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4장 (보좌에 앉으신 이)

남수연 2015. 10. 14. 22:40

오늘 말씀은 요한사도가 본 하나님과 천상예배의 모습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던 하나님의 모습이 느껴지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하나님은 하얗고 긴 수염에 자비로운 웃음을 짓는 신선 같은 할아버지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사도가 본 보좌 위에 그런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신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보았다, 천국을 가봤다 하는 사람들이 꽤 되고 각기 그 경험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공식적인 한 가지 루트를 통해서만 자신을 가장 정확하고 일관되게 계시하십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의 경험과 성령님의 감동을 통해 기록한 성경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밝혀주셔서 올바른 깨달음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종말에 세상에서 벌어질 무시무시한 심판과 기괴한 환상들에 무서움을 느낀 적이 있으실 겁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에스겔서만큼 계시록 해석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대한 설교들도 대부분은 앞 장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 정도만 다루고 나머지는 덮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단들은 마치 자기들만 계시록의 비밀을 풀어낼 열쇠를 갖고 있다고 설쳐댑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00 같은 이단에 빠지고 종말론 이단에 빠지는 이유가 계시록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계시록은 사실은 그렇게 비밀스러운 책도 무서운 책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서두인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만일 계시록이 내용들이 엄청난 비밀이라면 어떻게 읽고 듣고 지키겠습니까?

계시록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괴한 성경이 아닙니다.

우선 계시록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이 성경의 내용들이 전부 다 인류의 종말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데서 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분명히 밝히셨죠.

때가 가까움이라

이 계시를 열심히 읽고 지켜야하는 이유가 그 일들이 일어 날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이 기록된 때가 서기 100년 이전인데, 그 때부터 가까운 미래에 곧 일어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일차적으로 저자들이 성경을 쓰던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로마서가 바울 당시에 살던 로마교회를 위해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은 당시 누가가 잘 알던 귀족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진 편지였다는 것이죠.

요한계시록은 서기 100년경에 지금의 터키 위치에 있던 일곱교회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그러니 2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아직 일어나지 않는 지구의 종말에 대한 시나리오를 뭐하러 그들에게 써서 보냈겠습니까?

계시록의 환상들은 역사적으로 당대에 거의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계시록은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수천년전에 일어났던 성경의 다른 모든 사건들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처럼 계시록도 그런 것입니다.

당대에 예언되고 이루어진 일들이 현재 우리 주변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기에그 때 주셨던 하나님의 계시는 현재 사건들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계시록에 예언 된 일들 중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인류의 마지막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인류의 마지막 날, 계시록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마지막장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종결되고 선과 악이 심판받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다스리시는 영원한 새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 정도로 이해하고 계시록을 대하면 이 말씀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것을 더 풍성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천국에서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과 그 주변의 광경을 보여주시는데요.

1절에 하늘에 열려져 있는 문이 보이는 데,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일어날 일을 내가 보여주겠다. 는 소리를 요한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절에 보니 그 말씀에 이어 내가 곧 성령에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육체에 속한 우리는 영의 세계를 감지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보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왜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 잘 모르겠고, 잘 안 믿어지냐 생각하신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몹시 바쁜 현대의 성도들은 6일 동안 성령의 감동보다 일에 쫒기고 세상의 풍속을 따르며 삽니다.

6일 동안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 같고 세상이 주는 메시지가 진리인 것 같이 삽니다.

그러나 주일예배에서 성령이 감동하시면 하나님과 천국이 믿어지고 영혼이 힘을 얻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감언이설을 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도록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나머지 6일 동안도 죄와 세상에 질질 끌려 살지 않고 믿음으로 이기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사도가 본 열린 문은 천국 입구에 무슨 도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과 세상이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 붙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문은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문은 요한에게 올라오라고 막 열어준 게 아니라 단어의 시제로 볼 때 진작부터 열려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천국과 이 세상은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임해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 위에 임하셔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로 올라가 하늘에서 엄청난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그렇게 보여 달라고 졸랐던 그 성부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막 간청했잖아요.

아버지 좀 한번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하나님을 한번 보여주면 내가 예수님 말씀한대로 다 믿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좀 확실하게 보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잘 믿을 것 같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요한은 제자들이 그렇게 궁금해 하던 그 하나님을 드디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목격한 모든 것을 기록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요한이 알려주는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를 심히 당황하게 합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 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나님이 광물질 보석으로 된 분이라는 말씀입니까?

왜 요한은 많고 많은 표현 중에 하나님을 하필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보석처럼 존귀하시다구요?

그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죠.

신학자들이 그 의미를 밝히려고 무던히들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이해되었고 성령이 그렇게 감동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 예수님을 잘 안다, 성령의 음성을 잘 듣는다 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본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얼마나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을 잘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계시록에서 그가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인자 같으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1장에 보면 요한이 보았던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고 써 있습니다.

영광을 받으시고 본래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화에 나오는 곱슬머리 예수님을 떠올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과 이해 안에 정리되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보았지만 표현이 다 모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서 성경에 나타나신 것 이상으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피조물의 위치를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018절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그러니까 오늘 요한이 보고 들려주는 하나님의 형상도 그 분의 영광도, 또 보좌에서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수정같은 유리바다가 펼쳐진 광경들이 우리는 아무리 들어도 감이 잡히질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신비로 장엄하게 존재하시고 아무리 이미지를 그려본다고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긴다는 것은 이런 형상을 보거나 느껴서가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를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면 충분합니다.

 

요한의 시선은 곧 보좌의 주변의 인물에게 옮겨 갑니다.

