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년간 우리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주나산의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리고 축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서신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보상도 약속하시죠.
빌라델비아 교회 같이 작은 능력으로 믿음을 지킨 우리 교회에도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그동안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따른 모든 성도님들을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8절상,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1)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문을 닫아 놓고 우리를 부르실리는 없잖아요?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보다 앞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누군가의 인도 때문만으로 교회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십육 년 전에 세워진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삶의 자리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그것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교회와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우리교회를 통해 주님의 뜻과 성도들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또 모든 성도님들의 삶도 계획하신 대로 그 문을 열어 인도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2)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으로 예수님 말씀과 믿음을 지켰습니다.
8절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셔도 우리가 외면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인들 못하시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을 상대하시는 것은, 하나님도 큰 일이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피조물이라면야 쉽게 움직이시겠죠.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권을 가진 죄인을 인도하신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상대하는 게 그래서 어렵잖아요?
예수님도 사람을 상대하실 때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도 하나님 속이 다 상하셨었잖아요?
우리가 신경을 써서 사람을 대하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상대하십니다.
게다가 우리는 성령께서 감화하셔도 막 모른 척 하잖아요?
우리가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고집으로 버티고 그러면 하나님도 참 힘들게 일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순종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것이죠.
그들의 믿음과 능력은 크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3) 빌라델비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좀 알면 좋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천 년 전, 현재 튀르키예 땅에 있었던 원주민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당시엔 소아시아라고 불리던 그 지역에 세워진 일곱 교회에 보내신 편지입니다.
요한사도가 본 계시와 환상을 기록해 고난당하는 교회들을 격려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들의 현재와 가까운 미래, 그리고 마지막 지구의 종말에 대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열두 사도 중 유일하게 요한사도만 생존했던 때이고, 서기 백 년 정도의 시기로 보면 됩니다.
일곱교회가 있던 소아시아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황제를 신처럼 섬겨야 했죠.
그때 교회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세속화, 황제와 로마신 숭배, 이단, 식어진 신앙, 그런 문제들입니다.
지금의 교회 문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죠.
빌라델비아에는 역사에 기록된 큰 지진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도시가 두어 차례 무너지고 재건되었습니다.
지진 뒤 로마제국에서 5년간 세금을 면제해 준 기록도 있습니다.
모든 생활 기반이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뜻이죠.
우리나라 포항 지진 뒤에 무서워서 아예 다른 도시로 이사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지진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빌라델비아의 부자들은 안전한 도시로 이주했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남아 있었던 것이죠.
사회적으로 뿐 아니라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교회입니다.
앞에 나오는 서머나교회는 요한사도의 제자인 유명한 폴리캅이 감독이었던 교회였죠.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지도했고, 나중에 요한사도가 머물던 곳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바울사도와 편지를 주고 받던 사이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누가 전도해서 세웠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빌라델비아의 인구는 약 천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가난한 도시에 능력 있는 지도자도 없이 유대인도 아닌 원주민 성도끼리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예수님께 칭찬받을 만큼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좀 억지를 부려봅니다.
우리 교회가 특출나지도 않고 우리의 믿음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믿음을 굳게 지켜 온 것이잖아요?
교회는 내 믿음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문제가 됩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해서 성도들은 자기의 죄를 민감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에 내 믿음이 크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죠.
저는 우리가 믿음이 작고 능력이 작다고 생각하는 것에 감사합니다.
이 작은 능력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니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80%는 삼십 명 미만, 오십 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도 그 정도 규모였을 것입니다.
작은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의 피가 믿음이 작은 자들에게 까지 공급되는 모세혈관입니다.
굵은 혈관만으로 피가 도는 게 아닙니다.
모세 혈관이 막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의 속성상 교회도 대형교회가 좋다고 생각하죠.
우리교회가 16년이 되었는데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게 모두에게 염려가 되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 중 예수님께 기쁨이 되었던 교회는 빌라델비아교회와 서머나교회입니다.
서머나교회는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내세울 것이 있다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내 처지가 작다고 낙심하고 자신감을 잃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정도 되면 하나님 섬기고 예수님 믿는 데 아무 문제 없잖아요?
