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요한계시록22장10절-17절)

남수연 2021. 4. 23. 12:06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일곱 인을 떼셨습니다.

이후로 주님 오실 때까지를 성경은 종말의 시대로 봅니다.

우리는 이미 일곱인이 떼어진 재앙의 시대,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삶이 힘든 건 당연한 것이고, 성도이기에 당연히 우리는 승리하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중간을 많이 건너 뛰어 마지막 장으로 왔습니다.

 

1. 먼저 건너 뛴 부분에서 성도님들이 대개 궁금히 여기시는 두 가지만 간단히 설명해 드리고 본문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 중간에 있는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도 일곱 인 재앙과 의미가 같습니다.

이 세가지 재앙은 시간 순서적으로 일렬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회오리 바람처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같은 경우 심판이 계속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잖아요?

단 좀 심화적으로, 좀 더 디테일하게, 그리고 재앙을 일으키는 인물이나 사건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당시에 존재했던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예시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짐승의 표 666 같은 것이죠.

전에 이 부분만을 따로 설교한 적이 있으니 많이 궁금하신 분은 찾아서 읽으시면 됩니다.

짐승은 사탄을 배후에 둔 악한 인물들의 상징입니다.

짐승의 표 666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을 등지고 이들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교회 당시에는 그들이 경험했던 박해자 네로황제이고, 네로라는 힌트를 주기 위해 당시 헬라어가 갖고 있던 숫자값을 네로란 이름에 대입해 666을 계산해 낸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로마황제의 이름을 그래도 밝힐 수는 없는 것이죠.

한때는 그것이 바코드라 그랬고 최근엔 백신이다라는 말까지 나오더군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짐승의 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정하도록 사람들을 대거 미혹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런 사탄의 인물은 시대마다 다 있습니다.

 

또 종말론에서 해석이 크게 갈라지는 천년왕국설에 대해서입니다.

계시록 20장에서 예수님과 성도들이 천년동안 왕노릇 한다는 데서 천년왕국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복잡한 것은 빼고 두 가지만 아시면 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 지지하는 해석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입니다.

성도들이 다스리는 천년 기간을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죠.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으니, 말이 되죠?

그래서 장로교의 종말론은 간단합니다.

지금이 종말시대이자 복음이 전파되는 천년 교회시대인 것이고 복음전파가 끝난 뒤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선악 간에 심판을 받고 영생과 영벌에 들어갑니다.

이걸로 끝입니다.

물론 그 때 잠자던 자들은 부활하고, 살아있던 사람들은 죽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살아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뭐 지구가 사라지기 때문에 있을 곳도 없죠.

이것을 종말론자들이 휴거라고 부르는데 성경에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

반면 종말론에 치중하는 교파나 이단종교에서는 다니엘의 예언과 계시록을 시간순서 그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한데서 차이가 납니다.

회오리 같이 감겨있는 내용들을 일렬로 펼쳐서 늘어 놓은 데서 이런 해석이 나오는 것이죠.

이것은 전천년설 종류로서 간단히 말씀드려도 좀 복잡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은 아마 거의 이런 종말론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 모르게 공중에서 비밀리에 첫 번째 재림을 하시는데, 그때 성도들이 휴거되어 공중에서 칠년 동안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합니다.

땅에서는 칠년 대환난기가 오고 그때 유대인들이 대거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칠년이 지나면 예수님과 성도들이 지상으로 재림해서 숫자 그대로 천년동안 세상사람들을 통치합니다.

천년이 지난 뒤 마귀가 무저갱에서 나와 세상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데 이 마지막 전쟁에서 예수님과 성도들이 이깁니다.

이후 지구역사가 끝나고 모든 영혼들이 부활해서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좀 복잡하죠.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믿는다고 해서 이단이다, 틀렸다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우리 청년시절에 이 전천년설과 종말론이 모든 교단에 급속히 유행했습니다.

저도 그 당시 처음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게 정통이고 올바른 해석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그대로 이 종말론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고 보니 그게 오류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이나 성경 전체에서 계시하신 종말에는 두 번의 재림도 없고, 지상의 천년왕국도 없고, 종말이 이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복잡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상징이 많은 계시록에, 전체 성경과 다른 내용이 나온다면 그것을 상징으로 보고 전체 성경에 맞춰 해석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는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현재가 바로 종말의 시대이자 복음이 전파되는 상징적 천년왕국시대입니다.

그 기간에 구원받을 성도들이 다 돌아오면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시고 모든 영혼들은 심판을 받고 영벌과 영생으로 나뉘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죠.

이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심판주로 등판하셔서 우리가 믿은 믿음대로 영생을 얻는 것만 남았습니다.

3)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에 대해서도 계시록은 다채롭게 보여줍니다.

천국은 21장과 22장에서 아름답고 신비하지만 역시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황금길, 진주문, 이런 것이 다 상징입니다.

그것 이상일 거예요.

