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새해 믿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리라 마음에 결심했는데 어떠셨습니까?
혹시 작심삼일이 되셨나요?
사람들이 새해에는 꼭 지켜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한 두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삼일 안에 흐지부지 되버리죠.
왜 지키면 자기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인지 알면서도 못지키는 것일까요?
대개 불가능한 것을 결심한 건 아니잖아요?
학자들이 여기에 대해 다양하게 연구들을 했더군요.
사람이 무슨 일을 억지로 작정하면 스트레스가 되고, 스트레스를 방어하는 호르몬이 나와서 이겨내는 데 사흘이 지나면 호르몬의 약발이 떨어진답니다.
그러니 지켜야 된다는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작심삼일이 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주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감동을 받고 다시 결심하면 또 3일은 가지 않겠습니까?
매 주 3일 정도만이라도 배운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면 꽤 신앙의 훈련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또 그럴듯한 재미있는 실험을 영국의 한 대학에서 했습니다.
연구진들이 피실험자들에게 만나본 적이 없는 연예인의 이름을 대고 떠올려 보라고 할 때와 10년 뒤의 나를 떠올려보라고 할 때 뇌가 활성화되는 위치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미래의 나’를 ‘남’처럼 생각한다는 황당한 사실입니다.
인간이 이정도면 엄청 미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에 있어서도 ‘다음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될 나’는 남같이 여길 수가 있겠더군요.
우리의 체질이 이러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매일 구하지 않으면 먼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현재를 산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죠.
오늘은 베드로사도가 보내온 편지를 보며 다시한번 우리가 믿고 있는 영생을 확신하며 현재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과 같은 이런 서신서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베드로사도의 편지가 이천년전 소아시아의 한 작은 교회에 도착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베드로사도의 편지를 인편으로 받은 목사님은 너무나 기뻐서 서둘러 모든 성도들을 교회에 모았습니다.
‘성도여러분, 로마에 있는 베드로사도님이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사도의 편지를 개봉해서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갑니다.
시름에 잠겨있던 성도들은 가끔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감동을 받고 아멘이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낭독이 끝나면 잘 듣지 못했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목사님께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런 부분들을 설명해 주고, 모든 성도들은 베드로의 편지로 다시 믿음을 강화하고 소망이 충만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 편지를 잘 베껴 놓고 인근에 있는 갑바도기아 교회로 보냅니다.
이 분위기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성경은 당시의 이런 분위기를 잘 이해해야 바르게 그 뜻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편지가 이천년 동안 보존되어 오늘 우리 손에 들려있는 것은 정말 각별한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그들에게와 똑같이 말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에 관심이 없지만 하나님은 이런 얘기를 오늘 꼭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서 침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큰 오해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은 즉시 말씀하십니다.
오늘 편지를 받은 이천년 전 작은 교회 성도들이나 주는나의산성교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나 사는 형태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똑같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그 당시와 관련지어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지의 본론은 지금 이들이 받고 있는 박해와 고난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나그네의 고난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피해 집을 떠나 떠돌던 성도들에겐 편지 서두에서 벌써 왈칵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정도로 들리지만 그때 성도들은 이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훔쳤을 것입니다.
오늘 편지의 수신자 중 한 곳인 갑바도기아 같은 경우는 지금 터키의 성지순례 코스에 들어가는 곳입니다.
황량한 돌산으로 되어 있는 갑바도기아에는 그 당시 박해를 피해 모인 성도들이 필사적으로 돌산을 깎아서 만든 천여개의 동굴교회와 은신처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베드로사도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의 형편은 각각 달랐을 것입니다.
더 극심한 박해 속에 광야로 피한 교회도 있었고, 여전히 도시에 남아 모욕과 오해를 받으며 생활전선에서 먹고사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사도가 오늘 이들에게 서두에서 나그네라는 말을 꺼낸 것은 아픈 곳을 찌르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나그네는 슬픈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나님이 간직하신 하늘의 기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성도들의 나그네 삶은 이 땅이 우리의 기업이 아니라 영원한 기업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집이 있는 사람은 임시로 셋집을 찾으러 다녀도 그리 처량하지 않습니다.
여행객들은 호텔이 아무리 좋아도 눌러 살려고 하지 않고, 낡은 여관에 숙박한다고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사도가 말한 나그네 같은 성도들은 사실은 엄청난 유업을 하늘에 둔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고향도 부모도 친척도 없이 낯선 곳에서 떠돌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늘의 유업을 받은 상속자요 유산을 준비한 아버지가 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속자들입니까?
