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5장7절-11절 (염려를 주께 맡기라)

남수연 2015. 8. 13. 23:19

작년에도 유엔이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덴마크가 또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 언론사 기자가 덴마크가 도대체 어떤 나라기에 행복지수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심층취재 했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백명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의 질문은 "요즘 걱정거리가 있다면 무엇인가요?"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의 답이 똑같았습니다.

"별로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답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듯이 애써 걱정거리를 찾다가 결국 별로 없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한 대학생의 답변이 이렇습니다.

글쎄요, 딱히 생각나는 걱정이 없군요.

등록금은 무료고 매달 120만원씩 학생생활비가 정부에서 나오니 돈 걱정은 안해봤습니다.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매달 3백만원씩 2년간 지원을 받으니 취업을 빨리 해야겠다는 부담감도 별로 없습니다.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있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하루도 크고 작은 염려를 벗어나기가 힘든 우리 현실과 비교하니 좀 허탈하죠?

덴마크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벌써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국가라는 덴마크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백명중 3명뿐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왜 염려할 일들이 생기는 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염려가 없는 곳엔 하나님이 계실 자리도 없는 것 같습니다.

덴마크국민들은 정말 걱정 근심없는 복지 국가를 만들었는데 문제는 구원받을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믿음은 있는 데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걱정 근심이 많은 믿음이 당연히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자면 시시각각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까?

힘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염려부터 해야죠.

다들 한 염려 하시죠?

걱정이 얼마나 우리에게 습관이 되었는지, 아무 걱정이 생각나지 않으면 걱정거리가 뭐 있었나 곰곰히 생각하는 내 자신을 보고 어이가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또 염려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그만 좀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염려하는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먼저 7절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염려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도 한 두개가 아니라 주께 맡겨야 할 정도로 많다는 것입니다.

죄로 가득한 인생이니 당연히 고난이 있고 염려가 있죠.

전도서 223절을 보면 인생의 고단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욥기141절에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우리 삶에 있는 염려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들이라는 것과 그런 중에도 염려에 빠져 살지 말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교훈인 줄 믿습니다.

우리처럼 걱정과 염려로 시달리는 당시의 성도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베드로사도는 제발 좀 다 주께 맡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얼마나 큰 축복이고 장래를 보장해 주시는 말씀입니까?

맡기면 돌봐주시겠다는 것이잖아요.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또 그날 염려만 하지 내일 것 까지 미리 앞 당겨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예수님 말씀대로 오늘 일만 염려해도 우리 심정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염려를 다 주께 맡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도 이따가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 한 구석에 찔러 둔 염려가 있지 않습니까?

1. 우리가 여전히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문제를 맡아주실 것 같지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한마디로 만해 문제를 맡길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문제들은 다 현실적인 것들이고 당장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것들인 데 과연 하나님께 내 문제를 다 맡기고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엔 우리에게 의심이 너무 많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눈에 보이기까지는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게 연약한 우리 믿음입니다.

어쩌면 천국에 들어갈 때 까지 이렇게 의심하면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의심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의심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는 불안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염려를 잘 맡기려면 하나님을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정도 믿는 것만 해도 기적이고 은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적으로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내 삶을 편안히 맡기고 돌보심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죽음 앞에서 한 치의 의심없이 내 영혼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지 이해하기도, 표현하기도 사실 애매합니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게 인격이 전혀 없는 목석 우상 앞에 대면하듯 막혀있으면 안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신내린 무당이 귀신과 교제하듯 오감으로 느끼며 믿으려하는 것도 절대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만유의 주인이신 창조주하나님을 그렇게 육신으로 교제할 만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한다는 말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내 안 어딘가에 있는 영적인 감각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동안의 일반적인 경험과는 다르고 불확실하면서도 또 너무나 확실히 하나님의 실체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하나님과 교제가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인격적인 교제 안에 믿음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성이 없이는 염려를 주께 맡긴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합니다.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는 좀 근심에서 벗어나는 듯하나 시간이 지나면 내 기본 실력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염려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죠.

베드로사도가 오늘 당당하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그만큼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목격했고 직접 만졌고 그 인격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확신을 갖고 이 말씀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시절, 제자들이 사역을 위해 걱정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고 예수님이 앞장서신 뒤를 따라만 가면 되었습니다.

