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28일을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다미선교회 앞에는 200여명의 취재진들이 모였습니다.
대문 밖에는 멀티텔레비젼으로 안에서 일어나는 예배 모습이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12시가 되면 1000여명의 교인들은 순식간에 현장에서 사라져버려야 했습니다.
취재진들은 뒤숭숭하면서도 극적이고 묘한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정각 12시가 되자 예배당 안은 찬송도 기도소리도 없이 정적이 흘렀습니다.
한 기자가 예배당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휴거됐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침을 삼켰습니다.
그러자 유리창 문이 빼곡 열리며 흰 휴거복을 입은 한 중학생이 고개를 내밀고 말했습니다.
휴거요? 휴거 된 사람 없어요. 난 원래 안 믿었어요
순간 밖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맥이 쭈욱 빠진 취재진들은 서로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한 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 다미선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치명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막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설교가 교회 안에서도 희귀해졌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설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병고침 받고 축복 받고 위로 받는 설교일 것 같죠?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설교는 내세, 죽음 이후에 관한 설교라고 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 이 세상에 잘 먹고 잘사는 문제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갈증인 내가 누구이고 어디로 가며 어떻게 될 것인가를 모르면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종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나 봅니다.
세기가 바뀌면 어김없이 종말론이 고개를 듭니다.
물론 모든 것이 불발로 끝나버렸죠.
지금은 온 세계가 2012년을 주목합니다.
2012년 종말론이 요즘 대세입니다.
신비한 TV서프라이즈에서 2012년 종말론이 나오게 된 배경을 소상하게 방영하였습니다.
먼저 3600년 주기로 공전하는 행성 '니비루'가 긴 타원형으로 지구에 충돌하는 해가 2012년이 될 거라는 관측입니다.
또 천문학에 능했던 고대 마야인의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에 끝나버렸다고 소개했습니다.
케네디의 암살과 히틀러의 출현과 히로시마 원폭을 예언했던 세기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잘못 해석해 1999년이라 알려졌으나 본래 2012년 종말을 예언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 미국에서는 지구 종말론 공포로 인해 심각한 사회문제까지 야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 종말에 대비하기 위한 각종 콘퍼런스와 행사가 열리는가 하면 휴대용 식수정화기 등이 불티나게 팔리며 '2012 현상'이란 신조어까지 생겼습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는 지구 종말 여부를 묻는 청소년들의 e메일이 수천 통이나 쏟아지고 있으며, 그 중에는 지구 종말이 오기 전에 자살하겠다는 내용도 상당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이용해 발빠르게 2012년이라는 세계종말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불발로 끝날게 뻔한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성경의 종말론이죠.
예수님의 수제자, 사도 중의 사도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믿어도 좋습니다.
본 성경의 기록목적은 3장2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확신시키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님의 날, 심판의 날에 대해 확신시키기 위해 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재림 하실 것과 그 날은 곧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직접 받은 1세대 사도들은 거의 죽었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점점 심해져갔습니다.
곧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사람들 사이에 의심이 일었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조롱하는 분위기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확실한 재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일깨우기 위해 이 편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한 주님의 따뜻한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심판과 종말은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아닙니다.
협박도 아닙니다.
본문 3장에서만 사랑하는 자들아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도 메시지 중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먼저 제자들에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시킵니다.
우리가 재림을 고대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도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도 재림을 대기하고 있는 이 하루가 마치 천년 같이 길게 느껴지는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어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멀리 떨어뜨려 본 경험이 있는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히 자녀를 그리워하는지.
하루를 기다리는 것이 마치 천년 같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기다림,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속히 행복한 영생을 누리게 하고 싶은 아버지의 기다림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이 한 가지를 반드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너희가 생각하는 것 처럼 너희를 잊은 것도, 버려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박해를 받으며 주님을 믿었는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서신이 쓰여진 시기가 네로황제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미라드츠기가 그린 네로의 횃불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네로 황제가 자기의 궁전 정원에 세워둔 말뚝에 기독교인을 매달아 태우고 그것으로 횃불삼아 정원을 밝히고 있는 끔찍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얼른 재림하셔서 고난 받는 제자들을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데려가는 것이 당연한 주님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기다리는 주님의 마음이 하루가 천년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승천 이후 2천년에 이르도록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베드로 사도가 밝히고 있듯이 주님에게 있는 또 하나의 간절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긍휼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며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마음을 알고 있는 사도 베드로는 이 한 가지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들이 있기에 하나님 아버지는 문을 닫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0장16절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를 9절에서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목마른 분이 아닙니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아시죠?
그 작품은 미술관 현관문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지옥의 문이라 불리는 이 현관 문엔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무시무시하게 부조로 제작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 윗부분에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전체 분위기와 사뭇 다른 이 생뚱맞은 분위기의 조각을 통해 로댕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인간이여,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것은 지옥의 심판을 바라보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심판에 대한 창조주의 고뇌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섣부른 심판을 할 순 없습니다.
한낮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심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사망 판결을 받은 자입니다.
요한복음5장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즉 인류는 이미 심판을 받았고 사망에 놓여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소망이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거룩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미국세계선교센터의 자료를 보면 세계 인구 중 단지 1%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1430년이 걸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후 서기 1430년이 되어서야 전 세계인구의 1%가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천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27년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수님을 믿은지 26년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1년 전에 재림하셨다면 우리 호서래 성도님은 구원받지 못하셨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무한대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10절에 보면 반드시 주의 날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반드시 종말과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판과 인류의 종말에 대해 셀 수 없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신자건 불신자건 이 지구에 종말이 올 것 같은 막연하고 불안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불안한 상황이 벌어지면 곧 지구종말과 연결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의 종말론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10절에서 그 날은 도둑같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종말의 날을 예언하는 각종 사이비시한부 종말론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3절에도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어느 날 갑자기 주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 같은 것으로 인한 지구의 파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이 모든 물질을 창조하셨듯이 이제 이 모든 물질은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14에도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간다고 되어있습니다.
