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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예수님께서 일곱 인봉 된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십니다.
봉인을 떼시자 지구상에 재앙들이 쏟아집니다.
이 재앙들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 거의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이미 보아왔던 낯익은 내용들입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과 주변국들의 심판에 대해 받은 환상과 흡사하죠.
또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고했던 주님의 재림과 종말의 징조도 계시록의 재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천국을 계시하실 때도 그랬듯이,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도 일관성 있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성경을 종합해서 계시록의 재앙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요한계시록으로 환타지 소설들을 쓰게 될 것입니다.
먼저 이제부터 전개되는 환난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6장부터 16장까지가 인을 떼실 때 일어나는 세상의 재앙과 환난입니다.
먼저 일곱인을 떼시는데 마지막 일곱 번째 인을 떼었을 때 다시 일곱 나팔 재앙이 오고 일곱 나팔 재앙 마지막에 다시 일곱 대접 재앙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일곱인 재앙, 일곱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의 순서로 펼쳐집니다.
재앙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악이 스스로 만들어 낸 재앙 편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 자체가 재앙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자유의지로 재앙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것과 연동해서 구원 역사를 경영해 가시는 것이죠.
1)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앞으로 나오는 재앙과 사건들은 시간순서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일곱인에서는 전체를 보여주고, 나팔재앙과 대접재앙에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과 특정한 인물, 사건들이 예로서 제시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2) 또 이 재앙들은 지구 종말 직전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완성 이후부터는 이미 심판의 재앙이 진행되는 것이죠.
이 계시의 말씀은 언제일지 모르는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교회들에게 곧 닥칠 일이었듯이, 시대를 불문하고 이 성경을 받은 성도들의 시대에 대한 예언입니다.
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우리 세대가 이런 재앙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환난을 잘 대비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라시는 것입니다.
그럼 일곱인 재앙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첫째 인을 떼실 때 이 땅에 일어나는 재앙의 현상입니다.
1절,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절,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인을 떼셨더니 보좌 아래에 있던 네 생물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오라’라고 말하자 흰 말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곧 일어날 재앙을 말과 인물로 상징한 것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활을 가졌다는 것과 면류관을 썼다는 것과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는 것이죠.
이 흰 말을 탄 사람을 예수님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반대로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렇게 상징적인 내용이 너무 많다보니 해석도 구구하고, 짜맞추려들면 얼마든지 소설을 쓰기 쉬운 게 계시록입니다.
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는 오히려 기가 막히게 성경을 꿴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흰말은 평화를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활동으로 보는 게 가장 합당합니다.
뒤에 나팔재앙과 대접재앙에도 사탄의 세력이 엄청난 활약을 합니다.
전체 형태를 설명하는 일곱인 재앙에 이 중요한 내용이 빠지면 안되겠죠.
예수님은 인을 떼고 계신데 갑자기 말을 타고 나타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이기고 또 이기려고 애를 쓰는 것도 맞지 않죠.
인의 내용은 일관되게 재앙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박해하고 죽이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구원에 반격해 영혼을 노략질해 가는 적그리스도 전략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적인 인물, 종교, 과학, 진화론, 무신론, 문화 등에 미혹되어 영혼이 팔려가니 사실 인간에겐 가장 큰 재앙이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도 종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에 엄중히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에서 그때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속임수와 교묘한 훼방으로 문 만 열면 교회 십자가가 보이는데도 그저 싫고 저게 뭔지 알고 싶지도 않게 되는 것이죠.
그 첫째 재앙으로 인해 예수님을 하나님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들은 원수의 속임에 넘어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자신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들의 위기를 예고하시죠.
데살로니가전서 5장3절,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 재앙의 시대에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믿음을 굳건히 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 인을 떼셨을 때에 일어나는 재앙입니다.
3절, 둘재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절,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두 번째의 붉은 말은 전쟁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까지 세상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역사라는 게 전쟁사라고 봐도 틀린 게 없잖아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생각하면 우리 세대만 전쟁을 피해서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선교지 탐방 차 미얀마를 다녀왔거든요.
그때는 그 나라가 가난해도 평화로웠습니다.
요즘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군부 쿠데타의 폭력을 보면 진짜 답이 없잖아요?
저를 어쩌나, 정말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으로 가까이 갈수록 분명히 나라간의 전쟁도 더 심해질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재앙은 이런 전쟁이나 유혈사태 뿐이 아닙니다.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한다고 하셨죠.
이것이 단지 물리적인 전쟁뿐이겠습니까?
