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1심이 완전히 뒤집어진 항소심 판결이 나온 재판이 있었습니다.
포항지진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피해배상 소송입니다.
1심은 피해시민 50만명에게 1인당 3백만 원씩 총 1조5천억 원을 배상하라 판결했었죠.
이번 항소심에선 판결이 완전히 뒤집혀 배상금액은 0원이 되었습니다.
지열 발전이 지진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업무 과실은 아니라는 것이죠.
대법원에 항소할 거라 하더군요.
인재로 일어난 지진인데, 피해 배상도 못 받는다니 억울하죠.
이번에 sk휴대전화 유심 해킹 사고도 그렇습니다.
이용자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혹시 사이버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을까 두렵잖아요?
회사측의 손해배상 대책이 나오지 않아 결국 소송으로 가고있다고 하더군요.
법원의 잘못된 판결로 평생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평생에 그런 억울한 일이 없길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경우를 위해 어떤 법적인 조치를 취해 놓으셨을까요?
오늘 살펴 볼 속건제가 바로 피해자가 억울하지 않게 지정하신 제사입니다.
레위기의 5대제사 한번 복습하고 넘어갑니다.
5대제사의 종류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입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는 특정한 죄에 대한 제사는 아닙니다.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죠.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에 대한 제사라 반드시 드려야 용서를 받습니다.
지난 주 살펴 본 속죄제는 부지중에 범한 죄를 깨닫고 드리는 제사였죠.
오늘 속건제는 손해 배상의 성격을 강조한 제사입니다.
본문을 보면 손해배상을 해야 할 피해자는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하면 사람에게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던 하나님이 피해를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1. 그래서 속건제로 피해보상을 해야 할 상대는 먼저 하나님께 입니다.
15절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게 잘못한 걸 사과하고 손해 배상하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얼 잘못했습니까?
1) 첫째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죄한 경우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성물이라고 정하신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소의 기물이나 제사를 드린 제물은 하나님께 속한 성물입니다.
옛날에는 교회에 가면 모든 기물들이 성스러워 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떨고, 삼가던 그런 마음이 요즘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구약시대엔 그런 성물을 잘못 범했을 경우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구별하신 성물이 있습니다.
소산의 십일조, 가축이 처음 낳은 새끼, 처음 거둔 곡식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정해 놓으셨습니다.
만일 규정대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성물을 범한 죄가 되는 것이죠.
이중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십일조와 헌금일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인 십일조를 꼭 해야 하느냐는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왜 십일조라는 율법을 만들어 놓으셨냐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면 우리에게 적용하기가 쉽겠죠.
헌물은 우리가 번 모든 수입이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창조주의 세상에서 얻은 것이니 근본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죠.
내 힘으로 일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힘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또 일하고 싶다고 다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일하지 못해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자지구는 지금 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허기와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먹고 살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거기서 모든 헌물이 출발해야 하는 것이죠.
돈은 사람의 생명 같아서 누구나 돈 문제에 민감하고 돈에 집착합니다.
그런 본성 중에도 십일조와 헌물을 드린다는 것은, 내 생명과 삶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또 레위기27장30절을 보면 십일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의 1은 아예 하나님의 것으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것은 10의 9인 것이죠.
그래서 말라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을 두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아서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는 걸까요?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과 약한 자의 생계를 위해 쓰겠다고 하십니다.
제사와 신앙교육을 맡은 사람들이 레위인들이죠.
레위인들은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 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들이 세속적인 직업이 있다면 목사의 직무를 잘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레위인들에게 농지가 있다면 농사짓기 바쁠 것 아니겠습니까?
대신 레위인들의 기업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레위인의 소득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십일조 내기가 어려운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겠죠.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결과로 레위인들이 가난해지고, 일반인처럼 생계에 뛰어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제사 업무를 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 신앙을 지키지 못해 멸망한 것이잖아요?
오늘날도 그런 의미로 십일조를 생각하면 틀리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의 생활비, 교회 운영비, 구제와 선교를 위해 십일조와 헌금들이 사용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십일조를 폐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10의 1을 정하신 것은 그 정도가 성도들이 드릴 수 있는 적정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많이 드릴 수도 있고 적게 드릴 수도 있지만 적정선을 정해 주신 것이죠.
다만 드릴만한 믿음이 있고, 자원해 드려야 온전한 헌금이 됩니다.
새신자들이나 아직 믿음이 약한 신자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에게 십일조와 헌금을 율법처럼 의무화 할 필요는 없습니다.
