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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가장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동안 신구약성경에서 말씀하고 예고된 모든 것이 이뤄지는 걸 한 눈에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통해 구원의 광대한 역사를 보는 안목을 갖게 되죠.
그러면 현재의 모든 영광도, 고난도 잠시라는 걸 저절로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과해서 마주치게 될 천국,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도 계시록에서 보여줍니다.
단 요한사도가 본 환상을 표현한 방식은 묵시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다른 성경도 똑같습니다.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가 천국의 일면을 환상으로 보았잖아요?
그들도 요한계시록처럼 묵시적인 방식으로, 거의 똑같이 천국을 소개합니다.
보여주신 것도, 표현하는 방식도 통일하셨다는 것이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천국을 그려주면 안되는 거잖아요?
또 표현은 묵시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천국을 그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아직은 베일에 가려두신 것이죠.
그 놀라움과 감격과 기쁨은 최종적인 주님의 날을 위해 가려두신 것입니다.
우리 앞에 그 커튼을 열어 보여주시는 순간 너무 놀라 입을 못 다물고, 감격이 너무 커서 주저앉아 울지도 모릅니다.
전 너무 기대가 됩니다.
모두들 기대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천국이 뭐 저래?’ 그렇게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렴 잠시 거처할 지구자연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이신데 천국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믿고 가는 천국이죠.
지난주엔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주변 인물들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근원적인 의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정말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 아니겠습니까?
‘천국이 정말 존재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정말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걸까’ 이런 의문은 우리 안에 항상 잠재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이 계시록의 환상을 왜 요한에게 보여주고 기록해서 전해주십니까?
당시의 성도들도, 우리도 이 증거들을 통해 신앙의 질문들에 확답을 얻고 더 굳게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르라는 것이죠.
오늘은 요한사도가 천국에서 본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한이 보니 진짜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예수님께서 성부하나님과 똑같은 경배를 받으셨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성도들을 구원하신 분이셨습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요한사도가 보았던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에 대해 오늘 큰 은혜의 말씀을 받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요한이 먼저 본 것은 하나님의 플랜이 담긴 일곱 인으로 봉인 된 두루마리였습니다.
1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하나님 손에 글씨가 가득 씌어진 두루마리 문건이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일곱 개의 인으로 봉인되어 있었다고 하죠.
척 봐도 이 두루마리에 중요한 내용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봉인했다는 것은 봉인이 해제되는 순간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이 실행된다는 뜻입니다.
컴퓨터의 실행키를 누르는 순간 프로그램이 작동되는 것 같습니다.
이 두루마리에 쓰여 진 내용은 무엇일까요?
뒤에 봉인이 떼어질 때 마다 일어나는 일을 보면 뭐였는지를 알 수 있죠.
봉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지구상에 뭔가 큰 격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두루마리가 지구종말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두루마리는 오히려 예수님의 대속을 통한 성도들의 구원의 시나리오입니다.
이 두루마리에 포함된 것은 주님의 부활 이후부터 최후의 심판까지입니다.
그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지구상에는 늘 전쟁과 재난이 있고, 잔혹한 통치자가 있고, 때에 따라 성도들이 박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다 모아지면 계획하신 대로 지구 역사가 종결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영혼들이 최종심판을 받게 되죠.
그때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계시록은 끝납니다.
요한사도 역시 하나님 손의 두루마리를 보면서 이런 내용을 짐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두루마리의 봉인을 해제 하시려나 기대하고 기다렸겠죠.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그 봉인을 떼실 생각이 아니신 것입니다.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의 원어는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손바닥에 얹혀있다는 의미입니다.
성부께서 이것을 집행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 가져가라는 의미죠.
하나님이 계획하고 봉인한 두루마리를 누가 감히 집을 수가 있겠어요?누가 감히 그 봉인을 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봉인하신 것은 하나님만 열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봉인을 열 생각이 없으신데, 다른 누구도 그 봉인을 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요한사도가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4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요한사도는 지금 황제와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도입니다.
매 맞고, 짐승에게 찢기고, 광야 동굴을 전전하는 성도들을 생각할 때 속히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 돼야 하는 데, 그럴 수 없다니 울음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 장로 중 한사람이 요한사도에게 말합니다.