작은 교회는 비교적 자신의 믿음을 솔직하게 볼 수 있는 게 장점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대할 때는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쓰죠.
사람들이 많은 신앙 환경일수록 더 자신을 위장하고 믿음을 포장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솔직하게 마주하기 보다 아무래도 사람을 더 의식하게 되죠.
그런 면에서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축복인 것이죠.
너와 나의 신앙의 모습이 다 드러나잖아요?
작은 믿음이면 작은 믿음 그대로 주님을 섬기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2.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보상의 약속입니다.
1) 유대인을 발 앞에 굴복시킬 것이라고 하십니다.
9절,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 이후에 여러나라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바벨론 포로 귀환 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오만명 정도입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보다 남은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이죠.
그 사람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 16개국에서 절기를 지키러 온 교포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업 수완이 좋다고 하죠.
유럽과 소아시아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허가받은 종교였습니다.
유대교인들은 황제숭배와 하나님 신앙을 혼합해서 큰 박해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교회는 황제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거나 같은 것이죠.
박해와 불이익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유대인들까지 괴롭힙니다.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당연히 불쾌하죠.
그런데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회가 똑같이 성경의 하나님을 믿으니 자칫 자기들에게까지 박해의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신앙을 명분으로 내세워도 속내는 결국 자기 이익과 안위인 것이죠.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지도 않는 사탄의 회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 때문에 은근히 따돌리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죠.
어떤 집사님은 오래전 회식 자리에서 술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뺨을 맞았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대부분 그렇지 않지만 유독 우리 믿음을 갈구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멸시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게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
우리가 받는 모욕을 하나님이 받고 계시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들을 우리에게 굴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하게 하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절하게 하신다는 뜻이죠.
박해자들 중 일부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굽신대는 게 뭐가 좋겠습니까?
내 신앙을 밉게 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무례함과 무지를 뉘우치며 형제가 될 때 가장 큰 보상인 것이죠.
성도님들도 그렇게 무시당하면서도 섬기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또 우리 믿음을 시험하고 조롱하듯 끊임없이 괴로움을 주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약속대로 우리 주님과 우리 발 아래 절하게 해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2) 시험의 때에 지켜주십니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우리가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더니 예수님은 우리를 시험으로부터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시죠.
예수님 말씀은 인내하지 않으면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시험을 이겼다고 내일은 더 쉽게 시험을 이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잘 성장하지 않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믿음은 축적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애를 써야만 합니다.
오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성공했다고 내일 사랑이 쉬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내일도 또 미운 행동을 할 것이구요.
그래서 ‘내 인내의 말씀’이라고 하신 것이죠.
우리 각자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더 감당해야 할 인내의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인내의 말씀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험의 때에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요즘 연예인들의 노후 삶을 보여주는 프로들이 있죠.
화려했던 삶이라서 그런지 말년이 더 쓸쓸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는 태진아씨도 참 고생하더군요.
탤런트 임현식씨는 20여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농촌에 한옥집을 아주 잘 지었더군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임현식씨가 집안 어디에 있든 그 모습이 참 외로워 보였습니다.
특히 초라한 식탁을 차려 혼자 밥을 먹는 것이 더 그랬습니다.
한때 영화 인생을 풍미하고 산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시험하는 때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켜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개인의 죽음도 맞이하고, 종말이 온 것 같이 무서운 인생의 절망도 맞이합니다.
그 모든 시험에도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젊음을 부러워 하지만 청년들도 노년, 장년 세대만큼 힘듭니다.
지금은 신입직원 채용이 줄어 청년들이 일자리 얻기가 점점 어렵다죠.
신입 한 자리가 나면 2백 명이 달려들어 지원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우울한 현실에서 자조와 혐오 문화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감동의 실화를 만들어 낸 스노보드 최가온선수가 있습니다.
세 번 도전 기회가 있는 경기에서 첫 번째 시기에 넘어져 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선수가 강한 정신력으로 세 번째 시기에서 완벽한 기술을 보여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죠.
저도 그 장면을 TV로 시청했는데 정말 그 의지에 박수가 나왔습니다.
