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의 5대제사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5대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그동안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살펴 보았죠.
오늘은 속죄제, ‘하타트’입니다.
구약성도들이 드리던 제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냐가 오늘의 과제입니다.
먼저는 구약성도들의 실제 삶에서 드려야 했던 속죄제에 대해 이해를 해야겠죠.
구약성도들의 죄와 우리의 죄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속죄제의 의미를 어떻게 적용할지를 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제사가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 하잖아요?
속죄제를 통해서도 우리가 믿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 오늘 견고한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속죄제는 어떤 제사인가에 대해서입니다.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그릇 범하였다’는 것은 ‘부지 중에 범했다’는 뜻입니다.
뒤에는 다 ‘부지중에’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부지중에 범한 뒤 나중에 깨닫게 되면 드리는 제사가 속죄제입니다.
모세오경에 나온 율법의 개수는 중복된 것까지 다 센다면 육백십삼 개입니다.
그걸 다 지키라고 하시는 건 지나친 것 같죠.
그걸 어떻게 다 지키냐, 숨도 못 쉬고 살겠다, 너무 까칠하시다
아마 그렇게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닌 하나님의 비즈니스입니다.
회사대표가 정직하게 경영하는 걸, 직원들이 융통성없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죠.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것과 단 한 개도 타협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이신 공의 자체가 죄를 혐오하고 파괴하십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은 선하십니다.
천국은 그런 곳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속죄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1) 구약 제사의 핵심은 구원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사람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약의 성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구약성도들의 경우는 구원에서 끊어지는 죄가 있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만들잖아요?
하나님 앞에 죄의 장벽이 생기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이죠.
주신 복을 못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손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되신 하나님 자신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죄는 회개하고 돌이켜 장벽을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 속죄제가 그런 의미로 드리는 회개의 제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죄는 사회적인 큰 범죄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범죄는 당연히 법으로 처벌합니다.
살인죄를 지으면 형법에 따라 사형 또는 징역형을 받죠.
구약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는 고의적으로 지은 죄에 대한 형이 엄중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레위기20장에는 고의로 악을 행한 자에 대한 형벌이 나옵니다.
17절,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9절,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율법은 범죄자가 행한 만큼 벌을 줌으로 백성들의 악을 억제했습니다.
범죄가 피해자와 가족들을 지옥의 고통으로 몰아 넣잖아요?
형량이 가벼우면 범죄율이 높아지죠.
우리나라는 범죄에 비해 형량이 가벼운 나라입니다.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80% 이상이 형량을 높여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심신미약이나 음주 상태가 감형 사유가 되잖아요?
반성문, 장기기증서약서, 헌혈증, 이런 걸로도 감형되는 게 이해가 안되죠.
지난 주 기사를 보니 청주여자교도소가 닭장이 되어간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 교도소는 6평 방에 6명이 정원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에 비하면 정원이 두 배나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섯 평 방에 열한 명이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감자가 자꾸 늘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형량을 줄여서 입소자의 수를 관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구약 율법처럼 잘못한 만큼 형량을 매겨왔다면 오히려 구치소, 감옥, 널널했을지 모릅니다.
제사제도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 것은 고의로 지은 중죄는 동물제사로 속죄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눈 번제, 소제, 화목제는 특정한 범죄를 용서받는 목적의 제사가 아닙니다.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들이죠.
그러면 왜 동물의 머리에 안수해 죄를 전가하고 잡았었는지 의문이 들죠.
죄인들은 늘 죄지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저절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강도짓을 하고 온 건 아니라 해도 분명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죠.
오늘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 중에 지금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 하려면 번제를 드리든 속죄제를 드리든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 죄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도 지금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2) 속죄제를 드릴 대상은 제사장, 온 회중, 족장, 평민입니다.
어느 누구나 속죄제를 드릴 대상이라는 것이죠.
단, 지위에 따라 제물도 다르고 제사 드리는 방법도 약간씩 다릅니다.
제사장의 범죄와 온 회중의 범죄는 가장 중하게 다룹니다.
지도자의 잘못은 많은 사람을 고통과 죄악으로 몰아 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죄제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기죠.
죄를 짓고도 잘못을 깨닫지 못한 사람과, 잘못을 깨달은 사람을 비교할 때 누가 더 나쁩니까?
잘못을 깨달은 사람이 그나마 더 낫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짓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냥 편히 삽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비싼 제물로 속죄제사를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죠.
좀 거꾸로 된 것처럼 보이죠.
5장에 보면 부지중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약간의 예시가 나옵니다.