하나님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받은 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피흘려 죄를 씻어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거룩한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고 주인이신 하나님과, 우리 같이 시시한 사람들이 이런 엄청난 관계로 맺어졌는지 실감이 안 나시죠?
정처없이 보따리를 싸는 성도들에게 이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번듯한 내 집 한 채가 없는 성도라 할지라도 우리에겐 일급비밀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매일 의미 없는 고생이나 하고 박해나 받고 끝나라고 십자가의 형벌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셨겠습니까?
우리의 영광은 지금 이 모습이 아닙니다.
만일 영생의 부활이 없고 영원한 하늘의 유업이 없다면 이렇게 사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바울사도가 말했잖습니까?
바울사도는 천국에 올라가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그 모든 놀라운 기업을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베드로사도 역시 4절에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해 놓으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이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고 상속받을 기업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많은 것을 가져도, 부족하게 가져도 중요하지 않다는 본질을 우리가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주셨으면 사치스럽지 않게 겸손히 누리면 되고, 부족하다면 그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부하든 가난하든 이 땅은 잠시 후에 벗어날 것이고 우리는 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천국의 유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기업들은 박탈당하고, 잃어버렸지만 이 유업은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5절에서 말씀합니다.
권력에 비호를 받고 안전하게 생을 누리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이유가 무엇이 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호한다’는 것은 군사용어로서 철통같이 막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철통같이 보호하고 계시기에 시대마다 거듭된 조직적인 박해 속에서도 성도들이 보존되었고 우리도 이렇게 믿음에 건재해서 과거보다 점점 더 견고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철통같은 보호 속에서도 왜 이렇게 현실은 어렵고 시련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부는 것일까요?
베드로사도는 이 편지를 통해 성도들에게 닥치는 고난의 신비에 대해 여러 가지 말로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6절에 보면 당시 편지를 받은 성도들에게 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러가지’란 단어는 색깔이 다채로운, 알록달록한, 각양각색의 그런 뜻입니다.
시험과 시련이 정말 종류도 많고, 이것저것이 알록달록하게 섞여서 괴롭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시험이 어디 한 두 개만 있습니까?
요듬은 누구를 만나든 ‘힘들지?’하고 어깨를 토닥이면 어느 누구에게든지 다 통합니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저런 사람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어’ 하는 사람도 내 짐과 비교해서 결코 만만치 않은 짐을 지고 삽니다.
탤런트 송재0 장로님이 얼마 전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따뜻한 인품이 연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분이시죠.
그런데 이 분이 50년 동안을 빚에 허덕이며 사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영화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진 사채빚을 평생 갚아나가다 얼마 전에 겨우 빚을 청산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설상가상, 아들을 교통사고로 먼저 앞세웠다고 하니, 참 세상에서 아픔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의 각축장인 세상에서 나홀로 편안하고 고통 없이 일생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험의 때를 만나 잠깐 근심하지만 고난의 결과로 얻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인해 오히려 크게 기뻐할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 어떻게 성도들의 모난 부분을 깍아 가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시는 지는 정말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구원받고, 시련을 통해 우리는 악독한 성질머리를 점점 고쳐가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고난과 시련과 시험에는 몇 가지의 구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있을 때 이것을 잘 알고 거기에 따라 대처하면 좋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잘 따르고 순종하기 위해 스스로가 자원하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신자들 각자가 주님을 위해 져야 할 십자가라고 합니다.
이 십자가의 시련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한 것을 말합니다.
이 십자가는 언제든지 원치 않으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십자가를 우리에게 지우시지 않습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한 것은 예수님의 뜻에 더 순종하고 아까운 남은 생애를 보람있게 살기 위해 제가 작정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간호를 돕던 아주머니에게 ‘남목사가 목회만 안하면 지금 무슨 고생할 일이 있겠수’ 하며 속상해 하셨다는 소리를 얼마전에야 제가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안하면 당장 목회로 인한 고생은 없어집니다.
선교지로 나가 어린 자녀들까지 데리고 말할 수 없이 험악한 환경 속에서 사역 하시는 분들, 지금 당장 그만두면 더 이상 무슨 고통이 있겠습니까?
성도님들이 주일에 예배에 나오고 봉사하고 전도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마음을 낮추려고 애를 쓰는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안하면 그에 따른 마음고생과 육체의 피곤함과 여러 가지 고민은 끝납니다.
이런 십자가로 인한 시련에는 그래서 항상 갈등이 따릅니다.
