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나산가족캠프를 은혜 가운데 잘 마치고 오늘 주일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제 밤은 아가서를 통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느껴 보았습니다.
술람미여인은 솔로몬의 가마를 타고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가 되었고 솔로몬은 끝까지 술람미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별궁에 방치했다면 아가서를 기록으로 남겼겠습니까?
사랑이 끝나면 연애편지도 태워버리는거잖아요?
그래서 아가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성경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도 약속하신 천국으로 반드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장면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곳은 솔로몬의 왕궁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새하늘과 새 땅에 세워진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영원한 복락의 새예루살렘성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영원히 살게 될 우리의 거주지에 대해 너무 무심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제가 처음 일산에 아파트를 분양받았을 때를 생각해보면 틈만 나면 일산까지 가서 아파트가 몇 층까지 올라갔나, 어떤 모양으로 지어지나 설레며 바라보았었습니다.
천국에 대한 우리의 문제점은 천국에 대해서 너무 생각을 안 하고, 너무 천국을 모른다는 것과 천국에 대해 그나마 잘못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지식들이 대부분 천국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통해 들은 것이라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천국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온갖 잘못 된 지식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과 종말론에서 사이비와 이단들이 가장 많이 생겨납니다.
오늘 요한사도를 불러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경이 말씀해주시는 천국에 대해 잘 살펴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 날을 설레며 기대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성경적 내세관은 우리가 이 세상과 육신을 벗어난 뒤 새하늘과 새땅에 영주한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요한사도는 갑작스럽게 눈 앞에 펼쳐진 새 하늘과 새 땅을 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처음 것들은 분명히 없어집니다.
우리가 이 새하늘과 새땅을 대면하는 것은 개인적인 죽음을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요한이 본 계시에 의하면 역사 끝에 모든 사람들과 만물들에게 한 순간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히 존속될 것 같은 이 세상이 종말적으로 한순간에 사라져 없어질 것은 성경에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선지자도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린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에도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은 풀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새롭고 완전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 세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은 올바른 종말관입니다.
성경을 벗어나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간증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책들은 천국에 대해 지루하리만치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보고 온 천국은 다 다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미궁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고 온 천국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가 살고 경험한 이생의 삶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밭에 고급스런 빌라들이 들어서 있고 웅장한 저택들도 있다고 하죠.
천국은 그런 곳일까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정확히 체험한 사람은 바울사도와 요한사도입니다.
천국의 환상을 본 선지자도 있지만 부분적인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체험한 천국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굳게 함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서 육신의 장막을 벗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말만 합니다.
요한사도는 본문에서와 같이 자신이 목격한 천국에 대해 다소 애매하고 낯선 천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 요한이 천국을 지어내서 기록했다면 많은 간증집들 처럼 더 자세히 생생하게 천국을 그렸을 것입니다.
지어내려고 마음먹었으면 더 완벽하게 했겠죠.
그러나 천국의 모습은 요한에게도 난생 처음 경험하는 세계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모습들을 상세히 보여주셨다 해도 천국을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그것을 표현하기는 힘듭니다.
애써 표현해도 더 애매한 모양만 나올 뿐이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은 헌 것이 아니라 새 것입니다.
등불을 사용하다 전기불이 들어왔듯이, 라디오를 듣다 TV를 보게 되었듯이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죠.
천국은 이 세상의 것들이 보충되고 개선 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없었던 새롭고 완전한 천국을 요한은 분명히 보았지만 그것을 이세상것에 빗대어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천국을 제3의 장소가 아니라 현재 지구가 새롭게 갱신되는 것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0 이나 신0 지가 다 이런 천국관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사도는 분명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은 장차 내가 새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창조’라는 단어는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땅의 모든 피조세계는 잠시 살다 갈 사람들을 위주로 창조되었습니다.
영원히 살게 될 부활한 우리 완전한 몸에 이 세상은 아무리 고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살게 될 새하늘과 새 땅은 요한사도가 보고 기록한대로 처음 세상이 아니고 영원히 존속하는 완전하고 새로운 곳입니다.
성경을 벗어난 어떤 개인적인 체험도 우리의 신앙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요한사도는 이 새하늘과 새 땅에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은 신부가 신랑을 위해 꾸민 것같이 최고의 아름다움과 가치로 단장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장차 새하늘과 새땅을 받아 누리게 될 거룩한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 자체를 의미합니다.
9절 이후에 보면 천사가 어린양의 신부를 보여주겠다더니 새예루살렘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새예루살렘성이 곧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라는 것이죠.
그리고 뒤 이어서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한편 새 예루살렘성은 장차 성도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동시에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아름답고 광대한 새예루살렘성의 모습에 대해 10절부터 자세한 묘사가 나옵니다.
먼저 이 성의 모양은 거대한 주사위모양의 정육면체 건물을 연상시킵니다.
가로와 너비와 높이가 똑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크기에 있어서는 한 면이 만이천 스타디온이라고 합니다.
만이천스타디온을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이만이천 킬로미터입니다.
