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nPw2O1ZTnC8&feature=youtu.be
오늘은 일곱교회 중 빌라델비아교회에 주신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많아서 두 교회에 대한 말씀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교회에 대해서는 꼭 읽어보셔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부분과 책망하신 부분을 눈여겨보시고 잘 지켜 복된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지구종말의 시나리오 같은 부분에 주로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살펴 볼 것이지만 지구종말이 우리 구원에 무슨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장래 있을 것을 미리 알려주시고, 그런 때를 만나면 미리 준비한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시며 중점을 두신 것은 지금 우리가 살펴 보고 있는 일곱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받고 그것을 지킴으로 교회가 자신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시험을 보기 전에 공부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시험을 치르는 중에는 시험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빌라델비아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 내 믿음이 그들과 같다면 칭찬을 듣고, 그렇지 않다면 책망 받고 마음을 돌이키란 것입니다.
세계 종말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내 역사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구 종말의 날은 불확실하지만 내가 지구에서 맞을 인생 종말은 몇 십 년 이내로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1. 먼저 빌라델비아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교회에 말씀하실 때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시고 각 교회의 상황을 칭찬, 책망하시고 회개하고 돌이킬 방법을 주십니다.
오늘 빌라델비아교회에도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십니다.
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빌라델비아교회에게는 네 가지로 자신을 소개하시죠.
거룩하신 이, 진실하신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이.
교회의 잘잘못을 공개하시기에 앞서 이렇게 주님을 밝히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님께서 일곱별을 붙들고 계셨잖아요?
비록 책망 받을 믿음일지라도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가만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만일 믿음을 우리 손에만 맡겼다면 남아있을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1) 먼저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이라고 밝히십니다.
우리가 자식들을 교육할 때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죠.
‘엄마는 약속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너도 약속을 잘 지켜야 해’란 뜻이죠.
우리의 장점이 있다면 자식들이 닮게 가르치고 싶잖아요?
예수님께서 나는 거룩하고 진실하다는 걸 밝히시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거룩과 진실하심을 닮기를 바라신다는 뜻이죠.
교회가 주님을 열심히 따르면 누구를 닮겠습니까?
당연히 주님을 닮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주님의 성도들, 교회를 보실 때 가장 기뻐하고 칭찬하실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과 진실함이 배어있냐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께만 있는 성품입니다.
종교적으로 엄숙해 보이는 것과 거룩은 다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을 비교해 볼 때 당시 사람들 눈에는 누가 더 거룩해 보였을 것 같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세 번 시간 맞춰 기도하고, 율법 조항을 철저히 지키고 옷술이 달린 일반인과 다른 옷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과 어울리셨고, 잔치집에 가서 즐겁게 먹고 마셨고, 겉으로 보기엔 유대교 율법도 잘 안 지키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연히 바리새인 자신도 그렇고 남들도 그렇고 바리새인들이 더 거룩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바리새인들처럼 종교화 된 의식이나 엄숙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름으로만 거룩해집니다.
세상에 섞여서 평범한 삶을 영위해도 거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일 시장에서 장사해도 거룩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게 자칫 종교인의 옷을 입으려 하기가 쉽다는 것에 우리도 주의해야 합니다.
나는 성경을 얼만큼 읽고, 기도를 몇 시간 하고, 이런 쪽으로 가는 게 우리 죄인들입니다.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거룩한 주님의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성도들의 능력은 결단코 거룩에 있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의 거룩을 볼 때 거북해하지만 거룩이 없는 성도와 교회는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2) 다음 주님의 교회에 바라시는 것은 진실입니다.
전에 우리 사회의 종교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을 때 기독교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중적인’, ‘사기꾼 같은’이란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이에 비해 천주교인이나 불교인에 대해서는 ‘온화한’, ‘윤리적인’, ‘절제하는’ 이란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옛날에 예수쟁이라고 무시당할 땐 적어도 사기꾼 같다는 말은 안 들었습니다.
교회가 진실하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진실해서 믿을만 해’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죠.
주님과 사람들에게 그런 평가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3)그리고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시고 문을 열고 닫을 유일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본문에도 나왔듯이 빌라델비아교회가 골수 유대교인들에 의해 상당한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대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 큰 세력을 갖고 있던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교회에 구원이 없다고 공격했던 것이죠.
