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4장1절-11절 (열린 문과 하나님의 보좌)

남수연 2021. 3. 25. 01:38

www.youtube.com/watch?v=NFA3ZBTWsh4&feature=youtu.be

요즘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는데, 잘 따라 올 만 하신가요?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잘 이해가 되었는데, 오늘 본문 말씀에 너무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 말씀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서 환난이 시작되고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앞으로 전개 될 환난에 대해서 오해하지는 마셔야 합니다.

지구에 있을 큰 환난은 벌을 내리신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벌이야 어차피 종말 뒤에 최후의 심판이 있는데 뭐 하러 미리 괴로움을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악인일지라도 단지 벌주시기 위해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앞으로 오는 환난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인간의 탐욕과 악으로 발생하는 자연재난, 전쟁, 그런 류의 고통이고 사탄에 의해 조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하고 붙들고 계시던 것을 놓아 버리시면 인간세상은 저절로 이런 재앙과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이제는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더 시급하게 회개하라시는 의도인 것입니다.

세계적인 코로나 재앙도 그런 의미가 없진 않겠죠.

이런 국가적, 자연적 재난은 성도들도 피할 수없이 함께 당합니다.

마지막 때로 갈수록 더 극심해지는 것이죠.

게다가 일곱교회는 로마황제에 의한 신앙의 극심한 박해까지 받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왜 먼저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에도 하나님보좌에 대한 환상이 몇 군데에 나옵니다.

그때를 보면 개인이나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큰 환난을 당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믿음이 현실을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과 거기에 맞춘 생활은 현실을 이겨낼 힘입니다.

현실에만 온 힘을 다해 매달리면 현실적으로 잘 살아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관점에서 인생을 본다는 것은 높은 관제탑이나 위성에서 상황을 조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의 믿음과 시각을 하나님의 보좌, 하늘 관제소로 이끌어 주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가 담긴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잘 이해되게 역사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요한사도는 하늘로 이끌려가서 하나님의 보좌실의 환상을 봅니다.

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사도가 먼저 열린 문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열린 문, 보좌에 계신 하나님, 네 생물과 이십사장로의 경배를 중심으로 나눌 것입니다.

열린 문이란 말의 시제는 지금 막 문이 열렸다는 게 아니라 열려져 왔다는 뜻입니다.

우리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막힌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이미 열려져 있음을 알 수 있죠.

빌라델비아교회에게 하신 말씀 중에 기억해보십시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자가 없으리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이미 천국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우리 신앙에서 이 인식은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천국의 자녀 되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교회 어르신들 중에는 겸손하셔서 나는 천국가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시는 분들이 있었죠.

그렇게 천국에 가려고 한다면 영원히 못갑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열립니다.

요한복음10장9절에 말씀하셨잖아요?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사도는 열린문을 통해 하나님보좌를 보게 됩니다.

2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요한 사도가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의 사령탑인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대개 높은 사람일수록 쉽게 만나기가 어렵죠.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보좌가 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이 열린 사람들에겐 하나님의 보좌가 항상 머리 위에 있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몰라도 어느새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이죠.

구약이나 신약에서 하늘이 열리고 천국을 본 사람들의 공통점이 즉각적으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다니엘이 그랬고, 신약성경에서 순교할 때 스데반집사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죠.

천국은 어디든 하나님의 보좌 앞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그렇잖아요?

눈 감으면 즉각 하나님의 보좌 앞이잖아요?

비행기로 14시간 떨어진 미국에서 기도하는 서원에게도 바로 하나님보좌 앞입니다.

천국에서 뿐 아니라 온 자연세계도 다 하나님의 보좌 앞인 것이죠.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하시잖아요?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

계시록22장3절에서도 구원이 완성된 천국을 이렇게 말해주십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지금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로 나가 아버지와 교통하지만 그날엔 얼굴을 마주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이 영광에 가득 찬 하나님과 환상 중에 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기록한 방식은 사진을 찍는 것 같은 방법이 아니라 캐리커처를 그려낸 방법과 같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외모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보다 본질과 특징을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죠.

요한사도는 하나님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2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절,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요한의 눈에 비친 성부하나님은 말로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이 존귀하고 신비로운 형상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형용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 40장18절에서도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영이신 하나님을 세상의 피조물에 빗대어 표현할 수도 없거니와 이미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에서 배웠던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과 똑같으신 성부하나님이시잖아요?

성경과 성령님의 감화로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또 보좌 앞엔 타오르는 일곱 횃불과 같은 성령하나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5절,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성령하나님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작게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보좌에 계신 성령께서 온 세상을 덮으실만하신데, 내 안에까지 그 생명과 힘과 역사하심으로 임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서적으로 가슴 여기에 계시다고 하지만 어디 계시냐면 요한이 보았듯이 하나님보좌에 계시고 내 안에까지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보좌에서 누가 빠지셨습니까?