천국에서 누릴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21장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있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수십년 이내에 우리 대부분은 개인적인 종말을 맞고 이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죠.

사망을 거쳐야 된다는 게 문제지 지금 천국에 간들 아쉬운 게 뭐가 있겠어요?

천국의 생애가 너무 기대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2. 이 모든 재앙과 심판과 영광을 다 보여주신 뒤 오늘 본문은 결론에 해당됩니다.

1)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고 모든 걸 알게 된 일곱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한 이 천국의 삶을 위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것입니다.

모든 환상으로 안내했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10절,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반드시 이뤄진다는 이 환상과 예언을 인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개하고 알려서 모두에게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알게 하라는 것이죠.

성도들은 인간의 최후에 대해 입을 봉인하고 살면 안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등바등 살기에만 바쁜 저 사람의 죽음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우리는 알잖아요?

이것을 알리지 않는다면 천국을 봉인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구원과 심판을 알려야 한다는 성령님의 자극으로 그래도 뭔가 전도해야 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발적으로 지는, 십자가를 전하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절대 내려놓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런데 구원과 심판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의 결과는 예상 밖입니다.

11절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복음의 비밀을 열어서 보여줄 때, 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믿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믿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의 증거는 갈 길이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결국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을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듣고도 각자가 자기 갈 길을 간다는 것에 두렵고 겸허해질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교회에 나오고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며 몇 년이 흘렀는데, 어느 때 부터인지 내가 그 모든 내용들을 진짜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어느새 이쪽 편에 서서 저벅저벅 의와 거룩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자꾸 교회를 오라고 하고, 성경공부를 하라고 하고, 봉사를 하라고 해서 따라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입니다.

거듭난 이후로는 자기 발로 하나님을 향해 갑니다.

사람마다 역량이 달라 누군가는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것 같아도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어갑니다.

제가 지난주에 아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요.

알탕을 시키고 마스크를 낀 채 스마트폰을 보다 밥이 나와서 마스크를 벗는 순간 앞좌석에서 밥을 먹던 분이 저를 알아보는 거예요.

누군가 보니까 오금동 교회 때 김연자권사님을 따라서 몇 번 나왔던 분이시더군요.

약간 지적 장애가 있으시고 성격이 아주 괴팍하고 특이해서 성도님들과도 잘 안 어울리셨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형편이 어려워서 헌금을 못한다며 너무 죄송해 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또 헌금을 강요하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오셔서 그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헌금을 하겠다며 그날 처음으로 오천원을 헌금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너무 의외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게 한 3년 쯤 전 일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서 예배 끝나고 아주 침울한 얼굴로 폐암진단을 받았다고 말씀하는 거예요.

이제 못 나올 것 같다고 성경책을 한권 달라시더군요.

하나님께 기도하며 잘 치료받으면 고쳐주실거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죠.

그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돌아가셨나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성도님을 만난 거예요.

다행히도 기적적으로 폐암이 치료되었다고 하더군요.

얼굴도 화색이 돌고 아주 건강해 보이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로 이사 왔다고 하니까 반색을 하시면서 당장 다음 주부터 나오시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전에도 대화를 나눌 때 느낀 것은 이 분이 하나님께는 괴팍하지 않고 그렇게 마음이 아기처럼 부드러우시다는 것이었어요.

사람에게는 잘하는 데 하나님께 괴팍하게 구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제가 교회 나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오고 싶어 기뻐하는 게 진짜로 보였습니다.

요즘은 인원제한이 있으니 코로나가 좀 잡히면 나오시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아무리 권하고 공들이고 애를 써도 결국 믿음에서 멀어지는데, 누군가는 항상 하나님 주위를 맴돕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국 다시 하나님께로, 넘어져도 또 다시 하나님께로 계속 회귀하는 성도들의 믿음이란 게 참 경이롭습니다.

 

2)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또 이 말씀은 우리가 항상 그렇게 예수님 안에 있되 의롭고 거룩한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불의하고 더러운 자가 아니라 의롭고 거룩한 자인 것이 분명합니까?

또 어쩌면 교회 밖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의롭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는 의와 거룩은 하나님께만 속한 성품입니다.

타락한 사람 안에는 타락한 의와 거룩만이 존재합니다.

일반인들에게 나타나는 의로움이나 종교적인 거룩함은 하나님의 관점에 적중하는 의와 거룩이 아닙니다.

심판의 때에 하나님 앞에 그것을 내놓는다면 그 내면에 있던 이기적이고 교만한 실체를 주님께서 낱낱이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 나 자신을 의롭다고 말하고, 죄악이 없는 거룩한 존재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고백이 맞는 것이죠.

사람이 의롭고 거룩하게 되려면 유일하게 예수님의 의와 거룩을 취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나의 불의와 추한 죄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을 진실 되게 믿을 때 주님의 의와 거룩을 우리에게 덧입혀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이것이 법적으로 인정될 뿐 아니라 실제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주님의 의와 거룩의 본성을 심어주십니다.