범죄 현장에 있던 사람이 증인이 되지 않았던 것, 맹세를 함부로 한 것, 그리고 부정한 것에 접촉한 것입니다.
이런 게 죄인지 약간 애매한 것을 예로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 죄인데도 깨달았으면 반드시 속죄제를 드리라는 것이죠.
만일 속죄제를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깨닫지 못하면 괜찮을까요?
율법을 모르고 죄를 짓는 사람들은 심판을 안 받느냐와 비슷하죠.
거기에 대해서 바울사도가 단칼에 정리해 줍니다.
로마서 2장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지은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속죄 제사를 드리고,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게 복이죠.
그러니까 이 속죄 제사야말로 구원에 대한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부지중에 죄를 지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강남에 20억 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공용 사우나에서 쓰는 샴푸를 훔쳐 간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고급 드라이기도 없어져서 더 이상 비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훔친다는 생각도 없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부지중에도 쉬지 않고 죄를 짓는 자신을 깨달은 사람만이 자기가 본질적 죄인이란 걸 인정하죠.
죄인만이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깨닫고 속죄제를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은 기뻐하며 나와야 하는 것이죠.
내가 죄인 됨을 깨닫게 됨을 항상 감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속죄제의 절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흠없는 제물을 준비합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수송아지를, 족장은 숫염소를,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준비하면 됩니다.
죄의 영향력을 고려해서 차등을 두신 것이죠.
그런데 5장에 보면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의 경우 형편에 따라 비둘기도 되고, 그 능력도 안되면 고운가루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달았는데, 제물 드릴 형편이 안되서 속죄제를 못하면 어떡합니까?
죄를 그냥 지닌 채 죄책감만 갖고 살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고운 가루도 속죄제물로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의 원리는 ‘피가 죄를 속한다’는 것이잖아요?
레위기 17장 11절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원칙을 하나님이 스스로 깨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칙만을 고수하신다면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범죄한 인간에 대한 파멸시킨다는 원칙을 깨셨잖아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권0이라는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만 찍는 작가입니다.
이 분이 암에 걸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겨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발을 가만히 있지 않고 자꾸 꼼지락거리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왜 이러실까 의아했죠.
알고 보니 아들이 발을 씻겨 드리는 동안에도 종일 고생한 아들의 손을 힘없는 발로 씻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주는 것에만 익숙하지 자식에게 받는 것엔 어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받으시는 것보다 주시는 게 더 익숙하십니다.
하나님이 고운가루로라도 죄를 사하시고 복을 주시려 하신다는 게 우리 소망인 것이죠.
그러나, 고운가루 속죄 제물엔 반전이 있습니다.
피가 죄를 속죄한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5장에 보면 이 고운가루를 제단 위에서 태울 때 가루만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12절,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기념물로 한 웅큼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가난한 자의 곡식가루가 이미 타고 있는 피의 상번제 제물과 함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냥 허용하신 게 아니라 다른 제물의 희생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파기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십자가 희생으로 공의와 사랑이 둘 다 실현되게 하신 것입니다.
2) 제물을 데려왔으면 앞의 제사처럼 제물에 안수한 뒤 도살해서 그릇에 피를 받습니다.
이때 드리는 제물은 대개는 본인이 키우던 가축입니다.
동물이든, 가축이든, 키워보면 다 애정이 생기잖아요?
저도 비둘기를 한달 키웠더니 왠지 애정이 생기더군요.
지금은 다 퇴거시키고 청소했습니다.
많은 가축을 키우는 분들도 한 마리씩 이름을 짓고 애지중지 키우더군요.
그중에서 제일 예쁘고 흠 없는 애를 데리고 나온 것이잖아요?
제가 자료를 찾다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속죄제 영상을 보았습니다.
양을 데리고 한 사람이 성막 뜰로 들어옵니다.
양을 제물대에 눕히고 칼로 숨통을 끊고 흘러나오는 피를 그릇에 받습니다.
애니메이션인데도 죽은 양이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주인은 자기 죄 때문에 자식 같은 동물을 죽이는 순간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내가 죄 짓지 않았으면 얘가 죽지 않아도 됐을텐 데, 가책이 되겠죠.
예수님이 제물대에서 누워 속죄제물이 된 양처럼 그렇게 순순히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입니다.
레위기 말씀이 복된 것은 나를 위해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어느 장에서나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들고 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간 제사장은 먼저 지성소 앞을 막아 놓은 휘장에 피를 찍어서 일곱 번 뿌립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 있겠죠.
당시 휘장의 역할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보지 못하도록 휘장으로 가려 놓은 것이죠.