예수님은 5장에서 극적으로 등장을 하시니까 다음 주에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요한사도만 하나님의 이 보좌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언제고 성령님의 감동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로 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열린 문과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환상은 환난 중에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큰 확신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환상을 생각하며 하나님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 요한의 시선은 곧 보좌의 주변의 인물에게 옮겨 갑니다.

보좌를 둘러선 24개의 보좌에는 금관을 쓴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보좌와 보좌 가운데에는 신비하게 표현된 네 생물이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경배의 태도를 요한은 자세히 기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그들의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히려 더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갑자기 다 일어나서 머리를 숙인다면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1) 하나님의 보좌를 밀착 호위하고 있는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네 생물의 모습은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림이 잘 안 나오죠.

6절,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절,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에스겔선지자가 보았던 하나님을 호위하는 네 천사의 모습도 요한의 묘사와 동일합니다.

같은 천사를 본 것이죠.

이 네 신비한 생명체는 하나님을 밀접 수행하는 천사들을 말합니다.

요한사도가 설명하고자 한 것은 천사들이 한 눈에 봐도 뭔가 다른 비범한 지혜와 권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눈들은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능력을 말하죠.

기민한 사람들보고 우리도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고 하잖아요?

또 네 생물의 얼굴을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와 같다고 하죠.

이것은 네 생물의 특성이 사자의 용맹과 송아지의 충성심과 사람의 탁월한 지혜와 독수리의 강함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외모의 묘사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닙니다.

5장에서 예수님에 대한 표현도 그렇습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 하나님 보좌 앞에 서있다고 표현합니다.

계시록에 표현한 방법이 이렇다는 걸 아시면 뒷부분도 쉽게 이해됩니다.

이 네 생물이 쉬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합니다.

8절,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들의 임무 중 하나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밤낮 쉬임없는 찬송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공의와 독창적인 거룩하심에 대해 저절로 흘러나오는 탄성에 가깝습니다.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다 이해할 수 없으신 존재입니다.

천국에 가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매순간 경탄이 나오고 , 놀라운 마음으로 경배하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어떻게 밤낮 쉬지 않고 찬양을 할 수가 있겠어요?그렇게 할 수 밖에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상황은 팬들이 자기의 스타를 대할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유튜브에서 가황 조용필씨 팬으로 이십오년을 살고 있는 여자분에 대한 영상을 봤습니다.

잠실에서 작은 마트를 하는 분이신데, 마트 벽에 걸려있는 오래 된 TV에서는 조용필씨 노래를 녹화한 비디오가 종일 틀어져있더군요.

구석구석 쟁여 놓은 것은 다 조용필씨 관련 음반이나 공연책자들이었습니다.

할 말을 잃은 것은 밤1시에 수퍼 문을 닫고는 집하고 완전히 반대 방향인 조용필씨 집을 다녀온다는 겁니다.

아파트 아래 와서 조용필씨네 창문을 올려다 볼 뿐이예요.

운전하는 남편에게 시동도 끄고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더군요.

조용필씨 잠에서 깰까봐.

그리고 경비아저씨한테 조용필씨 집 좀 잘 봐달라고 준비해온 담배 한보루를 내밀고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누구 팬이 되어 본적이 없어서 이해가 잘 되진 않았지만 누군가 위대한 대상을 흠모하는 게 저런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섬기게 될 하나님과 주 예수님에 대한 경배가 그런 마음 비슷하려나요?게다가 여기 나오는 네 생물이나 이십사장로들은 하나님께 갚을 수없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네 생물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만 돌리는 게 아니라 감사를 돌린다고 합니다.

천사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피조물을 맹종하게 만드시지 않고 자유의지로 순종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영원히 복종만 하게 만들어진 생명체는 하나님께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복을 누리는 존재, 그러면서 하나님의 신 되심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존재를 만드시는 게 하나님의 생각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위험천만한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천사에게도 그런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반역하는 루시퍼 같은 천사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보좌 앞의 천사들은 어떻게 반역한 천사에게 가담하지 않았을까요?

디모데전서5장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천사들 가운데 이들은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본분을 지키도록 붙들어 주셨다는 것이죠.

그들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렇잖아요?

그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존재들이죠.

다음에 나오는 이십사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 하나님 보좌 주변을 둘러 싼 이십사 장로들이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의 금관을 벗어 드리며 찬양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신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보좌에 앉았다는 것, 흰 옷, 금관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배워 온 성경을 근거로 할 때 구원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는 나와 함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하셨고, 흰 옷은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하게 된 의의 옷이죠.

