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1장9절-20절 (일곱 금 촛대와 인자 같은 이)

남수연 2021. 2. 17. 23:59

www.youtube.com/watch?v=M7w9ROWPHjc

오늘도 요한사도가 전해 준 이 계시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을 받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지난 주 요한계시록이 어떤 성경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부터 요한사도가 받은 계시와 환상이 펼쳐집니다.

본문 부분은 요한사도가 가장 먼저 환상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께 받은 계시를 기록해서 일곱교회에 보내라시는 명령을 받는 내용입니다.

 

1. 이 계시의 말씀을 받는 요한사도와 편지를 받을 성도들의 상황입니다.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먼저 그들이 서로 형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은 혼자 고난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누군가 어려운 일이 생기고 긴급한 기도제목이 생기면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고 함께 이겨나갑니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고 끌고 나가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환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교회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함께 세상과 마귀를 상대할 수 있도록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에서 배웠듯이 영적전투는 교회의 단체전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를 벗어나 혼자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이 말씀에서 하나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편지를 쓰고 있는 요한도,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계시록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이 계시록의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용기있게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황제숭배 강요 속에서 참 신을 섬기는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우리에게 다른 여러 신을 섬기도록 압박합니다.

인간역사의 가장 강력한 우상신은 뭐니 뭐니 해도 돈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게 돈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돈 버는 일에 시간을 제일 많이 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칫 돈과 돈의 배후에 있는 사탄에게 지배받고 통제받기가 쉽습니다.

주일예배 대신 장사해서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뿌리치고 나오기 힘듭니다.

마땅히 정직한 것이 예수님의 길이지만 돈이 걸려있으면 머리속이 복잡해집니다.

성경은 땅에 치부하지 말고 재물을 천국에 쌓아두라고 가르치십니다.

말씀의 인도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강요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고 그렇기에 세상 사람은 질 필요가 없는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 말씀대로 사는 게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도 사도요한도 그로인해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에게 천국을 계시해 주시고 강한 믿음을 더해 주십니다.

왜 오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지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만 목적과 관심을 두고 산다면 하나님도 그런 깊은 은혜를 주실 필요가 없는 것이죠.

생계를 위해, 혹은 세상의 성공을 위해 쫒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시시때때로 멈추고 생각을 영원한 나라와 예수님께 돌려야 합니다.

나를 세상이 가는 넓은 길에서 불러내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좁은 길에 세워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살아간 성도들의 승리를 보장하는 성경입니다.

 

2. 이제 요한사도가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그것을 일곱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10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요한이 음성을 듣고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 두렵고 경이롭고 신비로 가득찬 누군가가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이시죠.

13절부터 16절까지가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렇게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읽을 때 우리 마음이 설레였습니까?

주님이 과연 어떤 모습이실지 두근두근 하십니까?

요즘 TV의 경연프로그램에서 스타들이 많이 탄생합니다.

최근에 탄생한 스타는 아마도 싱어게인에 나온 이승윤형제일 것입니다.

승윤형제의 인기가 어느정도냐 하면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승윤형제가 다음 경연에서 BTS의 소우주라는 노래를 부를 것이라는 말이 먼저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간에 승윤형제 노래 감상하려면 미리 예습해야 한다고 BTS의 소우주를 들으려 유튜브에 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BTS 노래 아래 승윤형제 팬들이 댓글로 도배해 놓고 난리가 났더군요.

만나서 악수한번 나누지 못할 연예인인데도 팬이 되면 이런 열성을 보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내 생명과도 같은 분이신데 우리의 관심이 너무 부족한 게 늘 한탄스럽습니다.

오늘 주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모습을 마음에 잘 새겨놓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성품과 모습은 제자들이 복음서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성경을 읽으며 성령께서 계시해 주시는 한도 내에서 예수님을 인지하게 되고 신뢰하게 되죠.

소아시아의 성도들도 우리처럼 한번도 주님을 못보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겐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십여년이 지난 현재 예수님이 하늘에서 어떻게 계시냐입니다.

신앙으로 인해 박해 받는 성도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잖아요?

재산을 몰수당할 것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재산을 지킬 것인가.