월급 타서 빚 갚는 데 다 빠져나간다면 어떻게 십일조를 하겠습니까?
다만, 재정이 나쁘지만 하나님이 먹고 살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십일조를 하는 것은 자기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데 하나님도 그 믿음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전에 김동0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한 미국교회를 방문해서 재정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유학 중인 젊은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재정이 너무 빠듯해서 십일조를 내면 밥을 굶는데 그래도 십일조를 해야 하냐는 것이죠.
목사로서 어떤 답을 주어야 할까요?
젊은 부부가 딱해 보여, 형편이 그러면 십일조를 안 해도 하나님이 이해하신다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같으면, 그래도 한번 해 볼 것 같습니다’
부부가 이 말을 듣고 한번 해 보기로 합니다.
처음 얼마간은 정말 밥을 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내는 유학생에겐 기회가 없는 사무보조 일을 맡게 됩니다.남편은 학업을 마치자 곧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믿음이 십일조를 할 정도가 되면 약간 형편이 어려워도 하는 것이 믿음에도 좋고, 마음의 짐도 덜 수 있습니다.
십일조 때문에 가난해졌다는 말은 못 들어봤습니다.
진짜 악화 된 재정상태가 아니면 십의 일을 드리고 남은 십의 구만으로도 기가 막히게 잘 살아집니다.
속건제의 제물은 숫양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물에 손해를 끼친 것에 오분의 일, 즉 20퍼센트를 더 해서 제사장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잘못했으니 그냥 sorry만 하지 말고 손해배상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돈으로 계산하는 게 이상합니까?
피해를 입은 상대에게 돈이 아니면 뭘로 배상하겠습니까?
사람이 돈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니 그걸로 배상해야죠.
돈을 아까워하면 그건 진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아까워하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잖아요?
더 해주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아끼는 것하고, 아까워하는 것하고는 다르죠.
유명한 드라마의 명대사가 있죠.
얼마면 되겠냐?
아마 재산을 다 주고 그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면 원빈이 그랬을 것입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게 돈이라는 걸 은폐하고 다른 이유들로 합리화하려는 마음을 경계하십시오.
사람에게 돈 쓸 때도 쓰면서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까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돈의 가치보다 아래로 본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을 아까워하며 드리면 안 드리는 게 낫습니다.
형편이 되지 않아, 드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면 하나님은 그 마음만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다만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물질의 헌신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영과 육의 복을 다 받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2) 하나님의 계명을 부지중에 범한 경우도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17절,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성물에 물질적인 손해를 끼친 게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있는 죄 문제인 경우죠.
이때도 속건제를 드리는데, 물질의 범죄가 아니라 추가적인 배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지중에 죄를 범했을 때 지난주에 속죄제를 드렸잖아요?
무엇이 다를까요?
자기 죄를 속죄 받는 데 목적이 있다면 속죄제를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에 대해 배상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속건제를 드리면 됩니다.
속죄제는 고운 가루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지만 속건제는 반드시 숫양으로만 드려야 합니다.
비싼 제물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 배상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죠.
어느 제사를 드려야 할지는 제사 드리는 사람이 죄를 엄중히 여기는 정도에 따라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속건제를 드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속건제에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도 폐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거짓말을 하면 부모인 우리 마음에 큰 심려와 상처가 되는 것 같은 것이죠.
아이들은 부모가 빨리 용서해 주기만 바라고 싹싹 빌지만 부모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지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징계받을 것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매일 우리를 보살피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을 회개할 때, 이 사실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도들이 드린 속건제를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속죄로 죄는 용서 받았죠.
그런데 오늘 속건제의 규정으로 보면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하나님께 끼친 엄청난 손해는 어떻게 갚아야 하냐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서 53장이 정확히 답을 줍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내용이죠.
먼저 메시야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제물이 되셨다는 부분입니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께 우리의 죄가 전가되고 주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예언합니다.
10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예수님이 속죄제물만이 아니라 속건제물도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씻어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죄로 인해 하나님께 지워드렸던 모든 괴로움에 대해서도 배상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으니 아버지가 더 이상의 무슨 배상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속건제가 우리에게 더 감사한 것은 내게 대한 하나님의 마음도 다 풀리셨다는 데 있는 것이죠.
미국의 한 목사님이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 설교할 때, 어떤 불신자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말이 되고 말고요. 그분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죄와 고통과 슬픔을 다 합친 것보다 예수님은 크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죄에서 속죄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로 인해 받으신 모든 피해도 다 배상 하실 수 있으신 것이죠.