피해갈 길이 있기 때문에 믿음의 상태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사람에 따라서 시작은 했지만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내려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의 시련에는 반드시 보장 된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편지를 쓴 베드로가 과거에 예수님께 물었잖습니까?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을 물었던 베드로는 살아생전에 버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을 결실했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른 상급은 천국에서 영원한 우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 상급이 천국에서 무엇일지는 모릅니다.
고래등 같은 저택에서 온갖 화려한 것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만일 천국에서도 가장 큰 상급이라면 당연히 그걸 주시겠죠.
이 복된 삶을 아는 사도들은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고난 중에는 성도들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밀어 넣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빠져나갈 길이 없이 꼼짝없이 끝까지 당해야 합니다.
내가 자원한 십자가는 내려놓는 순간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하나님의 징계로 오는 고난은 원한다고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 고난이나 다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 고난인지, 징계로 인한 고난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내 맘대로 고통에서 빠져 나올 수 있냐 없냐를 보면 됩니다.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나 가정의 불화나 자식의 문제처럼 내가 원한다고 쑥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라면 징계로 인한 고난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것을 조장하시는 게 아니라 도와주지 않고 그런 상태가 되도록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회복을 위해서는 회개가 가장 시급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한 이런 고난은 정말 괴롭고 오래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죄를 고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성 고난에 대해서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나가고 있을 때, 매를 드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친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때리는 이유가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지 죽이겠다고 때리지는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반드시 회복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십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뒤, 하나님의 징계로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죽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절절이 회개하고 나자 다시 아들을 주시는 데, 그것도 보통 아들이 아니라 솔로몬을 주십니다.
죄로 인한 징계는 당할 때 고통스럽지만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들에겐 더 놀라운 계획을 베푸신다는 것이 또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달고 사는 죄인들이기에 자신을 항상 살피고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세상에서 자연적으로 만나는 고난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지진이 나면 집이 무너지고, 연쇄 부도를 맞고, 저절로 중병에 걸리고, 여러 가지 재난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악인들과 같은 세상에서 살다보면 선한 사람들도 해악을 당합니다.
세상 속에서 사는 신자들도 피치 못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이런 고난도 심한 것은 쉽게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고난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뒤에서 말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이 조직한 사회에 얽혀서 당하는 이런 고난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리 하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을 바로잡고 성숙해지도록 하나님은 정확한 분량으로 계산해서 딱 맞는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이런 시련이 금을 불에 제련해서 순금을 만들 때처럼, 우리를 타는 듯한 고통 속에 집어넣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금보다 더 귀한 견고한 영혼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이만큼 된 것도 고난이 있어서란 걸 인정하실 것입니다.
여러 가지 각양각색의 슬프고, 성가시고, 괴로운 고난을 통해 결과적으로 금처럼 연단되는 믿음으로 결국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는 7절의 말씀을 기억하고 모두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고통총량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통의 총량이 사람마다 같을 것이라는 법칙입니다.
30년 기자생활을 한 유인0 기자는 기자인생에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봤지만 사람들은 다 같은 양의 고통주머니를 차고 태어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 고난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신자들은 적어도 어떤 고난을 택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며 우리가 정금과 같은 단련된 성도로 만드신다면 기왕이면 자원하는 십자가의 고난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혹독하게 눈물을 빼는 징계의 고난과 억울하게 당하는 자연적인 재난의 양은 상대적으로 좀 적어질거라는 것이죠.
요한계시록에서 빌라델비아교회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잖아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면 분명히 면제해주시는 시험도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으며 일찍이 이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고, 내가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 보며 내 믿음을 성장시키려고 노력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인생채찍을 들어서 나를 단련시키겠습니까?
사람막대기에게 맞아가며 너절하게 살게 안하십니다.
오늘 베드로사도의 편지를 받은 성도들은 우리보다 더 힘든 형편 속에 있었지만 잠깐만 근심하고 크게 기뻐하며 고난을 이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뻐했다는 단어는 그냥 조금 좋아했다가 아니라, 경축하다, 열렬히 기뻐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주님을 위해 받은 고난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실 칭찬과 믿음이 견고해지는 자신을 보면 열렬히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 같은 삶에 울적하다면 날마다 화창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천국의 유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쉴새없이 다가오는 고난 중에 있다면 그 원인을 잘 생각하고, 인내할 것은 인내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도우심을 간구할 것은 간구하며, 우리 모두가 잘 이겨나가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6년1월10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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