오죽 걱정거리가 없었으면 늘 주님 뒤에 뒤쳐져서 서로 누가 더 크냐고 말다툼이나 하며 따라다녔겠습니까?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낚시를 던져 물고기의 입에서 꺼낸 동전으로 세금까지 내주시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35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낸 뒤 돌아온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시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제자들의 사역에도 부족한 것이 없이 다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여전히 돌보신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하기에 베드로사도는 성도들에게 오늘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오르셔서 완전한 영광에 들어가신 지금 얼마나 더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이것이 당시 제자들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하나님아버지께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께서 제자들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마음에 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형편을 살피셔서 돌봐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염려를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일상을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아버지를 체험해 갈 때 점점 더 우리 염려를 맡길 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이관0 목사님이라고 있습니다.

옛날에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회계학 석사를 받았으니 머리가 좋은 분이시죠.

졸업 후에 하와이에 있는 직장을 구해 떠났는 데 일이 잘못되서 일초도 근무하지 못하고 2년동안을 온갖 고생을 하며 가족들과 떠돌게 되었습니다.

다시 LA로 돌아가야 살 것 같은 데 그 때 네식구 비행기표 값이 없는 것예요.

그 때 돈으로 백만원이 좀 넘는 금액인 데 이목사님 형편으론 그 돈을 마련한다는 게 완전 불가능한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하나님께 기도하길 하나님, 저 교통사고 한번만 나게 하셔서 이 돈 좀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돈이 생길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옮겨달라는 주인의 말에 짐을 싣고 이사를 하는 데 뒤에서 음주운전 차가 추돌을 한 것입니다.

그 때 보상금을 받은 액수가 135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LA로 돌아와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돈 필요하다고 이런 기도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인도하시는 걸 보면 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해서 똑같이 우리 수준에 맞춰 일하시는 게 재미있으신가봅니다.

우리 청년들이 꼭 성빈이 수준에 맞춰 놀아주며 더 신나하는 것처럼요.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생필품이 떨어지는 것을 아시고, 먹고 싶은 게 뭔지를 아시며 우리와 똑같은 것을 느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아시고 모든 형편을 살피시는 주님께 크고 작은 모든 염려들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 말씀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염려는 하나님과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도, 누구의 도움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 맡겨야 하고 주님의 돌보시는 은혜를 입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염려하는 마음을 붙잡아 주님께 맡기고 편안한 가운데 문제를 인도받는 훈련을 해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2. 또 우리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까봐서 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문제나 내 장래의 일이나 지금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가진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세상적인 기준으로 일의 성공을 정해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가 꼭 내 생각대로 되야만 한다는 완강함이 염려를 주님께 맡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맡겼다간 내 소원대로 안되 낭패를 당할까봐 내가 꽉 붙잡고 염려하며 풀어가려는 것입니다.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꼭 문제가 내가 생각한대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고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는 것은 내 소원대로 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내 소원이 당연히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하나님의 생각이 똑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지난 날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 때 내가 기도한 대로 됐으면 큰 일 날 뻔한 사건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또 여전히 내 소원대로 되지 않아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뤄졌다고 지금보다 더 나았으리라는 보장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게 안된 결과로 지금 내 삶이 그다지 불행하게 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더 훗날에 가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결과들을 알면서도 우리가 염려를 맡기지 못하는 것은 혹시 당장 불편과 고통이 있을까 과정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법칙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하신 원칙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흘려야 할 모든 것을 다 흘릴 각오를 한다면 염려로 낙담되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절대 죽을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문제들은 진로나 건강이나 돈 문제처럼 다 가벼운 문제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내 인생이 시시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도행전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돈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다른 능력으로 더 큰 일도 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염려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승리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승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 조지 뮬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종말이요, 참된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종말이다'고 했습니다.

걱정이 들 때 마다 이런 원칙들을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기도하고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하심을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3. 또 우리가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 죄의 본성이 염려하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근심에 가득한 자기 인생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사랑에 빠져 듭니다.

걱정도 자기애의 한 종류입니다.

인간의 자기사랑은 정말 끈질기고 교묘하고 위장술이 뛰어납니다.

걱정, 근심, 염려는 죄의 속성이기에 이제는 염려하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냥 풀이 죽어있고, 좀 비탄에 잠겨있는 것이 뭐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만간에 염려는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무기력에 빠지게 만들 것입니다.

염려가 짧은 시간에도 완벽하게 우리를 낙망시키기에 이 방법으로 공격하는 대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염려의 문제 뒤에 이어서 마귀에 대해 언급합니다.