왜냐하면 누구든 정해 놓으신 속죄의 절차 없이 지성소를 보면 죽음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이 누구나에게나 열리지 않은 상태가 휘장입니다.
한편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죽음을 막아 주는 것이기도 하죠.
제사장의 죄로 인해 부정해진 휘장이 다시 본래의 역할을 하도록 속죄의 피로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성전에 있던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쪼개졌던 것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이 피의 제사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죽지 않고 아버지께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설교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됩니다.
그런데 때로 설교 앞에 휘장이 막힌 것 같고, 기도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두꺼운 휘장이 가로막힌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휘장을 찢으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아버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4) 다음 제사장은 휘장 앞에 놓인 향단 네 모서리 뿔에 피를 바릅니다.
향단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을 때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시편과 계시록에 보면 분향과 기도를 동일시합니다.
우리말 제사장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코헨입니다.
코헨이라는 말은 중재하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제사로, 기도로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제사장이 죄를 짓는 바람에 기도하던 향단도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지 못하게 된 것이죠.
그렇기에 향단에 속죄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를 정말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 들으실까, 궁금하시죠?
다 들으시기에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향단을 속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향단을 속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기도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기도의 자리를 항상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5) 제사장은 밖으로 나와 남은 피를 제단 밑에 붓습니다.
6) 제물의 각을 떠서 화목제 때와 같이 일부만 번제단에서 태웁니다.
화목제 때 제단에서 불태웠던 부위가 어디였는지 기억하십니까?
기름과 콩팥과 간에 붙은 꺼풀이었죠.
화목제에서 배웠듯이, 가장 귀한 것들과 진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제물의 고기는 가지고 이스라엘의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11절,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
12절, 똥 곧 그 송아지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이스라엘 진영 밖은 부정한 곳입니다.
나병과 같이 격리되어야 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다 나을 때까지 진영 밖에서 생활했습니다.
바로 그 진영 밖으로 제물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죠.
그런데 본문 말씀을 잘 읽어보면 12절에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라고 합니다.
부정한 곳인데 왜 정결한 곳이라고 할까요?
여기서 ‘재 버리는 곳’은 제사에 바쳤던 제물이 완전히 타고 남은 재를 버리는 곳을 말합니다.
죄가 전가된 제물이 완전히 타고 남은 재는 깨끗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이 재를 가져다 물에 타서 부정한 것들을 정결하게 할 때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재 버리는 곳이 진 밖 부정한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결한 곳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단에서 다 태우면 되지 왜 진영 밖에서 태우라고 하셨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이유를 신약성경 히브리서에서 잘 설명해 줍니다.
레위기를 잘 모르면 신약성경에서 이해 못할 게 참 많습니다.
히브리서는 레위기의 제사제도와 예수님의 대속 제사를 잘 연결해서 설명해 주는 성경입니다.
13장11절입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이게 오늘 본문의 속죄제에 대한 이야기죠?
다음에 이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기의 속죄 제사가 왜 진영 밖에서 불살라지게 하셨는지를 해석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고난을 받으실 것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죠.
또 그 의미는 성 밖의 모든 부정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의 모든 민족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더 넓은 영적인 뜻은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나라 밖, 부정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제사장과 온 회중이 부지중에 지은 죄를 깨닫고 드리는 속죄제입니다.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는 그 절차가 조금 다르지만 의미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속죄제를 드리게 하셨을까요?
실제로 죄가 하나님께 받을 축복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또 죄짓고 깨달을 때마다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면 어떤 죄든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속죄제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어느 분이 그러더군요.
레위기를 배우다 보면 ‘내 위기’가 온다고.
설교 들으시다 위기가 오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속죄제에서 우리가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지중에도 계속 죄를 짓는 존재들입니다.
그게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죄인 줄도 모를 때가 많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불쌍한 죄인인 것을 잘 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사는 걸 원하시겠습니까?
신자가 옳지 않게 살면 세상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그렇게 말하죠.
‘절에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그런 말 못 들어봤잖아요?
안 믿는 분들도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실 뿐 아니라 그 피로 죄의 성품과 행실도 깨끗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제사법을 주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말라기1장13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추한 죄를 제거하고 복되신 하나님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뭘 그렇게 매일 죄를 들먹이냐 내 맘대로 편히 살고 싶다 불만인 것이죠.
무심히 넘어간 수많은 죄들이 점점 하나님 앞에 나가는 나의 자리를 더럽히고 오염시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실 수 있겠습니까?
설령 또 같은 죄를 짓는다 해도 성령께서 깨우치실 때마다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바르면 사람이 바르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세워주시고, 가정을 복되게 세워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1장8,9절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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