사람도 크게 보상받으면 억울했던 마음이 풀리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 법정에서 완전 무죄 판결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짓는 모든 죄는 세상의 사회법으로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또 죄의 결과로 우리의 인격과 삶에 생기는 나쁜 열매들을 피하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께 회개할 때 주님의 보혈로 용서를 받고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있는 것이죠.
속건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상처를 드린 것을 완전히 배상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괜찮으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동으로 모든 죄가 없는 것처럼 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여전히 근심하십니다.
당연하죠.
그것을 죄송해하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 회개하고 돌이킬 때 그나마 하나님이 마음을 놓으신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사람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에 드리는 속건제가 6장에 나옵니다.
1) 남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끼친 경우입니다.
옛날엔 얼마간 집을 비우게 됐을 때, 가축 같은 것을 이웃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맡은 사람이 딴 마음을 품고 사고를 낼 수가 있는 것이죠.
또 도둑질하거나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줍고 모른 척하는 경우, 남에게서 착취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죄는 부지중에 짓지는 않죠.
고의성이 있지만 버티다가 어느 순간 죄책감을 크게 느끼게 되는 경우 이 속건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서가 중요합니다.
속건제를 먼저 드리는 게 아니라 피해 배상을 먼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화해할 일이 생각나면 먼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려라
예수님이 이 속건제를 생각하고 하시는 말씀인 것 아시겠죠?
우리도 속건제의 의미대로 여전히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배상할 때도 원래의 것에다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돌려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해자가 입었을 정신적인 손해에도 배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남에게 끼친 손해를 반드시 배상하라는 말씀에 과거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학창시절엔 버스를 탈 때 회수권을 사용했습니다.
열 개가 붙어 있는 회수권을 사서 한 개씩 잘라서 썼습니다.
기억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접어서 침 묻혀서 자를 때도 있었죠.
그런데 이 분이 너무 가난해서 회수권 한 장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자를 때 선을 조금씩 비켜서 열 장이 아니라 열한 장으로 잘랐다는 거예요.
젊은 세대는 무슨 소린가 싶죠?
그게 계속 마음에 떠올라서 결국 그 버스회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사과합니다.
그때 속인 만큼 현재 시세로 계산하고 더 많은 액수로 배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닙니다.
예를들면 남을 험담해서 그 사람의 명예를 깎아내린 경우도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회개는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죄를 지은 그 상대에게 가서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사과할 수 있겠습니까?
뒷담화하고 사과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해도 반쪽짜리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도 남기지 않도록 모든 면에서 더욱 삼가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2) 당사자와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당사자끼리 잘 합의가 되었으면 끝인 것 같죠.
그러나 이웃에게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6장2절에서도 이렇게 이웃에 짓는 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하나님께 신실하면 이웃에 범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옳게 대하지 않았다면 그게 깨달아질 때 분명히 하나님께 회개가 나옵니다.
그 사람에게만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저절로 알게 되죠.
그렇기에 피해자에게 최대한의 배상과 사과를 한 뒤, 하나님께도 폐를 끼친 것에 대한 속건제물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죄는 늘 우리 마음과 행동에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속건죄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주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같이 미미한 자들의 죄에 마음이 상하시고 근심하시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속죄하고 영원히 곁에 두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하면 죄를 조금이라도 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잘못하지 말아야겠지만 만일 그랬다면 물질적, 정신적 배상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는 회개를, 사람에게는 고개 숙여 사과를 잘해야 합니다.
선거 유세장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골프하고 선거는 고개 쳐들면 진다’
성도들도 고개 쳐들면 패합니다.
잘못하고도 고개 숙여 사과하지 않은 죄는 우리를 점점 추하게 오염시킵니다.
반대로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해를 입힌 상대방은 이제 큰일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감옥에 쳐 넣는다고 하셨잖아요?
한푼도 남김없이 죄값을 다 갚기 전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단, 그런 사람을 상대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용서하라는 것이죠.
만일 미움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계명을 부지중에 범하는 것이고 속건제를 드려야 할 허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죄는 파급되고 옮겨지잖아요?
억울한 피해를 입은 것이 나중에 나의 허물이 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잘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이제까지 5대제사를 살펴 보았습니다.
5대제사는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속죄도, 매일의 감사도, 화목도, 내 죄에 대한 배상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입니다.
벼르고 별러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샬롬을 얻고 돌아가는 구약의 성도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매일 예수님 안에서 이 오대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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