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4장7절-11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남수연 2017. 6. 1. 00:10


오늘 말씀은 어려운 부분 없이 잘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 말씀은 명령이기에 그대로 지키면 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아주 큰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명령대로 지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열심히 지켰다면 지금 이 땅은 천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정은 행복과 사랑이 넘쳐 났을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해서 사회가 더 부패하고, 악이 만연하고, 사탄이 뜻을 이루는 괴로운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다 행해야 할 것을 거듭 가르치셨지만 신자들은 그대로 지키지 않고 살아갑니다.

예를들어 8절에 보면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문제와 분란이 생기는데요.

사랑만 잘 해도 아마 많은 갈등이 사라질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을 지킬 때 약속된 모든 좋은 결과와 축복들도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저절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런 근거없는 신조가 오늘날 믿음과 현실이 따로 노는 기형적인 신앙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들도 우리가 지켜서 복을 받을 말씀들입니다.

왜 지켜야 되고,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생각해 보고 그대로 살아 낼 수 있는 힘을 받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오늘 말씀을 열심히 지켜야 할 근거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체제와 질서들은 끝이 날 것이니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대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베드로가 두 번째 쓴 편지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 역사의 종말에 대해 증언합니다.

베드로후서3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세상사람들은 이토록 화려하게 번성한 지구역사가 영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고 그야말로 막연한 추측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은 전혀 그러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지구와 인간의 최후의 운명에 대해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성경 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지구와 인간역사가 어느날 한 순간에 끝난다고 시종일관, 끊임없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도 지구역사의 끝 날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믿는 사람들은 막연히 미래를 낙관하지만, 우리는 만유를 창조하시고 계획대로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사실을 믿습니다.

베드로사도는 게다가 그 날이 임박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임박했다, 가까웠다는 단어는 시간이 짧다는 의미 외에 언제라도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긴박감을 말하는 것이죠.

지구의 역사적인 종말 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도 임박해 있습니다.

이 땅의 개인적 삶에서도 언제든지 종말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마지막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똑같은 생활을 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앞으로 석 달 밖에 살 시간이 없습니다라는 선고를 받으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그렇게 사는 석 달은 그동안 막연히 살아왔던 석 달과 절대로 똑같을 수 없습니다.

삶을 정리해야 하고, 누군가를 꼭 만나 해결할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꼭 해 보고 싶은 일도 있고, 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사도가 지금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에 종말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겠냐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건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사람은 그제서야 술도, 담배도 끊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세상 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제 곧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중점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고 친분을 돈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만간 우리가 만나게 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는데, 하나님이 우리가 친근히 믿고 공경하던 그 아버지가 아니라 낯선 아저씨 같은 분이면 어떡합니까?

나도 하나님을 모르겠고, 하나님도 나를 모르시겠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이 땅에 있을 때 예수님을 구주로 삼고 하나님과 친밀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안되면 그 날에 달리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로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며 신뢰를 다져가야 합니다.

사람도 친해지려면 어쨌든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됩니다.

친한 사람들이 왜 자주 만납니까?

내 속사정을 털어 놓고, 이해받고, 위로 받기 위해 만나는 것이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사람들과의 친분 쌓기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저 하나님과 사귀고 싶어요.’ 그러는 것입니다.

내 답답한 형편 좀 들어주세요, 그리고 저 좀 위로해 주시고 안심시켜 주세요.’

하나님은 방법이 있으시니 좀 도와주세요.’

이런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기도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생명으로 거듭나면 성령께서 우리를 자꾸 기도의 자리로 몰고 가십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기도를 안 해도 두 다리 뻗고 잠만 잘 잤는데, 어느 순간 우리가 거듭나고 나면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호흡을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숨이 답답해집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지내다보면 힘이 점점 빠지고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시는 모든 은혜와 기쁨과 생기를 얻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성실히 살아가면 되지 않냐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귐이라는 기도의 본 목적을 모를 뿐 아니라, 기도만을 통해 얻어지는 풍성하고 유익한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평소 꾸준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늘 견고하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든든한 나무처럼 보기에도 좋고 믿음직합니다.

범사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기에 일상이 거의 순탄합니다.

시험에 잘 들지 않기 때문에 큰 분란이 없이 즐겁게 삽니다.