5절,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2. 일곱 인을 떼실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있었습니다.
1)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7절에 보면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행시키실 분은 바로 성도들이 환난과 가난과 고난 중에서도 믿고 따라온 예수님이십니다.
이미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심판을 내게 맡기셨다고 하셨었죠.
창조와 구원의 모든 계획을 주관하셨던 성부께서 그 몸을 내어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성자께 심판을 다 맡기신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님께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 박해와 눈물과 수고로운 생애를 기꺼이 바친 성도에게 구원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가려내시고,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시고, 천국과 지옥의 문을 그들 앞에 여실 것입니다.
계시록교회의 성도들은 이중적인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로마제국에 대해 하나님만 유일하신 신이라는 믿음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또 유대교인들로 부터의 모진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바울사도의 복음전파에서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사람, 유대교인입니다.
단일신 여호와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기독교는 신성모독이요 이단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당하는 문제도 비슷합니다.
꼭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까?
세상은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합니다.
세계의 종교들은 사이좋게 구원을 인정하자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생긴 크리슬람이란 신조어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기독교와 이슬람이 하나가 되자는 운동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번에 이라크를 방문한 교황이 3월8일에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에서 종교간 통합기도회를 가진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전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신의 자비엔 한계가 없다, 신앙이 없으면 양심을 따라 행동하면 된다’
세계 78억 명이 제각기 양심에 따라 살면 모든 게 오케이라는 말입니다.
자비에 한계가 없으신 신이 양해해 준다는 것이죠.
타종교들은 이렇게 관대한데, 기독교만 우리에게만 구원이 있다 이러니 종교통합을 방해하는 골칫거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 신앙이 없어도 하나님은 구원하실 것이다, 사람이 신이다’
점점 더 이런 사회가 되어 가는데,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께만 구원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 혼자 조용히 믿는 것 까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복음을 남에게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찬식이 이런 고백이잖아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오늘 요한사도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내가 길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하셨던 그 예수님께서 구원과 심판의 봉인을 떼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뗄 자격이 있으신 것은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5절,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원어에 맞는 해석은 일곱 인을 떼시기 위해서 이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겼기 때문에 자격을 얻으신 게 아니라, 자격을 얻기 위해서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비슷하지만 의미가 좀 다르죠.
그러면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기 위해서 무엇을 이기셨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하나만 알고 있으면 믿음이 그대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분명히 퇴보되고 있을 것입니다.
적은 지식으로 활력있는 강한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간혹 성경을 잘 몰라도 신실한 믿음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 분이 성경을 더 배운다면 더 복되고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이런 신앙의 절기에는 믿음의 원리를 다시 배우고 다시 이해하고 믿음을 견고히 갖는 게 좋습니다.
성경은 이런 원리들을 상당히 자세히 심도 있게 진술해 놓았습니다.
자꾸 반복해 들으면서 조금씩 이해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기셨다는 걸 보통 마귀와 싸워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마귀와 싸워서 이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귀를 하나님의 맞수로 보는 것은 아주 잘못 된 오해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피조물일 뿐이고, 반역의 범죄와 사악함으로 이미 심판을 받고 시한부로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죄인들에게나 권세를 부리는 것이지, 예수님이 사탄을 이겨야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기신 것은 사망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셨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람은 누구도 사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5장12절은 어떻게 사망이 사람에게 들어왔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하나님은 선조 아담과의 계약에서 아담에게 모든 특권을 주되, 단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사망의 형벌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라는 하나의 금지조항으로 그 순종의 여부를 판단하기로 하셨죠.
불순종은 단지 과일 하나 따먹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도저히 함께 살지 못할만한 배반과 불신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직접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은 후손 인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이 살 수가 없어요.
결국 아담이 선악과를 범한 즉시, 그 형벌도 집행되어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영원한 영적 사망을 말합니다.
이 사망의 법칙은 아담의 후손 모두에게 영원히 적용,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자연적 사람들은 영의 죽음 상태에 있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섬기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을 구원하고 싶으신 하나님과 구원 받아야 할 인간에게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해결하기 힘든 장애물인 것이죠.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여 사망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이기신 방법은 6절에 나오죠.