가족과 헤어질 것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가족을 지킬 것인가.

목숨을 포기할 것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목숨을 유지할 것인가.

우리 앞에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처럼 내가 믿는 예수님이 현재 천국에서 어떻게 계시냐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겠습니까?

우리가 큰 시련을 만나면 누구나 주님 어디계시냐고 묻게 되잖아요?

예수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이렇게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꺼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주님을 찾는 모든 성도에게 이 말씀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렇기에 14절부터 나온 예수님의 현재 모습은 성품과 인격보다는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과 인격은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과 동일하십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발현하신다고 인격이 바뀌시는 건 아니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지식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신성과 우리와 똑같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인성을 함께 갖고 계셨다는 거예요.

물론 죄성은 없으셨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성을 하늘보좌에 두고 오신 것은 아닐 것이잖아요?

이 땅에 계시던 주님께는 완벽한 신성과 완벽한 인성이 있으셨습니다.

단 인간의 자격으로 대속하셔야 했기에 신성을 완전 차단하셨을 뿐이십니다.

한번 예수님의 신성이 살짝 드러나셨던 적이 있으시죠?

우리가 변화산이라고 이름 붙인 한 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셨을 때가 있었잖아요?

그때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되셨죠?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빨래한 수준이 아니게 빛처럼 희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광채가 옷을 뚫고 나오다보니 옷이 눈부시게 하얗게 보인 것이죠.

옷감 자체가 하얗게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으시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여기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모습들이 우리에겐 낯설고 생경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선지자가 더 오래전에 하나님과 메시야의 환상을 보고 이미 성경에 기록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요한이 표현한 것과 거의 일치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더 뚜렷하게 잘 전해줄 방법으로 묵시적 표현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면 아주 이상한 분이 나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지 한가지 씩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인자 같으시다고 하죠.

여기서 인자는 말 그대로 사람 같으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인간의 몸 그대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니 당연히 사람의 모습이신 것이죠.

요한사도가 한 눈에 봐도 영광스러운 분이신데, 사람 같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요한사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죠.

2)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다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거의 제사장의 옷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알아왔듯이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을 중보하시는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3)가슴에 금띠를 띠었다는 것은 대제사장과 왕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서 계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20절을 보면 일곱 촛대는 일곱교회라고 하시죠.

환난 중의 성도들이 주님이 어디 계신지, 우리 고난을 주님이 알고 계신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교회와 함께 성도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잖아요?

4) 주님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습니다.

흠결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5) 주님의 눈은 불꽃같이 강렬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하신 눈입니다.

6)주님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일컬어 왔던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 발로 사탄과 악의 세력을 밟는다는 이미지와 맞죠.

7) 음성은 많은 물소리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인격과 위엄에 맞게 신비하고 웅장하실 것입니다.

8) 주님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습니다.

환상적인 광경이죠.

이 일곱별이 무엇인지는 20절에 바로 말씀해 주십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여기서 사자로 번역한 앙겔로이는 영어로는 엔젤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하늘의 천사와 하나님의 종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다음 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각 교회에 메시지를 주시는 데, 거기 보면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하십니다.

천사에게 편지를 보내시는 게 아니니 여기서 사자는 천사가 아니겠죠.

주님 손의 일곱 별은 각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를 뜻합니다.

아무리 시골교회의 소박한 목사라 해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자를 통해 원하시는 대로 성도들을 양육하고 축복하십니다.

또 각 교회마다 목사와 성도들이 만들어내는 각기 다른 믿음의 형질이 있습니다.

다음 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보면 각 교회의 성도들과 믿음이 독특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의 각기 다른 신앙의 특징들을 유지하되 진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그 오른 손에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8) 주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처럼 말하는 기능만 가지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말씀은 곧 실행을 의미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이 생겼던 창조의 기사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하지 못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입으로 말씀하시면 곧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의 신성으로 사역하셨다면 ‘화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진짜 독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말이 그대로 이뤄진 내용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즉시 말랐다거나, 베드로가 아나니아아 삽비라에게 말했을 때 즉시 생명이 떠난 그런 경우죠.

