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1장1절-8절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남수연 2021. 2. 11. 13:48

www.youtube.com/watch?v=x-Uxm948bdo&feature=youtu.be

 

오늘부터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가르쳐 오신 구원의 결말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끝을 알면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훨씬 쉽잖아요?

하나님은 이 성경을 통해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적극적으로 예고하셔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믿음을 지키도록 인도하려 하십니다.

그렇기에 3절에서 말씀하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종말을 통해 믿음이 각성되고 주님의 말씀대로 지키며 사는 게 복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몇 주간 이 예언의 말씀을 살펴 잘 이해하고 지켜 복된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1. 요한 계시록은 어떤 성경인가요?

요한계시록은 좀 어렵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멀리하는 사이에 이단들이 이 귀한 성경을 접수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좀 어렵게 느껴진다 해도 요한계시록을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믿음을 두었기에 마지막 성경을 잘 모르면 뭔가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 미진함을 갖게 됩니다.

계시록에서 일곱인 심판, 일곱나팔 심판, 짐승의 표 666, 7년 대환란, 기이한 생명체가 등장하는 내용들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런 좀 기괴한 느낌은 요한계시록의 표현 방식이 묵시 형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전달하려는 내용에 따라 다양한 집필 방법을 선택해 기록되었습니다.

역사서처럼 쓴다거나, 시의 형식으로 쓴다거나, 일반 편지처럼 쓴다거나 그런 것이죠.

묵시의 방법은 표현하려는 내용을 비슷한 뜻이 있는 다른 사물로 은유해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국어에서 은유법이 그렇듯이 이것은 뭘 감추려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본질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 ‘그의 머리는 뱀이고 표범의 다리를 갖고 있다’ 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인지 즉각 알 수 있죠?

성경 중에 다니엘서의 일부분, 스가랴서가 이런 묵시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이 묵시표현이 사람들에게 더 쏙쏙 들어왔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천년이 지난 타문화권의 우리가 읽으면 온통 수수께끼 같은 것이죠.

그렇기에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엄청난 비밀을 담아 놓은 비밀의 문서일까요?

다니엘서에서는 다니엘이 본 종말의 환상 뒤에 아직 때가 아니니 그 환상을 인봉하라고 합니다.

다니엘 당시로서는 시기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모든 예언을 완료한 뒤에 천사가 말합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즉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받은 사람들 세대에 인접한 사건들이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예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읽고 지킬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슨 ‘계시록의 비밀을 푼다’ 그런 투의 접근은 틀린 것입니다.

계시록은 신구약 성경과 계시록 자체 내에서 해석이 가능하고 거의 역사적으로 완료 된 사실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모든 세대에도 유사하게 반복되는 일들이기에 계시록을 통해 사탄의 활동과 시대를 분별하는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밀서와 같아서 엄청난 비밀을 풀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심판의 때가 언제이고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승리를 보장하며 힘내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은혜로운 말씀인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성도와 교회가 믿음으로 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더욱 펴서 읽어야 할 성경인 것이죠.

오늘 살펴 볼 1장1절부터 8절까지는 요한계시록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일곱 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고, 종말에 일어나는 사회 현상과 어린 양의 혼인잔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 완전한 구원이 완성되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오늘 말씀은 서론이라 좀 공부의 분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끝없는 만담 같은 설교를 듣는 것보다 공부가 훨씬 낫습니다.

한 절 한 절 순서대로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2.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어떻게 이 성경이 씌여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먼저 밝힙니다.

1) 1절은 이 성경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은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계시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탐구해서 알게 되는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인간의 탐구영역은 자연계에 한정 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해서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의미를 다시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성경은 문자와 지식에 불과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길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들을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계시의 처음 출처는 성부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구원을 계획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부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이제 종말을 계시하시도록 맡기셨고 예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요한사도에게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천사, 요한, 그 다음이 편지를 받아 읽을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이죠.

 

2) 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지가 3절에 나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 읽고, 듣고,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죠.

여기서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수입니다.

그 당시에 양가죽이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쓴 성경은 귀해서 교회에서 회람해서 읽었는데 한 사람이 나와서 소리 내어 읽고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듣는 모습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때가 가깝다’, ‘속히 될 일’ 은 당시 세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장차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의 재림이 때가 가깝다, 속히 오시겠다 해 놓고 아직도 안 오시냐고 의혹을 가질 일이 전혀 아닙니다.