그리고 위기에는 자기 힘만으로 살던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기도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위기 앞에서 기도만큼 빛나는 큰 공헌을 하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해봤자 별 효험이 없다는 생각에 점점 기도가 멀어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멀어지면 하나님과도 멀어집니다.

꾸준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 크고 작은 신앙의 간증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제가 지난 주 이비인후과에 같다고 했잖아요?

코와 귀를 연결한 이관의 기능에 이상이 생겨 돌발성 난청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말을 하면 소리가 울려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찬양을 부르면 귓 속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데 그것도 낮은 음정으로 들려서 혼자서 이중창을 부르는 것 같았을 정도입니다.

이 병은 스테로이드제를 써서 치료를 하는데 약이 독하니까 먼저 비염 쪽 치료를 하자고 해서 닷새 분 약을 지어 왔습니다.

금요일에 두 차례 약을 먹었는데 약기운에 취해 주일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약을 끊기로 하고 하나님이 이 형편을 알아주시길 기도를 했습니다.

대개 기도는 응답되는 과정이 길고 언제 이뤄졌는지 모르게 슬그머니 응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 기도하던 것들 떠올려보면 대부분 이뤄져 있잖아요?

그런데 즉시 응답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응답이 즉시 이루어질 때 저만이 느끼는 경이로운 기운이 있습니다.

그 날 기도하고 나니 바로 그 특별난 느낌이 왔습니다.

그 이후로 증상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기도하고 병이 낫거나 문제가 잘 해결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을 때가 되었나보지, 우연히 일이 잘 풀릴 수도 있는 것이지.

기도해야 그런 우연도 일어납니다.

때가 되어서 나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고 한번 기다려 보십시오.

기도하고 치료받고, 기도하고 문제를 직면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반드시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기도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 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 8절부터는 임박한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 지를 가르치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이면 사람과의 관계는 사랑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8절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인간의 본성은 남에 대한 냉담함입니다.

사람들은 분위기 좋을 땐 서로 재미있게 어울리고 친한 것 같지만 자기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보면 표정이 냉냉하고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진실 되고 깊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감 속에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아담 이후 죄가 들어오자 인간의 가장 큰 행복요소인 사랑이 파괴됩니다.

죄가 들어오자 즉시 형이 아우를 죽이는 가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잖아요?

아담의 후손들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 이외에는 사랑하지 못합니다.그래서 가정이 불행하고 이웃과의 관계가 불행한 것입니다.

억지로 사랑하려고 해보지만 미움만큼 쉬운 게 없고, 사랑만큼 어려운 게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진실 되게 깊이 사랑하라는 것은 위선을 행하라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겠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신생 인류입니다.

과거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었지만 이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힘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끙끙대기 때문입니다.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하죠?

이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만 하는 채무가 있다는 암시입니다.

죄를 덮는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뿌리를 둡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국가적으로 9월 대속죄일을 회개의 날로 지킵니다.

대속죄일이 되면 금식하며 일년 동안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도로에는 차 한 대가 다니지 않는 진풍경이 연출됩니다.

구약시대엔 이날 대제사장이 연중 단 하루, 국민들의 모든 죄를 속죄받기 위해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들고 법궤가 모셔있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제물의 피를 법궤 위 속죄소에 뿌려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합니다.

지금은 성전이 없어졌기에 전통대로 하지 못하죠.

그래서 약식으로 닭을 잡아서 그 피로 속죄 받는 의식을 합니다.

속죄제물과 회개기도로 의식을 치른 유대인들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큰 축제를 벌입니다.

여기 속죄일이란 단어에서 속죄가 바로 덮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속죄제물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우리의 셀 수도 없는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걸 모르고 닭을 잡아 그 피로 속죄를 받으려하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할 때, 베드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우리 죄를 덮어주신 것을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더 커다란 내 죄를 덮어 주셨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가 용서받은 죄를 생각할 때, 우리가 얼굴을 붉히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내게 한 잘못이 그리 큰 것은 아니잖습니까?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어 줘도 예수님이 나를 덮어주신 것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일서420절엔 사랑으로 덮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판결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사랑하지 않는 다고 무슨 문제냐 말할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다음 9절에서는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성도들의 봉사를 언급합니다.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대접에 종종 문제가 생깁니다.