한쪽 면이 이만이천 킬로미터라면 면적은 약 오억 제곱킬로미터나 됩니다.
제가 찾아보았더니 중국의 면적이 천만제곱킬로미터가 채 안됩니다.
그러니까 새예루살렘성이 어마어마한 규모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숫자들은 사실적인 숫자들이 아니라 거의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12,000이라는 숫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크고 완전한 숫자인 12에다 천을 곱한 것입니다.
이 숫자를 상징적인 새예루살렘성의 크기는 중국정도가 아니라 무한히 광대하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은하계도 엄청난 규모에다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데, 천국의 규모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게 광대할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이 성은 열두가지 진귀한 보석으로 기초를 놓았고 벽은 맑은 유리 같은 금으로 되어 있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12가지 보석과 정금도 우리가 가장 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새예루살렘성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죠.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요한이 본 새예루살렘성은 외형적인 모양보다는 그 광대함과 완전함과 값어치를 말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을 물질적이고 공간적인 차원에서 알고 싶으면, 그것은 가봐야 압니다.
천국은 이런 물질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치를 요한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에서 보좌에서 큰 음성으로 이렇게 천국의 가치를 알려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
천국이 가장 좋은 이유는 그곳에는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가장 완전하고 진실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그 영광의 빛 가운데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풀지 못할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있지만 새하늘과 새땅이 오면 가장 완전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속죄해주신 예수님이 바로 그곳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천국이 금으로 되어 있고,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에 쌓인 부족함 없는 곳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누릴 수 있기에 천국은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곳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천국도 원치 않는다는 사람만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또 천국은 모든 좋은 것들이 존재하는 반면 모든 나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사는 이 처음 세상엔 애통으로 마음이 찢어지고 죽음의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고통을 보고 계십니다.
그 곳에서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언제 우리가 그런 눈물 속에서 지샜는지 기억도 안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통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처음 것은 다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가 큰 감격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완성하신 이 구원의 대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큰 기쁨과 감격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게 뭐가 그리 어렵고 대단한 일이냐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비뚤어 나가는 아이 하나를 감당해 내기도 힘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이 악하고, 하나님의 감동 없이는 하나님을 향해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는 영적 게으름뱅이들을 이끌고 우리 모두를 천국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심판해야 하는 아버지의 고통스런 희생이 있었고, 아들하나님의 피흘리심이 있었고, 성령의 애통하며 이끄심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 두려워하는 자들, 흉악자들, 살인과 음행하는 자들, 점술가와 우상숭배자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의 악을 제어하고 지은 죄를 다 갚기 위한 형벌을 받을 곳은 따로 있습니다.
8절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고 신실하니 기록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자기가 불쌍한 중생을 가르치겠다며 지옥의 존재를 비웃은 유명한 승려도 있었습니다.
지옥이 교화가 되고 회개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면 뭐하러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겠습니까?
인간의 사악함과 본질적인 죄성은 불과 유황으로 다스려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김정은, 빈라덴, 히틀러,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 살인자들, 이런 사람들이 어떤 형벌로 그 악한 본성이 교화되겠습니까?
그 모두는 자기가 행한 모든 악행에 대한 형벌을 받으며 그런 악을 행할 기회를 아예 원천봉쇄한 곳 지옥에서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은 지독하신 것이 아닙니다.
공의와 심판, 청결, 거룩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독한 어리석음이고 애매모호하게 죄를 옹호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녀가 악한 데 밥만 먹이고 좋은 옷만 입히며 두둔하는 게 사랑입니까?
우리의 사랑이 그나마 진실이기에 자녀들과 부딪치고 싸우기도 하는 것이죠.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지옥이 아닌 새예루살렘의 복된 미래를 보장받았는지 생각하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이고 축복임에 송구할 뿐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고 이 복을 지켜내기 위해 7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받으리라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영적 싸움이 이 땅에서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미 이 편지를 받았던 아시아의 교회들은 로마제국의 큰 박해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요즘 꾸란 한 줄이라도 외워서 해외여행을 가야겠다고 꾸란 경구와 읽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여행사에 쇄도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상엔 이런 두려움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또 눈에 보이는 세상은 날로 눈부시게 화려해지고, 이 문명은 영원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따라 살면 점점 더 세상에서 소외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듭니다.
이런 세상의 두려움과 세속의 위력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더욱 경건으로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켜가야 합니다.
저도 요즘 시시각각으로 ‘정신을 차리자’를 되뇌이며 하나님을 더 힘있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하신 새예루살렘성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은 건강하고,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이 내 곁에 있고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말들은 오히려 촌스럽게 보이고 낡은 유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우리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이 그림자처럼 다가옵니다.
그런 순간이 코 앞에 닥치면 내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었을 때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 다급해집니다.
그때는 다급해져요.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새예루살렘성을 우리가 상속받은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엄청난 힘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모두다 오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끝까지 이 믿음으로 이기는 자들이 되어 새예루살렘의 영광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6년7월3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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