그 때 속히 오셨다면 오늘날까지의 이 많은 영혼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이 그걸 모르시고 속히 오시겠다고 하셨겠어요?

‘속히’란 뜻은 예수님의 재림, 이 땅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반드시 온다는 뜻이고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각자의 짧은 생애 안에서 개인적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사도의 편지를 처음 받았던 그 시대의 성도들은 얼마 안 있어 속히 종말을 맞은 것이죠.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곧 주님을 뵐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속히 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3) 이 편지를 보낼 상대가 누군지가 나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그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땅에 세워진 일곱 교회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일곱교회의 이름이 나오죠.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당시 소아시아에는 일곱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숫자에 의미를 붙인 경우가 많은 데 7의 경우는 완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라면 곧 전체 교회에 보내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숫자가 가진 상징성을 아주 많이 사용합니다.

 

4) 그리고 1절과 2절에 이 서신을 쓴 사람이 요한이라고 밝히죠.

기록자가 사도요한이 아니고 다른 요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내용들이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학문에서는 새로운 학설이 나왔을 때 완벽하게 검증되지 않은 경우는 기존에 있던 더 오래 된 학설을 정설로 채택합니다.

사건이 일어났던 때에 가까운 것일수록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요한계시록은 교회사 초기부터 사도요한의 편지로 알려져 왔고, 성경 자체의 내증을 통해서도 사도요한의 편지가 맞습니다.

신학자들이 성경을 파헤쳐 연구 성과를 내려고 이런저런 학설들을 정말 많이 내놓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다 알아보고 검증된 안전한 입장에서 말씀을 전하니까 잘 모르셔도 됩니다.

다만 그런저런 얘기를 어디서 들으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거였나 생각하실까봐 잠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5) 기록시기는 주후 약 95년경, 도미티안황제의 박해시기로 추측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참혹했던 10대 박해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지금 성도들은 점점 더 깊은 박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환난을 다 알고 계시고 요한을 통해 장차 될 일까지 상세히 편지로 보내주십니다.

그런데 막아주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성도라면 환난과 박해를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3장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지금도 타종교권에서 예수님을 믿다가 순교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따르려면 당연히 힘듭니다.

우리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잖아요?

지난 한 주도 편히 놀지 않고 수고하고 때로 부담을 갖고 주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이 조금씩이라도 다 있으실 것입니다.

물론 세상자체가 누구든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죠.

마귀가 죄인들을 휘젓는 세상에서 평안과 평화를 기대하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선 신앙의 박해 이상으로 불같은 시련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런 저런 환난 속에 우리를 밀어 넣으십니다.

그럴 때 담력을 키워 무서워하지 말고 한번 해보라고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간이 작아서 그렇게 못합니다.

좋지 않은 소식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잖아요?

환난과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거기에 맞설 힘을 주실 거라는 뜻입니다.

계시록은 고난을 숨김없이 예고하고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신앙과 교회를 없애려고 마귀가 얼마나 많은 박해와 고난을 가해왔는지 교회사가 증명하죠.

우리도 다 그런 불시험을 통해 더 좋은 것들을 얻었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며 사랑하게 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안전지대를 원하지만 안전지대에서는 의외로 얻는 것이 없습니다.

불로 제련해야만 정금이 나오듯이 고난을 통과하며 어린 양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성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3. 4절과 5절에는 보통 서신서에 나오는 인사가 나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 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요한 사도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이 인사를 건네고 있겠습니까?

그냥 상투적인 안부인사가 아닙니다.

진짜 이 인사가 이뤄지길 간절히 바라는 소망과 축복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돌봐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때는 열두 사도 중 요한만 빼고 다 순교한 때입니다.

그런데 그마저 밧모섬에 요한이 유배를 당한 것입니다.

황제의 박해는 극심한데 유일한 사도인 고령의 요한사도마저 섬에 갇혀 버렸으니 교회의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죠.

고난당하는 교회를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매일의 시련을 이기잖아요?

또 이 인사말 안에는 성도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중요한 믿음의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사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확히 구분하죠.

서신서들을 보면 삼위의 하나님을 다 구분하여 언급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막연히 뭉뚱그려서 이해하지 말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각 인격의 하나님과 각각 교제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아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죠.

1)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이 부분은 성부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로 부터 난 것입니다.

사람이 탐구해서 결론을 내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8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죠.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만드신, 기원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으신 온 천하에 유일하신 신이십니다.