예수님이 빌라델비아교회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을 열고 닫을 열쇠는 유일하게 예수님 손에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에는 주님께서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다고 하시죠.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성도들의 구원을 보장해 주십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적은 인원이 모였다 해도 이들이 온전히 거듭난 구원받은 참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면에서 빌라델비아교회 닮기를 가장 원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우리 앞에 구원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2. 어떻게 해서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받고 구원의 문이 열린 성도들이 되었을까요?
8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시는가 하면 ‘내가 네 행위를 안다’ 행위를 보고 빌라델비아교회를 평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을 보신다고 하지 않고 행위를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속에 있는 믿음을 증명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 안다는 것이죠.
네가 시간을 어디다 쓰고 있는지, 돈을 어떻게 쓰는지, 네가 말을 어떻게 하는지, 네가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이런 것을 보시면서 나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의 말보다 행동을 지켜보는 편이죠.
지난 한 주 내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신 주님은 어떻게 나를 평가하실까요?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교회의 행위를 믿음으로 보셨다는 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이 보시니까 빌라델비아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작은 능력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어로는 능력이 거의 없다 쪽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 크거나 작거나 그것이 예수님 눈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크던 작던 모든 능력은 주님이 주신 것이잖아요?
내 실력과 재능과 세상적인 지위가 어떠하든 내가 예수님을 믿고 절대 배신하지 않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 목사님이 어려운 개척교회 시절에 어쩌다 새신자가 오기만 하면 얼굴에 내 인생 책으로 쓰면 두권짜리다, 다섯권짜리다 써 있는 사람만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나가는 성도들이 많은 큰교회 담임목사 선배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왜 우리 교회는 이렇게 문제 있고 어려운 사람만 보내주시고, 선배교회에는 이렇게 능력 있는 성도들만 보내주시냐.
그랬더니 선배 목사님이 하는 말이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네가 그 성도들을 맡을만 하니까 네게 맡기시는 거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오는 데 그 말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더랍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죠.
조금만 더 잘했으면, 돈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상황이 조금만 더 나았으면 좋을텐데, 내 형편이 너무 나쁘다.
빌라델비아교회가 그런 교회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성도들이 교회를 덮친 이교문명과 박해에서 온전히 말씀을 지켜 예수님을 배반치 않고 믿음을 지켜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는 부자교회였지만 그야말로 겨우 숨만 붙어있는 교회가 되어 책망을 받잖아요?
내가 남들과 비교해 뒤처지고 실력도 없다 해도 사실 믿음을 지키는 데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이러니한 것은 계시록의 일곱교회 중 책망 없이 칭찬만 받은 또 한 교회 서머나 교회 역시 궁핍과 환난 중에서 믿음을 지켰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면, 돈 많이 벌어 걱정이 없어지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텐 데 하는 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다만 당시 사회적 취약계층이었던 빌라델비아교회가 거대권력에 맞서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큰 권력도 없이 세상에서 부딪치며 믿음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작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약함을 강하게 만든 힘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약할지라도 강한 예수님의 힘을 기도를 통해 끌어 올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악의 세력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큰 넌센스입니다.
예배도 기도하지 않으면 제대로 드릴 수 없어요.
우리의 강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주님께 의탁하지 않은 강점은 약점보다 더 나쁘게 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작건 크건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믿음을 지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 빌라델비아교회가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합니다.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인내 없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주님의 계명대로 미운 사람을 사랑했다, 그러면 끝일까요?
아닙니다. 내일 다시 사랑해야 합니다.
내일 그 사람은 여전히 미운 짓을 할 것이기 때문이죠.
오늘 기도하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내일 또 인내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질긴지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따르다가도 한순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고무줄을 잡아 당겼다가 놓는 순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듯이 그렇게 죄의 탄성력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늘 인내하며 말씀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미디어에 노출될수록 성도들은 인내심을 잃게 되는 것 같습니다.
뭉근하게 기도하고 한나절씩 성경 읽던 그런 인내를 요즘은 잘 발휘하지 못합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면 성격을 조급하게 하는 환경도 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잘 지키면 10절에서 예수님도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인내를 갖고 끈질기게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며 이 믿음을 잘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께서 이 빌라델비아교회를 칭찬하며 상을 약속하십니다.