내가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서 죽임을 당해 사망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좀 이해가 안되죠?
우선 ‘어린 양의 죽음’은 구약성경에서 오랫동안 그 의미를 교육하셨기에 무엇을 말씀하는지 누구나 알 것입니다.
구약성경 출애굽의 유월절 양, 레위기에서 제사로 드려진 양,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한 속죄를 위해 죽임당하는 어린 양.
이 모두가 남의 죄를 대신 해 죽는 제물이죠.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속죄를 위한 것임을 미리 공부시켜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유일한 인간이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만 죽는 건데, 죄 없으신 분이 죽으신 것이죠.
사도행전 2장 24절에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망은 죄인과의 계약이기에 죄 없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죄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써 사망도 이기신 것이죠.
그게 예수님 한 분의 이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5장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죄를 대속했다고 믿을 때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이 됩니다.
의인은 죄가 없기 때문에 우리도 이미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이건 원리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이런 일이 성립되는 거예요.
영생은 나중에 받을 게 아니라 이미 받았다고 요한복음 5장24절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감격을 바울이 고린도전서15장55절에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가 사망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시고 믿는 성도들도 사망을 이기게 되었으니 이제 이후의 계획이 담긴 두루마리를 쫙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구원의 역사가, 누군가엔 심판의 역사가 봇물 터지듯 일어나는 것이죠.
이 순간도 수많은 사람이 그 생을 마치고 영생과 영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 미국에서만 코로나로 1분에 1명씩 사망했잖아요?
이 두루마리 어딘가에는 나에 대한 구원 계획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인지.
시편 139장 16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죠.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할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기 위해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의 속죄를 믿는 우리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단지 믿는 것에서 그 다음은 관계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어느 수준이 되면 배움보다 관계가 더 깊어져야 균형 잡힌 신앙이 됩니다.
내 믿음의 평가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이고, 그럼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계시록 14장4절에서 구원받은 성도 십사만사천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예수님이 본이 되시고,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따라 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결단하고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갖고, 주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3. 이렇게 어린 양을 믿는 자, 성도들에게 일어날 결과를 보여주십니다.
본문 말씀에서 성도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노래를 부르는 데 그 내용이 ‘예수님과 그의 피로 사신 성도’들에 대한 것입니다.
9절,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절,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이자 제사장들이고, 왕 노릇할 자들이라고 노래로 칭송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성도들이 지금 구박덩어리가 되어 광분한 황제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가고 도망 다니며 생을 낭비하는 것 같지만 결과를 보니 그게 아닙니다.
영원한 세상에서 그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핍박을 당한 성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며, 지금 내게 권세를 부리고, 교만히 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것을 꼭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두렵거나 부럽기는커녕 긍휼히 보이는 것이죠.
그래야 우리가 이 땅의 제사장의 기도를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두루마리를 받으신 어린 양 앞에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으로 경배하며 찬송을 합니다.
여기서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삶의 필요를 구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나라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나라가 땅에서 완성되는 걸 위해 기도로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나를 좇는 너희도 보좌에 앉아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함께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이 땅의 삶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귀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았지만 구원받으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게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복음에 참여하고 그를 통해 누군가 구원받는 것을 볼 때, 그 기쁨을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나를 만족시키려고 살아봤지만 그러면 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나를 만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을 때도 완전하게 만족스럽지 않다는 걸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목적을 두면 조금만 희생해도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기도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죠.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옛자아를 만족시키려고 작동하기에 기도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항상 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일곱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기도로 사는 것이잖아요?
구하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구하지도 않고 능력이 안된다 의욕을 잃고 낙담하고 완고해질 때가 너무 많은 게 우리의 고질병입니다.
다만 기도의 원칙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이 땅의 삶 두 가지를 다 아름답게 성취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마귀와 인간 누구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왕노릇하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사도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보니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다 사실임을 확인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기에, 주님이 사망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이미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하나님나라와 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하는 데, 그러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에 굳건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보람 있게 헌신하는 것에 더 맞춰져가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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