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이 북적이고, 직장생활이 원만하고, 삶이 평탄할 때, 이 세상은 살만하고 친숙한 고향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풍랑이 일상을 덮칠 때 그동안 친근했던 세상은 두렵고 낯선 곳처럼 보입니다.
이별 앞에서, 죽음 앞에서, 재난 앞에서 세상은 영원한 집이 아니고, 우리는 나그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사도 역시 오늘 편지에서 성도들은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합니다.
두 주 동안 우리는 산돌이신 예수님을 믿는 산돌이 된 성도들이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해서 교회가 세워져 가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또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직위에 있는 성도들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바로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런 영광과 명예를 현재 지닌 채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사도는 성도들을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성도들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부른 것은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최희준씨의 가요가 물씬 풍기는 허무감과 서글픔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겐 이미 영원히 거주할 천국의 본향이 있다는 안전함과 자부심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요지는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최종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에 잠시 머무는 곳에서의 라이프스타일이 다릅니다.
살림살이만 봐도 나그네인지 정착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그네로 머무는 사람이 땅을 사고 투자를 한다면 정착하겠다는 심산이죠.
성경의 의로운 신앙의 인물들은 한결 같이 나그네 삶의 모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돌아갈 본향을 믿었기에 거부였지만 성읍을 짓지 않고 장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나그네라는 것을 실제 사는 모습을 통해 보여준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이 고향인 공중의 새에게 집을 주시고 여우에게 굴을 주셨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완벽한 나그네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잠시 머무는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이 땅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천국시민권자이지만 로마제국에 속했던 당시 성도들에겐 갈등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천국시민임과 동시에 세속국가의 시민으로의 이중 정체성을 갖고 삽니다.
이런 성도들은 내적으로 옛성품, 외적으로 세상의 세력들과의 긴장과 전쟁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이런 필연적인 대결을 위한 전투계획이라고 보면 됩니다.
잘 배우고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영적 패배는 현실적으로도 큰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옵니다.
성도들은 세 가지 측면에서 공격해오는 갈등요인과 싸워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내면에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성도들의 내면에서는 영혼과 육체의 정욕 간에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영혼은 자연인들의 영혼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을 말합니다.
자연인은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오직 물질세상을 인식하고 감각할 수 있는 육만을 갖고 태어나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영의 세계가 인지되지 못하고 믿어지지 않는 것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면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의혹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것이 아직도 고민이시라면 거듭날 때 까지 버티셔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은 이 자연의 몸이 죄성을 따라 추구하는 모든 욕망과 무질서한 자연적 경향을 말합니다.
베드로사도는 4장3절에서 육체의 정욕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런 육체의 정욕은 일반세상과 아무런 갈등 없이 한 통속입니다.
세상이 괴상해서 못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인은 누구나 세상을 애착하고 세상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가 그랬습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방식과 한 치의 갈등 없이 잘 살았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곧 나의 가치관이었으니까요.
어느 방송작가가 라디오 프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말하자면 사소한 거짓으로 엮인 것,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게 사실이잖아요?
검고 흰 거짓말 뿐 아니라 침묵의 거짓말이 있고, 거짓 몸짓도 있습니다.
심각한 거짓말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사소한 거짓과 위선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니 과거에는 이렇게 대수롭지 않았던 죄에도 제동이 걸립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인격에 붙어있던 그것들의 실체를 보게 되니 그게 혐오스럽게 여겨집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면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뿐 아니라 양심이 새롭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느끼게 되고 거룩한 삶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말씀대로 따르려는 경향성이 생깁니다.
그런데 대개의 신자들이 다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적대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의 옛습성, 죄의 본성입니다.
거의 매 순간에 우리 안에는 두 실체가 싸운다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땅에서 태어난 육체의 정욕은 이 땅과 본성에만 충실합니다.
이 땅에 금자탑을 쌓으려고 열망하는 것이 육체의 정욕입니다.
새 영혼은 천국의 실체를 믿고 점점 관심과 행위가 천국에 모아지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자연인이라면 갈등 없이 세상방식과 자연적인 본성을 따라 살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들이 성경의 기준대로, 양심대로 살려고 하면 죄의 본성이 총력을 다해 대항해 옵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던 초기교회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속에도 이 육체의 정욕과 죄의 본성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경지에 올라 육체의 정욕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을 없애라고 하지 않고 제어하라고 말씀합니다.