남을 대접하는 아름다운 행동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원망이라는 단어가 본절에 붙어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는 아름다운 행위에도 죄성의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시던 초대교회 시절에도 예외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대접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평이 일어났습니다.

또 정성을 다해 접대했지만 그에 따른 감사나 칭찬이 없을 때 결국 원망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접하라는 단어의 원 뜻을 생각하면 쉽게 해답이 나옵니다.

본래 대접하다의 단어는 사랑이라는 뜻에 나그네가 합성된 말입니다.

본문에서 대접한다는 것은 본래 나그네를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요즘이야 나그네를 섬길 일이 별로 없지만 이 편지가 기록되던 시대엔 신앙의 박해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떠돌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오면 그 동네의 성도들이 맞아서 한동안 재워주고 식사를 대접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내 가족도 아니고, 내 교회 성도도 아니고,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어떤 댓가나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명령을 따라 대접하고 보내면 그걸로 끝입니다.

이런 면이 바로 대접의 정신이라고 알면 대접하다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상사가 사라질 것입니다.

 

10절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서 원칙이 되는 중요한 요소를 말씀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우리가 하는 봉사와 헌신이 내 것으로,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보호하고 키우시기 위해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와 일체가 되셔서 직접 선한 일을 하신다는 게 맞습니다.

가장 완벽한 성도의 삶은 내가 백프로, 성령께서 백프로 합체 된 삶입니다.

그러니까 내 눈이 주님의 눈이 되고,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신비한 영적 원리이고 실제 그렇게 작동되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눈이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따뜻한 눈길이십니까?

긍휼이 넘치고, 딱한 처지를 동정하시는 그 주님의 눈이 내 눈을 통해 형제를 보면 우리가 비로서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기꺼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시던 주님의 손과 발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속에 싸여서 먹고 쉬고 하실 틈도 없었잖아요?

거동 못하는 가족을 데려올 수 없으니 예수님을 모셔가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그렇고 백부장의 하인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간청에 예수님은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진실 된 마음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 그 손과 발이 우리 마음과 우리 손과 발에 합체가 되어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었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기도할 때도 우리의 입술이 성령님의 입술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죠.

너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너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니라.

성령께서 너희를 위해서 직접 간구하시는 것이라고 하죠?

우리 입술이 성령님과 하나가 될 때, 정말 내게 필요한 기도가 나옵니다.

성령께서 함께 간구하게 해주시면 우리가 몰랐던 것이 내 입의 기도로 깨달아집니다.

기도 중에 지혜가 쏟아지고 알지 못했던 것들이 입으로 술술 나옵니다.

그것을 누가 하신다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나와 함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하고 오묘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체입니다.

이렇게 성령님과 하나가 되어 살면 모든 것이 조화있고 안전하고 강인하고 아름답습니다.

성령님과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있고, 불안하고 침울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보면 범사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바로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신비하고 엄청난 성도들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기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17:21)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복락 가운데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송구스러운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상상치도 못하고 우리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런 영광스럽고 복되고 고귀한 새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조금씩 맛보면 땅에서 얻으려고 집착하던 것들에서 점점 손을 놓고 더 나은 것, 그런 삶을 더욱 좇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되고 보람있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하심, 즉 우리 자신의 인격과 성령님의 인격이 일치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에는 성령님의 마음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을 잘 깨닫고 성령께 마음을 맞춰가야 합니다.

성령님의 마음과 내 본성과 어떻게 구분합니까?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 된 것을 원하시고 그대로 행하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나쁜 것인 줄 아는 것을 부득부득 우기며 하는 것은 성령님과 합일이 깨지고 갈등과 불화와 불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절대로 우리의 죄와 고집에 함께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말씀대로, 성령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살아가는 삶은 조금씩 조금씩 됩니다.

한 두 번씩 그런 것을 경험하다 보면 그게 옳고 그게 나와 타인 모두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성령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베드로사도는 마지막 날이 임박한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오늘 요구합니다.

기도로 정신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모든 봉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모든 복된 것을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고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행복과 사랑이 충만한 삶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갖고 계신 청사진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그런 복된 삶을 이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2017년5월2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