최선수의 금메달 획득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한 아파트에 걸렸습니다.
그 아파트가 강남의 부자들이 사는 반포의 한 아파트였다고 하더군요.
현수막 사진 아래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진정한 금수저가 금메달 땄네.
백억 아파트에서 금메달 딴 걸 자랑하냐
금메달 보다 저 아파트에 사는 게 더 부럽다.
어린 선수의 부상 투혼에 박수를 보내기보다 상대적인 박탈감에 그런 분노가 표출되는 것이죠.
사실 이제는 하위 계층에서 상위 계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사다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엔 소득 순위 50% 부모의 자녀들이 상위 25%로 진입할 확률이 13%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은에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확률이 4%로 급감했다고 합니다.
높다란 장벽 앞에서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만 좌절하는 게 아닙니다.
장벽 안 사람들도 종류는 다르지만 똑같은 무게의 고통들을 감내하며 살 것입니다.
인생이 우리에게 친절할 때는 정말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가시와 찔레로 우리를 찌르고 무수한 피, 땀, 눈물로 얼룩져 있죠.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평생을 환난과 시험 속에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 모든 시험을 면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단어의 번역이 좀 잘못 된 것입니다.
면하게 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시험 중에 우리를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면하게 될 시험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삶을 평가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그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받는 시험과 환난으로 부터는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의 아들이 친구들과 팬션으로 놀러갔다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수영장에 뛰어드는 순간 목이 부러진 거예요.
친구들이 사고를 눈치채지 못하고 방치하는 바람에 뇌가 엄청나게 부어 올라 위급상황이 됩니다.
의사는 식물인간 상태로 살거나 깨어나도 뇌병변 장애인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기적적으로 깨어납니다.
전신마비는 피하지 못했지만 뇌는 정상이었습니다.
형제가 정신이 돌아오는 데 무엇이 제일 먼저 생각났을 것 같습니까?
납기일이 지난 카드값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고 합니다.
겨우 눈을 뜬 아들을 보고 기뻐하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제일 먼저 했겠습니까?
‘엄마, 나 카드 값 좀 입금해 줘’ .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났다는 게 너무 기쁘기도 하면서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된 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아들이 불쌍해 울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이 얼마나 대책 없이 살았는지 알 수 있죠.
사고 이전에 이 형제는 목사의 아들이지만 불신자나 다름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전신마비의 사고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비로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금은 위라클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박위형제와 함께 일합니다.
굳은 새끼손가락의 튀어나온 마디부분을 이용해 자판을 두드리고 영상 편집을 합니다.
운전도 하고, 입으로 치약 뚜껑도 열고, 일상 생활을 잘 해 냅니다.
하나님이 형제를 이 시험의 때에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 어려움을 이기고 해맑게 웃는 형제에게 장애가 큰 문제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인생의 큰 사건과 사고를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냐, 왜 하필 나냐고 무수히 되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그 환난을 이기면서 그런 질문은 어느새 입술에서 사라지죠.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신뢰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 때로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것도 녹록치 않은 데 힘들게 교회까지 다니는 걸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 믿음의 십자가를 지면 시험의 때에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대신 지고 갑니다.
끝까지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로다
고대 유적들을 보면 건물은 다 무너지고 기둥만 남은 게 많죠.
기둥은 건물을 지탱하고 버티는 것입니다.
건물을 리모델링 할 때도 기둥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기둥 같습니다.
우리교회도 16년 동안 아마 백여 명은 왔다가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기둥 같은 성도님들이 여전히 남아서 우리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델피아에 가면 정말 기둥만 남은 교회가 있습니다.
터키 전역이 이슬람화 되었을 때 유일하게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 교회에서만 14세기까지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 계시록 편지 이후 천삼백 년간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죠.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는 오늘 예수님 말씀을 대를 이어 끝까지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기둥이 되어 우리 교회를 지탱한 모든 성도님들을 하나님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아무나 기둥 되는 거 아닙니다.
믿음도, 능력도, 건강도, 물질도 주셔야 하는 것이죠.
우리 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까지 하나님나라를 떠받치는 기둥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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