평생에 죄의 욕구를 성령님의 도우심을 얻어 제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하지만 항상 제어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데 이전 생활과 새 생활이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항상 똑같은 마음일 수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 예배를 빠지고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그것도 정상적인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기고 오셨으니 영혼이 승리하고 육체의 정욕이 패배한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도 우리 안에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워 서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한바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것은 곧 우리 안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반드시 흉하고 고통스러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걸 모르고 과거엔 내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며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육체의 정욕이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것이 재벌의 갑질입니다.
욕심껏 재물을 모은 사람들이 본성대로 남을 멸시하고 악을 행하다 구속되는 그 모습이 육체의 정욕이 주는 결말 아니겠습니까?
정욕은 끝이 없이 사람을 망친다는 것은 금수저로 태어나 아쉬울게 없는 권력자 자식들이 마약에 빠지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국회위원의 검사사위와 전직 대통령아들의 마약파티사건을 보십시오.
이미 정욕대로 살아온 결과로 많은 고통이 우리와 세상 안에 있고, 앞으로 점점 더 고통 하는 때가 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어하며 영원하고 더 보배로운 은사들로 우리를 채우며 사는 것이 참 행복인 줄 믿으시고 육체의 정욕을 잘 제어하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싸움을 해야합니다.
영적 싸움은 개인적인 경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가는 것은 곧 너희가 타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특히 본성을 제어하는 영적싸움을 개인의 경건생활보다 사회생활에서의 선한 행위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은 기도의 골방에서, 또 내면의 죄악과도 하지만 사회생활 중에서도 해야 합니다.
기도와 금식은 잘 했어도 사람을 대하며 육체의 정욕이 드러나면 그 경건은 헛것이 됩니다.
아무도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호젓한 환경에서 괜히 정욕의 화산이 분출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항상 우리 곁에 그 누군가가 있잖아요?
잠재웠던 분노의 정욕을 활화산처럼 분출시키는 사람.
발동이 걸리면 세속세상으로 질주하게 하는 취미 같은 것.
항상 걸려 넘어지게 하는 약점들.
사회생활 안에서, 다양하게 몸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결국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육체의 정욕들을 계속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참아내고 선을 행하는 것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타인을 향한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착한 행실이 기독교를 무조건 나쁘게 보고 비방하려 드는 세속인들에게 전도의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의 날, 이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도 잘해도 못되게 굴면 절대로 교회에 안 따라옵니다.
또 선한 행위를 통해서 적어도 교회를 비방하는 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금방 도움을 받고 돌아서 당장 욕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 행실을 착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에서 칭찬받을 착한 행실만 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배려하고 손해를 보고 착하게 굴면 나중엔 그걸 당연히 여기는 게 세상입니다.
얌체같이 우리의 착함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듣는 것이라 믿습니다.
들은 말씀들이 그냥 인격화되지 않습니다.
지키는 과정에서 체험적으로 터득이 되어야 비로서 신앙인격이 됩니다.
내게 악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조차 계속 선으로 대하면서 그들에게 계속 상처를 받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이고 곧 떠날 사람이라는 전제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어떤 환경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과도하게 집착할 것도,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심려를 쏟을 필요도 없습니다.
곧 떠나고 헤어지게 될 나그네니까요.
어느 상황에서건 목적지인 천국과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궁극적인 최선의 이익을 믿고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건, 눈치를 보고 섬겨야 되는 사람이건 그들은 다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연약한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들로 인해 심령이 상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것이 육체의 정욕입니다.
우리의 새영혼은 그들 모두를 포용하도록 조용히 속삭입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그렇게 지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육체의 정욕대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노력하다 실패해서 말로 상처를 주고 기분이 상하게 하는 형제 자매도 이해해 줍시다.
우리도 똑같이 연약하고 실패하며 누군가를 시험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3. 다음 성도들은 세속세상의 제도 안에서도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 천국시민은 세속나라의 강렬한 저항을 받고 불이익을 당합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영국의 기독교인의 90%가 신앙으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됨을 느낀다고 대답했습니다.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인이 받는 불이익이 크기 때문에 신앙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25%가 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떨 것 같습니까?
한국에서 기독교는 차별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국가의 종교지원금을 거의 받지 못합니다.
반면 불교의 경우는 템플스테이에 지원된 한 해(2013) 예산만도 124억원입니다.