또 이기는 그에게는 면류관을 주시리라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십사장로들은 성도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숫자 이십사는 구약의 열두지파와 신약의 열두제자를 합친 것으로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환상과 계시는 실제를 바탕으로 해서 강조하려는 것을 다소 연출해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10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그들이 자신에게 주신 금관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이 누리는 영광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세상에서 진실 되게 하나님을 섬기고 희생하며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그들이 누리게 된 것들을 보니 자신들의 한 일이 정말 미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노력한 것 이상의 지나친 대우를 받거나 상을 받으면 사양하게 되잖아요?

천국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한 것들을 주실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들인 노력과 희생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것임에 놀랄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해주시고 외아들의 피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영원한 천국의 유업과 영화롭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도 과분한데 금관이 왠말이냐는 것입니다.

이들이 받은 은혜가 바로 내가 받은 은혜 아닌가요?

그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감사와 감격으로 우리도 예배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3. 이 열린 문과 보좌에 계신 하나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경배의 환상을 통해 주시는 뜻이 무엇일까요?

당시는 도미티안 황제의 한마디에 성도들이 목숨을 잃던 때입니다.

목숨을 쥐고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현실의 황제가 얼마나 두렵고 높은 존재였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간단히 김정은을 생각해 보면 되죠.

그 손주뻘 되는 김정은에게 할아버지뻘 되는 장성들이 입을 가리고 웃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교시를 받잖아요?

김정은 앞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집한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의 환상이 무엇을 보여줍니까?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해 영벌에 가두실 것이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니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역시 두려운 환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코로나로 수십년 운영해 온 가게 문을 닫게 되는 그런 때인 것이죠.

어쩌다 큰 빚을 지면 빚더미에 깔려 죽을 것 같습니다.

때로 정말 호되게 악한 사람을 만나 그 관계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낍니다.

고치기 힘든 병에 걸리면 그 병이 나를 집어 삼킬 것 같습니다.

닫혀있는 나의 미래도 헤어날 수 없는 폭군 같이 느껴집니다.

실제로 이런 것들은 우리를 무겁게 억누릅니다.

그런데 그 문제들이 죽이기 전에 그 불안과 우울에 눌려 죽을 지경이 됩니다.

내 머리 위로 하늘문이 열려있고, 내가 이 문제들을 들고 하나님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지 못한다면 이런 시련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역사, 성령님의 감화가 없이는 하늘이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하늘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늘이 항상 열려있는 것을 알게 되고, 언제든 하나님보좌 앞으로 나가게 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누리는 것이죠.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했고 열린 문과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데, 항상 약한 상태인 이유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뭔가를 실제로 따라가고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서 강해집니다.

단 하나의 계명만이라도 매일 지켜야겠다고 정하고 지켜보세요.

그 계명이 매일 나 자신과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연단되어 강해지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교회들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강하게 박해에 맞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열린 천국과 하나님의 보좌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을 영접하셔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데 게으르다면 에베소교회에게 하신 대로 처음사랑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칼이나 곤고나 그 어느 것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13장6절에서 용감히 말씀하죠.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좀 내 성미대로 안 되어도, 원하는 계획대로 안 되어도, 조급한 마음에 변덕부리지 말고 하늘 사령부에서 지휘하시는 것을 믿고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보좌를 둘러싼 이십사 장로들처럼, 보좌 앞에 네 생물처럼 똑같은 은혜를 입었고 그들처럼 영광스런 천상예배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예배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영광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님만 경배할 것입니다.

많은 열심 있는 성도들이 단지 교회조직에 충성하고, 사람에게만 봉사하며 정작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우리를 탄압하는 것들이든,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이든, 어느 것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거나, 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전신마비인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서 밀며 45일간 미국을 횡단했던 위대한 아버지 딕 호잇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 자선 마라톤대회에 나갔을 때 ‘아버지 달릴 땐 아무 장애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란 아들의 말에 이 아들을 데리고 달리기를 멈출 수가 없었던 아버지입니다.

보스톤마라톤32회를 포함해 총1130개 대회를 완주했습니다.

아들을 실은 고무배를 허리에 묶은 채 바다수영도 헤엄쳤습니다.

전신마비 아들은 보스턴대학에서 학위까지 받았더군요.

그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날개 아래를 받쳐주는 바람이다’

이 부성을 만드신 하늘의 아버지, 그 분이야말로 내 날개 아래를 받쳐주시는 바람이시고, 날개가 꺾이면 자신의 독수리 날개로 업고 나르는 나의 아버지십니다.

이 하나님과 주 예수님만을 영원히 경배하고 충성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