우리 안에는 분명한 죄의 본성이 있듯이 분명한 성령의 새 본성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 하고 더럽지만 이미 의롭고 거룩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성도들의 이런 이 두 본성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긴장관계로 인해 14절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이 두루마기는 본래 주님의 피로 희게 씻은 거룩한 의의 옷입니다.

그러나 매일 죄의 본성에 오염되는 두루마기를 항상 깨끗이 빨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본문에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계속해서 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대로 매일의 죄에 대한 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면서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대부분 유야무야 넘어갑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의하면 매일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게 무엇입니까?

여전히 짓는 죄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시는 것이잖아요?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만만히 짓는 죄, 회개하지 않고 넘어가는 죄를 우리는 별일 아니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한 순간이라도 성령께서 방금 지은 죄를 깨닫게 해주실 때 즉시, 혹은 하루를 마치는 기도에서라도 꼭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매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구원파입니다.

계시록19장8절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씻어주신 두루마기를 늘 깨끗이 빨아 더럽히지 않는 자가 복되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영적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가능합니다.

우리에겐 육체도 있기에 영적 긴장감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새 본성이 활동을 쉬는 순간, 곧 옛 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믿지 않던 때,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영적인 무장을 해제하면 마귀에게 뜯기고 시달리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믿음의 긴장감을 갖고 거룩하게 사는 것에 싫증을 내면 안됩니다.

그게 편할 것 같은 유혹이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편하기는커녕 얼마 안가서 마음과 생활은 정신 못 차리게 분분해 질 것입니다.

성도들은 새 사람, 새 본성이 이겨야 평안합니다.

새 본성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핏 생각하면 금욕, 종교적, 수양, 신앙생활과 봉사가 떠오르지만 그건 방편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 걸 쉬지 않고 열심히 하면서도 의와 거룩과는 동떨어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의와 거룩을 종교적인 수양이나 활동, 성경공부, 기도, 그것 자체에 목적을 두면 열심히 할수록 점점 새 본성이 아니라 옛 본성에 가까워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의와 거룩으로 산다는 게 뭔지를 알려면 우리의 본보기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면 되겠죠.

예수님께서는 종교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하나님을 열정으로 섬기셨고, 계명을 지키셨고, 사람들과 항상 어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은 것보다 오늘 사랑하지 않은 게 더 큰 죄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통해 사람을 괴롭히고 공격합니다.

그게 다 내 가족이고 주변사람이고 교인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산다 해도 본래의 기질과 인격이 잘 안 바뀝니다.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사람들도 가만 보면 거의 개성과 품성이 잘 안 바뀌죠.

그게 유전적으로 강한 형질이고 환경과 교육과 습관에 의해서 돌처럼 굳어진 개별적인 인격이고 개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걸로 대부분 남에게 상처를 주는데 자신에겐 너무 그게 옳고 익숙해서 상처를 주고도 잘 모릅니다.

마귀는 항상 그걸 이용해 성도들을 피차 공격하고 힘을 꺾어 버립니다.

가족끼리 그런 걸 당하면 정말 살맛 안나죠.

옛날엔 그런 죄성에 내 죄성이 만나 양쪽이 박살이 나거나 참고 분노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 안에 심어진 새 본성은 사랑으로 포용하며 내가 함께 죄에 빠지는 걸 방어할 만큼 강합니다.

강하게 되도록 매일 그렇지 못한 나를 회개하고 씻으며 평생 사랑을 이뤄가는 것이 성도의 의와 거룩입니다.

반면에 15절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한 쪽은 계속해서 깨끗이 빨고 한 쪽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더럽히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새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느냐 성 밖에 있냐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복음을 열어 전하고 사랑으로 의와 거룩을 지켜가는 데는 당연히 수고와 희생도 따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최종적인 보상을 또 약속하십니다.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말씀은 평범한 말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언어의 신비가 있습니다.

보통 ‘내가 속히 가리니’로 해야 맞잖아요?

속히 오신다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또 ‘오리니’라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이미 와 계신 게 되는 것이죠.

어느 곳에나 어느 시간이나 존재하시는 하나님만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셔서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신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십니까?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고생한 자녀들에게 얼른 좋은 것으로 위로하고 축복하시려는 것이죠.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하고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고단한 수고와 희생이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져도 괜찮아요.

주님은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절대 잊지 않고 그 날에 상을 주실 것입니다.

내 믿음의 수고가 사람들에게 보다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늘 생각한다면 우리의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계시록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그 영광스럽고 영원한 결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믿음으로 값없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 복음과 그 결말을 인봉하지 말고 봉인을 열어 사람들에게 보이며 살기를 축복드립니다.

우리 두루마기를 주님의 보혈로 씻고 계속해서 씻되, 종교 실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열의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도록 힘을 주시고 우리의 수고에 반드시 현재의 기쁨과 공급으로,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상급으로 기념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