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을 보려면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좀 더 행복한 가정이 되라고 5월엔 지정 된 기념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5월 가정의 달에 가정들이 다 행복할까요?
홍수에 마실 물이 없듯이 가정의 달에 없는 행복만 더 실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5월21일은 부부의 날이었죠.
누군가 말하기를 부부의 날이 아니라 부부싸움의 날이라고 하더군요.
부부싸움 할 때 제일 화나게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정보회사에서 부부싸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 본 결과 1위는 ‘됐어, 말을 말자’ 였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렇게 대화가 안되고 오래 동안 서서히 틀어진 부부관계는 어느 순간 ‘잘해 보자’라고 돌아서지지 않습니다.
이런 행복하지 않은 부부 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자녀들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해 험난한 세상을 같이 헤쳐가고, 좋은 것들을 같이 누리며 행복하라고 가정을 주셨는 데.
가정이야말로 총체적인 난관들이 가득찬 고뇌의 장소가 된 것 같습니다.
인생의 모든 곤란한 문제들이 가정에서 부터 시작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가정은 다시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일까요?
가정의 달과 부부주일에 이 가시 박힌 우리들의 둥지에 해법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베드로서가 기록된 연대를 주후6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네로황제의 박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던 상황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곳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신자들에게 보낸 베드로사도의 편지입니다.
편지에는 성도들이 받을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고난 중에 인내하라는 격려가 간절하고도 따뜻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사도가 주는 각별한 당부는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잘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 중에 망가지지 말고 오히려 도도하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가장 고상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유지하라고 하십니다.
현실이 힘들다고 자녀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어느 부모가 보고 싶겠습니까?
힘들 때 굳건히 견뎌주는 자녀라면 부모에게 큰 기쁨이 되겠죠.
다들 잘 견뎌내시길 축복드립니다.
어느 시대건 지켜야 할 성도들의 윤리적인 행동에 대해 본서는 기록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성도들이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적어도 두 가지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성경에서 요구하는 삶을 살만한 믿음이 내게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렇게 물렁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선보다 악에 더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대로 산다는 건 간도 쓸개도 없이 살아가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데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지키는 게 힘들다, 그렇게 까지 나를 숙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대인관계에서 좋은 결실이 없고 영적 인격의 성숙도 없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육의 쓴 열매를 맺고 말씀을 따라 살면 선한 열매를 따는 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과거와 다른 천국의 삶을 맛보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천국 백성의 법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그 나라의 법을 지킬 때 우리 안에 강력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는 삶에 부족함을 느끼고, 더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오늘도 말씀을 잘 듣고 행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8절 말씀은 대체적으로 가족들과 신앙공동체 안에서 행할 일입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본성은 차갑고 이기적이라 남을 동정하고 사랑하라는 이런 말씀은 지켜내기가 힘듭니다.
기도응답 받으러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고 주차장에서 차량봉사 하는 것이 차라리 사람들에겐 더 쉽습니다.
이 8절 말씀은 우리에게 그게 잘 안되니까 다시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다 이렇게 동정과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만큼 불쌍한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제각각 잘났다고 사는 것을 보면 그리 불쌍한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은데 주님 눈에는 그 속에 있는 흉터와 아직도 낫지 않은 상처들이 보입니다.
또 너만 그러라는 게 아니라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서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그 불쌍한 인생들 중에 나도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나도 사랑받고, 동정 받고 긍휼히 여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누가 등을 토닥이며 .고생이 많지?. 하면 울컥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누구나 왠지 모를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얼마나 잘 표현합니까?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우리가 아무리 구원의 소망이 있다지만 현세의 모든 인생에는 눈물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서로가 다독이며 잘 챙겨주며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죄짐을 지고 악에 물든 세상에서 다들 힘들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내를 들여다보면 참 애처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곁에 사는 가족들도 순간순간 참 안됐다는 마음이 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자 부모를 못 만나 원하는 대로 미래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당장 사고 싶은 거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하고 이것저것 고민하는 자식들 볼 때 미안한 마음도 들며 짠해 집니다.
날이 새면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학교로 직장으로 나가는 가족들의 얼굴을 볼 때도 항상 마음이 편치않죠.
그러면서도 작은 허물을 감싸주지 못하고 모진 말로 상처를 주고 그런게 우리 모습입니다.
