게서 지켜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잠깐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이 땅의 천년도 밤의 한 경점 같다고 시편기자는 말했죠.
장차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삶을 생각해서 고난 중에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또 이 고난 중에 우리가 낙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댑니다.
그것은 이 고난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굳건하게 하고, 강하게 하여 거룩한 상속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모든 사람을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친히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지금 시험과 고난가운데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굳게 믿음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또 겸손으로 우리 인격을 잘 다듬고 염려를 주님께 맡기며 늘 평안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7년2월12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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