인간들은 항상 서로 물고 뜯고 소리 없는 총질을 해 대잖아요?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우리가 이를 통해 알게 되는 영적 통찰은 내 마음과 내 가정, 내 삶의 영역에서 화평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땅에서 화평이 없어지고 살인의 씨앗인 미움이 있다면 둘째인의 재앙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고 내 안에서, 내 밖의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평이 깨지지 않게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이 재앙을 이기고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3. 세 번째 인을 떼셨을 때입니다.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헤치지 말라 하더라
말을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구상에 일어나는 이 세 번째 재앙은 기근과 경제적 재앙입니다.
경제활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거의 전부에 가깝죠.
우리가 지난 한 주도 다 열심히 돈 벌다 왔잖아요?
인간의 탐욕으로 경제활동에도 어김없이 재앙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잖아요?
유엔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전 세계 78억 인구 중 절반이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에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하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인구가 먹을 양의 두 배정도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 일 달러가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한편 지난 주 기사를 보니 어떤 한국계 큰 손 투자가가 이틀 만에 22조원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누군가는 이렇게 큰 돈을 주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 양극화는 앞으로도 더 가속화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부동산에서 벼락부자 됐다 벼락거지 됐다 그렇게 풍자하잖아요?
특히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라는 말은 누가 봐도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물가상승을 의미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벌어서 밀 한 되를 사 세끼 먹고 나면 남는 게 없죠.
기후문제, 전쟁, 자원고갈 등으로 먹고사는 게 점점 팍팍해져 갈 것입니다.
이런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은 피할 수 없는 종말의 사회현상입니다.
그러나 요한사도가 네 생물 가운데서 나오는 한 음성을 들었죠.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감람유와 포도주는 무엇인데 해치지 말라고 할까요?
두 번째 재앙이 경제적인 재앙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동떨어진 해석보다는 그 범주 안에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선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경제적인 문제에 관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근과 시장 경제를 흘러가는 데로 두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리하시고 어느 부분은 특별히 보호해 주시는 게 있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만일 어느 누군가의 경제문제를 특별히 지켜주신다면 그것은 단연코 성도들의 기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증명되죠.
천주교가 아닌 개혁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중에서 빈곤국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 뒤에 어떤 폐허의 나라였는지 사진자료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지금의 경제강국이 된 것은 기적입니다.
작년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세계 10위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1인당 총생산이 이탈리아를 앞질렀다고 합니다.
기적이죠.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여가 없으셨다면 우리가 필리핀보다 더 낫고 미얀마보다 더 나을 조건이 한 개도 없잖아요?
기독교신앙과 경제적인 축복의 관계를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건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것일까요?
그렇게 경제가 발전한 서구의 선진국들이 선교에 집중해 세계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에서 답이 나오죠.
우리나라가 물질의 축복을 받은 뒤에도 그 결과는 똑같이 나타납니다.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낸 나라는 압도적으로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파송한 선교사는 2만2천여명입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많이 파송한 국가는 2천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미국도 1천6백여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이 셋째 인의 재앙으로 아프리카 등지에 수많은 땅들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기아난민들을 위해 땀 흘려 봉사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후원을 받는 기독교단체이지 이슬람이나 불교나 힌두교 단체가 아닙니다.
답이 나오잖아요?
탐욕의 사람들이 불법으로 부를 거머쥐지만 마지막 때 점점 더 굶주린 사람에게 아무 것도 흘러가질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업을 보존하고 축복해서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것이죠.
이 세 번째 경제적 재앙 중에서도 주님께서 우리 가업들을 끝까지 그렇게 인도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드는 우리 성도님들 남은 날 동안 먹고 사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머리가 희어지도록 책임지신다고 하셨고, 책임지지 못하실 상황이 되면 더 완전한 곳으로 데려가시겠죠.
뭐든 내 계산 속에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믿음으로 굳게 서시길 축복드립니다.
4. 넷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7절,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절,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네 번째 인을 떼실 때 등장하는 청황색 말 탄자는 사망을 상징합니다.
이 재앙으로 인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이 땅의 생명을 각자 마치게 되는 것이죠.
사망을 일으키는 재앙은 다양합니다.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전쟁, 흉년, 사망, 각종 질병, 가축전염병들이 극심해 질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말씀이죠.
그러나 그 재앙은 땅 사분의 일까지만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냥 놔두면 저절로 종말을 맞았을 인간 역사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전쟁도, 전염병도, 시대별 독재자도 그냥 두셨다면 지구는 이미 멸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뒤에 나팔재앙으로 가면 그때는 더 많은 인구 삼분의 일이 죽는 재앙을 당합니다.
핵폭탄급 전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재앙들이 심판에 가까울수록 점점 심화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가다가다 결국엔 자멸할 수밖에 없고, 오죽하시면 하나님께서 지구 역사를 종결지으시겠습니까?