내가 힘들고 마음이 고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대박해로 불안하고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도 베드로사도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참 신기한 게 위로가 필요할 만큼 지쳤을 때도 상대가 더 불쌍하게 느껴지면 내 처지가 낫다 생각하며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울감에 빠질 땐 재래시장에 한번 나가보라지 않습니까?
몸에서 땀내를 풍기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삶의 의미 어쩌고 하는 내 우울감이 호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지금 네팔도 그렇지만, 전에 아이티에 강진이 났을 때 취재원이 현장에서 일주일간 촬영한 생생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참혹한 광경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게 잘 안 믿어지고 꼭 영화 같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사방이 다 불에 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모든 게 폭삭 주저앉아 형체도 없이 돌무더기가 되었더군요.
당시 20만명이 죽었다죠.
살아있는 사람들이 시내에 벌떼 같이 몰려 아직 다 무너지지 않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뭐라도 건지려고 필사적으로 뒤지는 데, 그건 차마 약탈이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리포터가 소개하다 울더군요.
삶의 의미가 다 무엇인지, 과연 이 곳에서 무언가를 소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런 사실을 보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조금 전 까지 좁고 낡고 없는 게 많다고 불만스러웠던 내 집이 얼마나 호사스럽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내가 당하는 불편과 부족함이 약과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유엔식량기구에 따르면 지구상에 8억4천만명이 기아인구라고 합니다.
지구상에 아홉명 중의 한명은 하루 한끼의 양식을 해결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년 2천만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우리가 위안을 받을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누리는 것이 하찮은 것들이 아님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거기에 ARS도 누르고 후원금도 보내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고, 감정을 내세우며 대립했던 내가 좀 머슥해지죠.
우리가 내 자신의 아픔과 내 문제에만 골몰해 있다고 빨리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나만 바라보면 생기는 병이 우울증입니다.
타인의 처지에 마음을 열고 동정심을 갖고 긍휼한 마음이 생기면 오히려 내 고통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박해, 모든 것을 뺏기는 것은 물론이고, 순교의 결단 앞에 서야 할 성도들을 향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로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형제들이 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시련을 뚫고 나가길 축복드립니다.
또 이렇게 가족과 성도들을 대할 때, 은혜를 베푸는 자의 입장에서 무시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거만한 사람의 동정과 긍휼은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상처를 줍니다.
친한 사람들끼리도, 특히 식구들끼리도 겸손하지 않으면 금새 빈정 상합니다.
인간의 교만은 내면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상황만 되면 즉시 고개를 듭니다.
교만이야말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는 가장 본질적인 죄입니다.
교만은 자기보다 더 높이 자기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번번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니까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범죄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없는 나를 파악하고 주님 앞에 그런 나를 인정하고 매일 용서를 구하는 사람만이 점점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좀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서는 열심히 아니라 겸손이 성숙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겸손에 함정이 있습니다.
남보다 더 겸손하게 보여 내 신앙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교만이, 꾸며진 겸손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노력해서 얻는 겸손만큼 위험하고 치명적인 교만은 없습니다.
겸손은 절대로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내 눈에 남이 좀 못나고 우습게 보일 때, 재빨리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모순되고, 위선되고, 한심한 죄인인지를 파악하고 내 자리를 지키는 게 그게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가족들에게서 인정받아야 진짜입니다.
애정 어린 마음과 겸손과 따뜻한 동정심이 우리 인격에 잘 형성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다 함께 노력해야 할 줄 믿습니다.
내 비인격적인 모습을 봐주는 데는 가족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게 쌓이면 속으로 무시하고, 나중엔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가족이라도 못된 내 성격을 마음 놓고 발산하면 상대에게 상처가 되고, 그게 깊어지면 부부간은 물론이고 부모 자식 간에도 결국 금이 갑니다.
내 가족들이 나를 존경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밖에서 받는 모든 찬사와 수식어가 다 위선이라는 증거입니다.
가정의 달, 부부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가족들에게 우리의 인격을 인정받도록 오늘 말씀대로 잘 지키며 주님 앞에서 함께 노력하길 원합니다.