지구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있던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말씀합니다.
다니엘 7장 10에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을 예언한 것입니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계 20장12절에도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그런데 이 심판대에는 믿지 않는 사람만 서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씀은 성경에 무수히 많습니다.
로마서 14장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어 구원을 얻지만 성경은 우리도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다고 증언합니다.
가수 심수봉씨를 아실 것입니다.
000씨는 3살 때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며 따뜻한 가정을 갖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 분의 일생이 평범치 않게 전개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현장에 있었던 충격에다 가수 활동도 정지당하게 됩니다.
000씨는 그것이 자기의 업이고 운명이라 생각하며 불교에 심취했습니다.
불교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드는 것을 각이라고 하는 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그 경지에 들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것도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질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두 달을 함께 지내며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 언니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신자로 살던 그녀를 정신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누구나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를 닦아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은 노래가 백만송이 장미라는 곡입니다.
애잔한 멜로디에 어울리지 않게 미켈란젤로의 그림 최후의 심판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붙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의 날이 반드시 오고 우리가 모두 다 주님 앞에 설 것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는 본문 11절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세상과 구별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미혹케 하는 마귀의 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의 문화는 많은 부분 사탄에 의해 조직적으로 장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마귀적인지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분별해서 거룩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내면의 죄를 이기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5장에 우리가 버려야 할 일들이 분명히 나타나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에서 우리 자신을 자꾸 구별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며 모든 것을 끊고 살 수는 없으나 성령의 지혜로 판단하면 절대로 따라서는 안될 현저한 마귀의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계속하다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 마귀의 유혹과 음모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최근 교계가 목사들의 성추행 사건으로 시끄럽습니다.
누구도 간교한 사탄의 궤계에서 완벽하게 자신을 방어하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뢰가 깨지고 불행이 깃들면 회복하기가 힘든 것이 가정입니다.
이길 수 있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야함을 날마다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위해 성령 안에서 기도로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는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길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라 합니다.
주님의 날이 임할 것을 믿으시죠?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단지 이 땅을 위해서 다 쓰지 않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이 땅의 것은 반드시 소멸되고 사라질 것이며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날 선지자 이사야가 바벨론 제국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곳에 거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들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않을 것이다.
목자들도 그곳에 그 양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요즘 말로 하자면 잠실이 다 파괴되고 다시 뽕나무 밭이 될 거라니 누가 믿었겠습니까?
대제국 바벨론의 영광을 볼 때 가당치도 않은 예언이었습니다.
독일 고고학자인 콜데바이교수 팀이 우연히 지하에 폐허가 되어 파묻혀 있는 고대 바벨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렇게 영화롭던 바벨론이 이사야의 예언대로 파멸되어 사라진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인간의 이 화려한 문명이 반드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예언합니다.
이 땅을 바라보던 눈을 이제는 돌리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우리가 거할 천국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며 간절히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 곳에서 좀 덜 가졌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내세를 준비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과연 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위해 심고 가꾸는 지혜를 성령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셋째는 14절에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점도 없고 흠도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원문을 직역하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주 앞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깨끗하고 환한 곳에 들어가면 내 누추한 옷이나 더러운 신발이 순간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주님 앞에서 살 때 우리의 점과 흠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더 경건하고 거룩해 지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죠.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우리 예수님 앞에서 날마다 살아갈 때 우리 또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우리가 주의 날을 평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3장1절에 말세는 모든 사람이 고통당하는 때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3장 8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평강가운데서 주님의 날을 맞으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21장 28절에 보면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날은 우리가 온전히 구원받을 날인 줄 믿습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종말이 거론되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불안으로 뒤숭숭해질 때에도 우리는 주의 날이 가까운 줄 알고 머리를 들어 주님의 재림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날을 알고 있고 대비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상상치도 못한 환희와 희열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놀라움과 기쁨과 안도의 한숨으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입니다.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우리 주님을 눈으로 볼 때 가슴이 벅차 정신을 잃을 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소리내어 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기쁨을 함께 누리며 우리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내려 놓을 것입니다.
평안 가운데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날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인류의 종말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성경에 기록 된 예언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니느웨가 멸망당했고
바벨론도 앗수르도 다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었습니다.
단 한 줄로 예언 된 말씀 까지도 다 이루어졌습니다.
인류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예언은 성경에 1518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구의 종말의 날이 설령 우리 세대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30,40년 안에 다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이 얼마나 더 빨리 불현 듯 임할런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선생님은 사고로 순식간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늦은 밤 한적한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파란 불로 바뀌자 남편이 도로에발을 내딛는 순간 멈추지 않고 달려오던 덤프트럭이 순식간에 남편을 밀고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입니까?
눈 앞에서 방금 있던 남편을 그렇게 잃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집사님은 간암 판정을 받고 삼 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분이셨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게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멸망의 심판을 면제받은 사람들입니다.
시편 9장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라고 기록 된 것 같이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행위가 감출 수 없이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의 수고와 봉사도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가련한 자에게 내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 참 고맙다. 참 잘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칭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우리의 불충하고 이기적인 이 땅에서의 모습이 드러날 때 아무말 않하셔도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혼돈되고 분주한 이 세상,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기에 우리는 날마다 지치고 고단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종말신앙으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부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는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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