성령하나님을 통한 선언이니 그대로 성취되어 버린 것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주님의 입의 정확한 판결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8) 주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빛이시잖아요?

그 빛 앞에서 모든 것은 은폐될 수가 없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평생 살아온 자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때 잊어버렸던 추악한 과오를 보며 자신이 먼저 망연자실 할 것입니다.

해 같이 비치는 주님의 공의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이 울부짖는다고 하죠.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이것이 요한사도가 본 예수님의 영광과 위엄에 가득 찬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요한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요한사도 만큼 예수님의 모습에 가깝게 성화 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도 본성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죄의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 앞에서 죽은 자 같이 될 뿐이죠.

우리가 주님의 재림의 날에, 혹은 생을 마치고 예수님 앞에 갔을 때도 그런 것은 아닐까요?

주의 날엔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우리의 죄성도 제거된 영생할 수 있는 부활의 몸이 되기 때문에 지금의 요한사도와는 다르죠.

하나님과 예수님을 경배하며 기뻐 찬송하며 감사와 감격에 차서 춤을 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영광의 하나님을 지금 분명하게 알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너무 모자랍니다.

세상 종교의 귀신들을 섬기고, 인간을 우상화시켜 섬기면서도 그 앞에 예배할 때 얼마나 삼가고 경외합니까?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 무슬림들은 사원 앞에 있는 수도에 가서 손씻고 머리도 문지르고, 발까지 씻고 들어갑니다.

요즘 쿠데타로 인해 시위가 계속되는 미얀마에 제가 전에 가보았습니다.

그 나라는 전체가 불교사원이라고 할 정도로 눈만 돌리면 사방이 절입니다.

그런데 그 절에 들어갈 때는 누구도 예외 없이 신발을 벗고 맨 발로 들어가야 합니다.

부처 앞에서 누가 건방지게 신을 신냐는 거예요.

우리는 예배드리며 휴대폰도 보고, 졸기도 하고, 딴 생각을 하기도 하죠.

경외심이 없는 믿음은 환난을 이길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이 보여주신 이 형용을 잘 머리에 새겨 넣으셔서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경외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요한사도가 위엄과 영광으로 빛을 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발 앞에 엎드려진 뒤 반전이 일어납니다.

17절,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성경에서 너무 많이 들어왔던 낯익은 목소리죠.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에게, 야곱에게,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제자들에게,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해 오셨던 그 말씀이죠.

아무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그렇게 말해준다 해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사시나무 같이 떨리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면 용기를 내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이 말씀이 너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앞 8절에서 성부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과 지금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 계셨던 적이 없으십니다.

성부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여기까지 요한사도에게도 편지를 읽는 성도들에게도 이 분은 미스테리로 둘러싸인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실 때 모든 비밀이 벗겨지고 요한의 눈이 번쩍 뜨였을 것입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이 편지를 낭독하는 사람의 음성도 바로 여기서 감격에 떨렸을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성도들도 탄성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본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예수님이시라는 게 밝혀진 순간이죠.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그 영광스런 인자와 같아 보이는 하나님이 내가 죽었었다고 말하실 때 그 분의 정체가 뚜렷이 밝혀집니다.

신이신 하나님이 죽으신다는 것은 사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죽으실 방법인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섬기고 함께 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께서 나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희생이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며 희생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죠.

이생의 삶에서도 영원한 천국의 삶에서도 이 사실이 우리의 가장 큰 힘이요 자부심이요 영광입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이렇게 우리 모두를 예수님이 피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죄의 본성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이 땅에서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부모를 위해,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성도들과 이웃들을 위해 희생하며 사랑하는 것을 주님 앞에 가는 순간까지 배워야 하는 것이죠.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런 사랑의 공동체 되어 서로의 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주며 끝까지 승리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우상에 빌붙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따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손해와 희생과 수고를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아름다운 천국의 소망을 점점 더 계시해 보여주십니다.

구원과 천국의 소망이 늘 부족하면 주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더 동참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요한사도의 환상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 발아래 엎드린 요한처럼 주님을 사랑하지만 경외하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천국에서 만날 예수님을 미리 이곳에서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경외하여 주님 앞에 갔을 때 부끄럽지 않은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