염려의 뒤에는 마귀의 활동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염려와 마귀와 고난이라는 삼각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베드로사도의 편지를 받을 성도들은 마귀의 공격으로 고난 중에 있고 그로 인해 염려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것입니다.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 말씀의 근거 역시 다 베드로사도의 경험을 토대로 나온 것 아닙니까?

기도해야 할 때 잠들어 있고, 믿음에 굳게 서지 못했을 때 마귀의 큰 시험에 들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우리는 마귀와 고난의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마귀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베일에 쌓여있는 귀신들의 정체가 환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수많은 귀신들을 들춰내고 쫒아내시며 정체를 밝히신 것은 지금도 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욥기에서도 사람을 시험하는 마귀의 방식이 잘 나옵니다.

태풍을 일으켜 집을 무너뜨리죠.

자연재난의 배후에도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마귀의 사악한 역사가 있습니다.

또 도적들을 불러다 재산을 다 약탈하고 심지어 자식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욥의 몸에 중한 피부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아내의 마음을 격동시켜 욥을 낙심하게 하고 가정이 깨지게 한 것도 마귀의 짓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도 보이지 않는 귀신들이 이런 방식으로 함정을 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지 않고 영적으로 흐릿한 상태로는 매일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참았어야 할 말을 충동적으로 시원하게 내뱉고 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죠.

사도행전에 보면 사탄은 바울일행의 선교여정을 가로막습니다.

환경을 통해서도 역사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고 환경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마귀의 잔인한 인격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표현합니다.

사탄이야 말로 일말의 긍휼과 자비도 없는 사악한 인격체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사탄의 공격으로 걸려 넘어지고 믿음에 파선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자신이 바로 사탄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실족했던 사람입니다.

영적 졸음 상태에 있으면 모든 상황에 마귀의 소원대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어서 믿음에 굳건히 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칼빈은 믿음이 굳건하면 마귀의 공격 열기를 식힌다고 말했습니다.

강한 적수에게는 구미가 당기지 않게 마련이죠.

항상 공격을 받고 마귀의 잔 펀치에도 넘어지고 시험을 당하는 경우는 믿음이 연약하고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데 어떻게 대적을 하겠습니까?

우선 마귀의 사악한 특성이 일어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사이에서 일하기에 우리가 대면하는 사람들과 내 태도를 통해 악독한 인격을 드러냅니다.

보통 때 그 사람이나 내가 아닌 행동을 하고 말을 주고 받을 때 이상을 감지해야 합니다.

계속가면 큰 불란이 일어납니다.

마귀의 일을 분별하는 방법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영을 말합니다.

또 마귀의 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의심케 합니다.

사람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해와 무시, 교만, 난폭한 행동들을 선동하고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내 마음과 내 주변에서 거짓과 위선의 분위기가 느껴지면 귀신의 개입을 의심해야 합니다.

또 환경적으로 너무 복잡하고 심란하게 꼬이고 곤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도 내 가까이서 부지런히 활동하는 마귀의 일을 의심해야 합니다.

사악한 마귀의 역사가 이렇게 분별이 되면 우리 의지를 다해 믿음을 발휘하고 이런 상태를 중지하고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일을 따르지 않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동조하면 마귀의 덫에 빠져 그 결과의 참담함과 고통스런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몰랐기에 당하지 않아도 될 많은 고통과 수모를 당하고 염려할 상황에 빠지는 게 마귀의 덫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면 우리 주변에서 멀리 물러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과 염려할 문제들에 대해 베드로사도의 말씀이 우리를 용기있게 합니다.

마귀로 인한 고난이든 우리의 잘못된 삶의 결과나 선택으로 인한 고난이든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선을 도출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들인지를 확인시켜주십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신 이가,

이미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고난의 시기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당하는 유익입니다.

온전하게, 굳건하게, 강하게, 견고하게.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건강한 내가 있기 위해 우리가 몸을 단련했듯이 영적인 근육이 강해지기 위해 우리를 단련하는 도구는 역시 고난만한 것이 없습니다.

고난이라는 훈련을 통해 맷집이 생기고 세상과 하나님나라를 보는 큰 안목과 인격적으로 쓸만한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죠.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염려라는 감정에 빠지지 않고 고난을 뚫어지게 직시한다면 그것을 통해 이어지는 축복의 길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은 대로 순종하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굳세게 주님의 선하신 인도를 신뢰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4년4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