문화재 보존 명목으로 수백억의 지원금이 불교시설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불교종단의 지원을 받고 있는 종자연의 연구를 토대로 종교정책의 가닥을 잡고 있습니다.
미션스쿨의 예배활동까지 제재하고 선수들의 기도세레머니까지 문제시한 게 종자연입니다.
방송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절에서 불공드리고 승려가 나와 덕담을 하고,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무당이 나오는 장면들에 대해서는 댓글도 안 올라옵니다.
만일 교회가 배경이 되면 종교색채가 짙다는 비난이 폭주합니다.
동성애 문제도 만일 교회에서 찬성하면 아마 사회에서 동성애를 반대하고 들고 일어설 것입니다.
역사이래 참된 기독교는 항상 세상제도의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권력을 가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교회가 권력을 갖고 세상 통치에 관여할 때 오히려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힘과 권력이 있다고 선교도 되지 않습니다.
과거 천주교의 공격적 선교에 대한 반발로 인해 이스람이 저렇게 확산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제도와 권력에 대해 성경은 기본 방침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물론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지역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특수성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때는 왕과 군주들이 신처럼 군림하던 시대이고 노예제도가 있던 때입니다.
당시 성도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미천했습니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귀족들까지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이로부터 이백년 이상 되어야 이루어질 일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로마의 시민권을 갖지 않은 이류시민들이었고 귀족의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사도는 제도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특히 편지가 씌어지던 시대는 네로황제 치하였습니다.
네로 같은 폭군을 심지어 존대하라고 17절에서 말씀합니다.
왜 베드로가 이런 불의한 권력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굳이 권력을 자극해 갈등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에겐 하나님의 법이 사회법보다 우선이었습니다.
박해당하고 사형당하던 시대에 이들의 순수한 신앙으로 인해 교회와 성도들의 피해를 우려한 권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아모스때는 공의와 사회 정의를 행하라고 책망했습니다.
현대 교회처럼 사회제도를 하나님의 법보다 당연히 우선시하는 때라면 베드로사도가 다른 권면을 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어찌되었든 세상제도와 성도와의 기본적인 원리는 제도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하나의 이유를 14절에 말씀하죠.
왕이나 총독이나 관리들이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사회의 선악을 어느 정도 규제할 목적으로 국가제도와 권력들은 허용하셨습니다.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되도록 하신 일반은총이죠.
이 사회에서 우리에게도 권력자가 있고 권위자가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의 악행을 제재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위의 권세들은 우리를 평가하고 상벌을 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엄한 상사가 없으면 지각생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권력들은 예로부터 인간의 죄로 인해 타락하고 남용됩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 권력에 맹종하고 권위자들에게 무조건 복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반역하는 제도라면 저항할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죠.
16절에 보면 너희가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제도에 복종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죄인들은 그것 역시 악을 합리화시키는 데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도에 순응하되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며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 역시 골로새3장23절에서 같은 지침을 내립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섬기고 순종해야 할 권위를 주셨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를, 학교에서 교사를, 직장에서 상사를, 국가에는 통치자를.
이런 제도와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유지할 뿐 아니라, 방종하는 마음을 절제하게 합니다.
겁날 사람이 없으면 방종한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 권위자를 섬기는 것은 곧 그들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권위에 순복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나그네로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가는 태도는 17절 말씀대로 아주 명백합니다.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의 명령은 항상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은 경외하고 사람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냉담하고 거친 사람들, 심지어 나에 대해 나쁜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조차도 사랑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될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얘야, 너는 이미 모든 좋은 것을 갖지 않았느냐, 너의 나그네 여정을 마치면 영원히 누릴 상속이 준비되어 있지 않느냐’입니다.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고, 왕같은 제사장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확실한 자녀들이기에 나그네 같은 이 땅에선 좀 손해를 보고 좀 너그럽게 살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몇몇 자녀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건 뭇사람을 섬겨야 하는 우리가 아니고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지 못한 그들입니다.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것은 우리를 불행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정욕을 억제하면 내 영혼이 편하고 가정이 편하고 주변이 조용합니다.
우리의 평안한 영혼을 도발하고 부추겨 분란을 일으키는 옛 육체의 정욕을 말씀과 기도와 사랑의 행위로 잘 제어하며 주님을 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8월6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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