여기까지 네 개의 봉인을 떼시며 지구상에 일어나는 재앙이 한 그룹을 이룹니다.
5. 그리고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에는 분위기가 바뀝니다.
9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일곱인의 재앙 중에는 성도들의 환난과 박해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건 믿음으로 인해 죽음 당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순교는 무섭고 두렵고 슬픈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을 위해 받는 박해, 순교 같은 것을 너무 두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다 죽을 것입니다.
사고로 죽는 것은 아무렇지 않나요?
암투병 하다 맞는 죽음은 순교에 비해 더 나은가요?
어떤 죽음이든 육체의 죽음은 다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믿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단지 순교가 아니라, 어떤 죽음이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니 주님의 계획을 믿고 담대해야 하는 것이죠.
성도들이 만약 믿음을 지키다 죽냐, 배교하고 사냐의 기로에 선다면 당연히 믿음의 순교를 선택해야 맞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다고 부모를,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부인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다 순교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의 시험을 당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그러나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 신앙을 박해하는 재앙의 시대에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 죽는 것도 순교입니다.
지금 사람들 앞에서 우리 믿음을 내보이며 사는 것은 주님 말씀대로 사는 걸 말합니다.
그러려면 내 옛사람, 자존심, 고집, 욕심이 매일 순교해야 가능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단지 믿는다고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인 것이죠.
우리는 믿음의 의무를 피하기 위해 자꾸 막연히 먼데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기가 쉽습니다.
내게 별 간섭을 안 하시거든요.
우리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어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고 보여주신 예수님을 믿고 본을 삼아 따라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을 지키려면 매일 나를 죽여야 하기에 날마다 순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순교자들의 탄원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원수를 갚아 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죽은 게 뭐가 억울하겠습니까?
순교자들의 탄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뤄지도록 간구하는 것이고, 악에 대한 완전한 심판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저들을 용서해 주시길 구했던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일지라도 내가 심판자가 되어 단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매일 끓어오르는 죄악을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속죄 받고 있잖아요?
남을 정죄하고 나무랄 그런 자격이 어디 있겠어요?이들의 탄원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11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도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예수님 안에서 죽는 성도들은 다 의의 옷을 받을 줄 믿습니다.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말씀 안에는 종말의 시간까지 복음은 전파될 것이고, 사탄의 세력 또한 여전히 박해하고 죽이고 교회를 대적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순교자가 있다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죠.
내가 어디선가 순교자의 마음으로 죽어야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 여섯 번째 인을 떼셨을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12절, 내가 보니 여섯 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마지막에 더 가까울수록 우주적인 큰 이변과 재앙들이 속출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이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세상 끝에는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에 대답하셨던 마태복음24장과 일치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세상 끝, 주님의 재림에 임박한 때의 전무후무한 여러 가지 이변들의 재앙을 예고합니다.
이런 재앙이 쏟아질 때 사람들이 여전히 회개치 않고 오히려 그 진노를 피하려고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뒤에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에서도 그들이 회개치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훼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 전에 굳이 이런 극심한 재앙들을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때가 임박했으니 창조주를 기억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죠.
우리가 인생 중에 때로 곧 죽을 것 같이 삶의 지축이 흔들리는 극렬한 고통을 당할 때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야만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하나님은 그 길을 택하십니다.
주님을 믿은 다음 모든 것을 다시 돌려주시면 되니까요.
많은 것을 잃고 주님 앞에 나온 성도님들은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인생의 집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에 주님 앞에 나온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된 삶을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결국 회개치 않은 세상에 대해 구원의 문이 닫히는 순간 이 땅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지 아시겠죠?우리가 일곱인의 재앙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을 떼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시고 주님은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도 이렇게 세상이 점점 악하게 돌아가는 것을 볼 때, 또 매일의 삶에서 이 재앙들의 그림자가 엄습할 때 불안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21장에서 이런 일들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저는 정말 이 말씀대로 합니다.
염려가 마음에 더 퍼지기 전에 머리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요즘엔 한가지 더 추가해서 웃으며 주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이번에도 잘 되게 도와주실 것을 믿어요’
그리고 제 스스로도 격려하고 위로하며 믿음으로 서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잘 될거야. 이제까지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왔잖아’
큰 환난 때뿐 아니라 매일의 크고 작은 문제나 감정에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잘 서 있어야 합니다.
또 내 안팎에 화평이 깨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재앙을 피해가야 합니다.
살림이 점점 팍팍해지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성도들의 가업을 지켜주심을 믿고 염려하지 말고 기도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실하신 주님의 공급하심을 매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을 순교자의 마음으로 예수님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은 성도임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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