다음 9절은 좀 더 넓은 관계인 세상도 포함되는 말씀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우리가 관계 하는 사람들이 때로 우리에게 악하게 대하고 욕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남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가족이나 형제나 교회의 성도들도 그들의 죄성으로 인해 그런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내 뜻을 곡해하고, 있지도 않은 말로 모함하고, 뒤통수를 치고, 나를 이용해 먹고, 정말 세상은 가지가지로 나를 욕되게 합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당장 잘잘못을 따져 상대가 빌도록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되려 그들을 위해 복을 빌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복을 유업으로 받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은 정말 수지맞은 엄청난 복이기에 복 받지 못한 그들을 위해 너그럽게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악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앞장서 응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일관 된 가르침은 우리가 할 일은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값진 원리가 있습니다.
복을 빌어주라는 말씀은 우리가 복을 빌어주는 것에 분명히 어떤 효과가 보장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너무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빌어야 할 가장 본질적인 복은 물론 그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빌어준 복은 반드시 그에게 효력을 발휘하거나 아니면 내게 돌아옵니다.
속으로 저주하고 욕하지 말고 복을 비십시오.
많이 복을 빌어줄수록 내게 돌아오는 게 더 많다고 해석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고 복을 빌어줄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누구보다 복이 필요한 우리 가족들을 위해 매일 축복하며 기도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거기에 이어서 주시는 말씀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샘에서 쓴 물과 단 물이 동시에 나올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말을 하고 돌아서 사람들에게 악하고 거짓된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쓴 물이 계속 나온다면 그건 샘이 나쁘다는 뜻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심령에 정말 성령께서 주신 생수의 근원이 있다면 좋은 말들을 길어 내길 원합니다.
우리 본성에 악을 펌프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서 악한 말, 거짓된 말을 길어낸다면 우리가 먼저 그 말로 더러워지고, 상대방에게 독을 먹이게 됩니다.
독설적이고 가시돋친 말은 하고 나면 반드시 우리가 상대에게 채무자 같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분명히 상대가 잘못했는 데도 말 함부로 하면 어쨌든 그걸로 인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의 평안이 사라질 뿐 아니라, 상대에게 왠지 빚진 마음이 듭니다.
특히 가족들을 무시하는 말을 내뱉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의 경우, 한 쪽이 무슨 얘기를 하면 상담사 앞에서도 화를 버럭 내며 ‘쓰잘떼기 없는 소리’ 말라며 대화를 끊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으러 올 지경이 된 것이죠.
또 가족끼리 걱정에 쌓여 주고 받는 부정적인 말로 서로를 낙담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욕하고 헐뜯는 말만 나쁘고 악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신뢰하지 않는 부정적인 말도 악한 말입니다.
걱정스런 말보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의 말을 길어내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달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성과 세상과의 얽히고섥힌 끈들도 인해 우리 가정엔 여전히 안식이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각장애인 하모니커연주자인 전제덕씨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수식어가 장애를 극복한 연주자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 고통스럽고 불편한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냐고 반문합니다.
바꿀 수 없고, 되돌릴 수 없으니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산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식구들이 때로 가시같이 우리를 찌르지만 껴안고 가야 할 부분들입니다.
신학자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해가는 길은 알지 못해도 고난을 헤쳐가는 길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메마르고 결핍되어 가는 우리 가정에 영양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미래가 더 행복하길 바라며 현재의 고생을 견뎌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가진 것을 감사하며 누리라고 하십니다.
지금 안정이 되지 않았고, 바라던 상황이 아니고, 심지어 괴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해도, 이런 날들도 다 우리의 인생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주어진 것들을 만족하게 여기고 실패와 고난도 내 것으로 인정하고 이 모든 게 다 내 삶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복수가 차고 숨이 답답해 밤에 때로 앉아서 주무시기도 하셨는데, 그래도 조금 더 살고 싶어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건강하고, 사지 움직여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현재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누리지 못한다면 내일도 모레도 좀 더 나은 무언가를 바라기만 하며 계속 불만족한 평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어차피 여기 살아가는 동안 이정도가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길 원합니다.
정말 마지막 때는 믿음의 가족들이 한 마음으로 챙겨주고, 시험당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관건이 될 것입니다.
오늘 아일랜드에서 동성결혼이 국민투표에 의해 합법화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상상도 못한 이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차리고 깨어 함께 믿음에 올바르게 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의 본질을 알고 잘 지켜내야 합니다.
또 우리를 악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야 될 이유를 오늘 나누었습니다.
그걸 지킬 때 지키면 복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유를 경험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진지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원하며 그렇게 살 때, 마지막 12절에 말씀하신대로 의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들을 하나하나 선하게 응답하여 주실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2015년5월24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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