2)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이 부분은 성령님에 대한 것이죠.

성령님이 한 분이신데 왜 일곱 영이라고 하냐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한다고 했죠.

성령님의 사역의 총체적이고 완전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서11장을 보면 메시야에게 임하실 성령님의 특징을 일곱가지로 예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성령의 은혜를 구하면 이런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강권하시는 것이죠.

3)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온전히 순종하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지금 온 세계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특히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5절,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정도가 그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나를 죄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이 무덤덤하게 들리십니까?

만일 내 피를 죽을 만큼 뽑아서 누군가에게 수혈해서 살린다고 생각하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부모 된 성도님들이라면 다 마음속에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식들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랑이상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용기와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고 주님이 나를 사랑해 목숨을 주셨고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사방에 틈이 벌어진 판자벽 집에 사는 것 같고, 대문이 잠기지 않는 집에 사는 것같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불안한 집에서 자고 있는 꿈을 꿉니다.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올 것 같은 걱정에 꿈에서도 잠을 잘 못 이룹니다.

하나님이라는 안전한 울타리가 없다면 인생 전체가 그 꿈과 같을 것입니다.

꿈을 깨고 나면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를 느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세상을 이길 능력입니다.

 

4) 그리고 요한사도는 고난 중에도 성도는 여전히 사명이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환난이 극심하고 세상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처지라 해도 성도들만이 이 땅의 하나님나라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만이 세상의 희망인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아주 보잘것없고 고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에 있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을 위한 제사장으로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가정과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의 역할을 잘하면 우리도 복되고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평안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죠.

한국교회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해서 교회도 비난을 받고 국민들도 복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됩니다.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의 사명을 해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결국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잖아요?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4. 그리고 예수님의 계시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악의 권세와 세력들을 다 심판하신다는 것이죠.

이 부분은 메시야 재림에 대한 스가랴서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본 주님의 재림이 전혀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부터 이미 예언된 것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죠.

스가랴선지자는 주님 태어나기 600년 전 사람인데, 그때 이미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창에 찔리는 고난의 모습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요한사도는 스가랴가 예언되었던 그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환상을 동일하게 보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시죠.

우리 젊을 때는 지금보다 더 간절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분위기였습니다.

하늘에 구름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저 구름을 타고 오시겠지 하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이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손오공처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우리 눈앞의 자연계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7절에 보면 동시에 모든 사람이 주님을 볼 것이고, 주님을 찌른 사람도 볼 것이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한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시는데 어떻게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찔렀던 사람들,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볼 수 있겠어요?

예수님의 재림시엔 이미 베드로후서에서도 말씀했듯이 모든 자연계가 다 떠나가 버리고 영원한 세계로 진입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으로 재림하셔서 지구가 천국이 된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지구와 은하계는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만 남는 것이죠.

자연계는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고 모든 영혼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 영광의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재산을 몰수 당하고 언제 잡혀가 맹수와 싸워야 할지 모르는 판에 예수님은 거기서 피할 길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편지만 달랑 보냈다면 성도들은 섭섭하지 않았을까요?
곧 엄청난 고난이 닥칠 것이고 악의 세력은 심판을 받을 것이나 너희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이잖아요?
심지어 6장11절에서는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의 수를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 편지를 받은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2장11절에 그들의 결말을 요한사도가 천사로부터 미리 듣습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진짜 예수님의 영광과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 믿음은 작아도 큰 믿음입니다.

지금 어떤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안전한 이불속을 원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거친 세상 밖으로 내 모십니다.

우리는 고난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어려움이 닥칠까봐 두려워하면 오히려 마귀에게 약점을 잡히게 됩니다.

그런 크고 작은 어려움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안전한 이불 속에서 잠자다 큰 환난을 이겨내지 못할까봐 그러시는 것이죠.

시련과 기도를 통해서 깨어 있게 되고 정결한 신부로 주의 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락한 둥지가 흔들리고 미래가 불안해진다면 깨어서 기도하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 둥지에서 우리를 밀어내실 때 두려워하지 말 것은 밖을 나가면 하나님은 더 넓은 울타리를 치고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이 뒷부분에서 보여주는 것은 악의 세력들은 극렬하게 세상을 어지럽히고 성도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 볼 계시록을 통해 사탄을 분별하는 시각을 갖게 하시고, 어떤 시련도 능히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