1) 원수같이 굴던 유대인들을 발 아래 복종시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9절,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빌라델비아 성도들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대적자들을 데려다 발 앞에 절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죠?
어떤 문제로든 트집을 잡아 내 믿음을 조롱하고 괴롭히던 자들이 나보다 잘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더 잘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항상 남보다 못한 자리에 두시고 남보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이 살게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낮아지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내 본성적 교만을 죽이는 것이지, 늘 남에게 신세져야하고 남의 밑에서 섬겨야하는 그런 걸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지위에 있다면 겸손은 더 빛을 발하지 않습니까?어제 잠깐 TV를 보니까 이삭토스트 대표가 토크프로에 나오더군요.
기도로 사업을 일으킨 기독실업인 김하경대표입니다.
국내 가맹점만 820개를 가진 중견기업 대표이지만 그냥 사람이 겸손했습니다.
자가용차도 없다, 비서도 없다, 회장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데 그냥 겸손했습니다.
남보다 못해서 낮아져 있는 것을 누가 겸손이라고 하겠어요?
우리가 주님께서 허용하신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면 그 다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다보면 내 노력과 최선으로도 안되는 정말 힘든 때를 만나게 되죠.
생활에 환난이 닥치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의 시험이 닥칠 때 어디서 돈을 구해 오겠습니까?
건강의 시험이 닥칠 때 마음 먹는다고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생활고에 시달린다 해도 우리가 언제든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거짓말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고, 전도하고, 이런 것은 감사하게도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던 시련의 때 오직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생활 밖에 없었습니다.
그걸 열심히 했는데 주님께서 힘든 환경을 내 발 앞에 복종시켜주시더군요.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면 사람도, 건강도, 환경도, 물질도 다 내 발 앞에 무릎 꿇게 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또 더 큰 환난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말씀은 약간의 오역으로 인해 복잡한 종말론이 나온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이 시험의 때를 종말에 있을 극심한 환난의 때, 7년대환난이라 보고 대환난을 면하게 하시려고 그 이전에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휴거가 있다고 해석하게 된 것이죠.
이 두 가지가 다 잘못 된 해석이고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이 편지는 이천년 전 빌라델비아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이 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네가 내 인내의 말씀을 잘 지켰으니, 이삼천년 뒤에 올 대환란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폐가 있죠.
여기서 시험의 때는 빌라델비아 교회 당시에 있을 시련이라야 맞습니다.
앞에서도 주님께서 속히 될 일을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교회시대에 어느 세대건 항상 있는 시련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일 수도 있고, 종교적 박해일수도 있고, 당시 소아시아에 빈번하던 지진 같은 자연재난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가정의 문제, 건강, 생활의 문제 등등 다양한 시련이겠죠.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시험의 때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경륜이 다 차서 지구역사를 종결지을 그 최후의 시험의 때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되어있는데, 원문에는 ‘면하게 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시험의 때에 ‘지켜 주신다‘입니다.
번역을 이상하게 해서 칠년대환난을 성도들이 면하게 해주시기 위해 그 전에 휴거가 일어난다 이런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죠.
이 부분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다면 주님도 어떤 시험이나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대환난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게 필요합니까, 당장 내가 살면서 겪는 시련에서 지켜주시는 게 필요합니까?
답은 간단히 나오는 것이죠.
3)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이 12절에 나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것은 빌라델비아교회 당시의 신전문명 속에 살던 성도들은 금방 이해가 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 신전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되게 해주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고대 문명지를 여행 다녀보면 궁전들, 신전들이 다 무너져도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몇몇 기둥들입니다.
기둥이 없이는 성전이 설 수가 없기에 이것은 영원히 견고한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열린 문과 같은 뜻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따라간다면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며 죄를 가려서 멀리해야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갑니다.
우리가 큰 능력이 없어도 주님을 믿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적은 능력으로 믿음을 지켰다고 주님이 빌라델비아교회를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붙들면 곧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낙담되는 환경들을 데려다 우리 발 앞에 무릎 꾾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께서 모든 환난의 때에 우리를 지켜주심을 믿고 굳건히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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