옆에는 금관을 쓴 이십사 장로들이 그들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보좌와 보좌 가운데에는 신비하게 표현된 네 생물이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경배의 태도를 요한은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그들의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히려 더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갑자기 다 일어나서 머리를 숙인다면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외적으로 드러난 형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좌 주변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통해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고 온전하신 성품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십사 장로들은 아마도 신약과 구약에서 구원받은 경건한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좌하는 네 생물이 나옵니다.

6,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 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 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천사들의 모습 역시 상상이 잘 되지 않죠?

일단 하나님보좌 곁에서 섬기는 천사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얼굴이 곱상한 미소년과 같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묵시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사물을 명료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으로 은근히 나타내는 것이죠.

네 생물이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 같다는 것은 그 천사가 가진 탁월한 역할과 능력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자 같은 용맹과 송아지 같은 충직함, 사람과 같은 뛰어난 지혜, 독수리 같은 우월함을 가진 특출난 존재들인 것이죠.

심지어 네 생물은 앞 뒤와 날개에 눈이 가득했다고 표현합니다.

가득한 눈은 무엇을 말합니까?

천사가 앞만 보고 사물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인식하는 뛰어난 지각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기민한 사람을 보고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 같다고 하잖아요?

5장에 보면 4장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죽임당한 어린 양이 하나님 보좌 앞에 서있다고 표현합니다.

계시록에 표현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계시록을 읽을 때 표현된 것을 외모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면 굉장히 이상한 그림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뒷부분에 황충이 갑옷을 입고 유황연기를 뿜어내며 사람을 꼬리로 죽이는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들도 다 마귀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해악과 잔인함을 말한다는 것이지 그런 모양을 하고 나타난다는 게 아닙니다.

8절에 보면 보좌 옆에서 섬기는 이 신비한 네 생물들이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합니다.

이 특출 나고 뛰어난 천사들이 단지 억지로, 혹은 기계적으로 밤낮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과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은 상대가 가진 권력과 힘에 압도되어서가 아닙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될 만큼 인격적으로 흠모할 만한 상대에게 비로서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밤낮 쉬임 없는 찬송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애로우심과 거룩하신 성품에 대해 저절로 흘러나오는 마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또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그런 성품은 영원히 다 이해할 수 없고, 단지 매순간 경탄이 나오고 , 놀라운 마음으로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은 영원히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24장로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위해 하신 위대한 역사를 보여줍니다.

24장로들은 자기의 금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면류관을 다시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들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진심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모든 것을 다해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고 희생하며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그들이 누리게 된 것들을 보니 자신들의 한 일이 너무 미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노력한 것 이상의 지나친 대우를 받거나 상을 받으면 사양하게 되잖아요?

천국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한 것들을 주실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들인 노력과 희생의 하찮음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것임에 놀랄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해주시고 외아들의 피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영원한 천국의 유업과 영화롭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도 과분한데 금관이 웬말이냐는 것입니다.

이 광경이 바로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눈으로 보고 똑같은 감격 속에서 하나님께 드릴 감사요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신비한 천상의 모습을 요한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사회상황이 녹아있고, 성도들의 형편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섬기던 신자들에게 로마황제 숭배가 강요되고 있었습니다.

호사스런 보좌와 주변에 늘어선 보좌관들과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마치 신처럼 군림하던 황제들은 신자들의 숨통을 쥐고 있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계시록 기록 당시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는 네로황제의 박해보다 더 심하고 길게 이어졌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영국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미티안황제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 시키는 방편으로 황제숭배의 종교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로마내의 모든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 황제를 위해 향을 태우고 황제는 주님이시다를 외치도록 지시했습니다.

하나님만 경배하던 성도들에게 그의 제위기간 15년은 혹독한 시련과 순교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사도요한도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해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2장에 보면 이미 버가모교회에서 순교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박해 아래 숨죽이고 견디고 있는 교회들에게 주신 위로와 은혜가 바로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이런 두려운 상황 속에서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떨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베일을 거둬 젖히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세상의 박해와 고난을 이겨낼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시련을 이겨낼 무기가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천국의 실체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 천국과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확신만이 현실을 이길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앞으로 진행 될 잔혹한 기독교 박해역사의 소용돌이를 요한은 환상으로 보고 얼마나 슬프고 두려웠을까요?

그것을 6장부터 써내려가는 요한의 손이 얼마나 떨렸을까요?

그러나 요한은 천상에서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았고 그것을 믿으라고 써내려갑니다.

그는 박해로 죽어가면서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천국에서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의 모습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 결말의 영광을 기록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랑하는 교회의 손에 넘겨 준 것입니다.

요한의 서신을 받은 일곱교회는 예수님의 격려와 확신의 말씀을 듣고 지켰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고난을 겪어야 했지만 그들이 죽음으로 입증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각자가 진 삶의 무게와 짐이 다 있습니다.

저런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으랴 싶어도 근심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하늘보좌에서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내 삶도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근심에서 벗어납니다.

이 땅의 문제를 바라보기보다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확신하는 것만이 땅의 문제를 작게 만들어 승리하며 살아가게 하는 방식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하는 데 사실 아무리 해도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의 형상과 천상의 보좌가 실감 있게 느껴지지를 않았습니다.

요한처럼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보좌가 내려오시는 은혜를 좀 받고 성도님들과 좀 나눴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은혜는커녕 무거운 짐이 점점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공원으로 운동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걸어가는 내내 왠지 마음이 좀 무거웠습니다.

어두운 산책길을 돌며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보좌의 은혜를 주시길 기다리는 데 점점 비장한 마음만 들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평소 걷던 공원의 반환점을 돌 무렵, 갑자기 꽉 다물었던 제 입에 살포시 웃음이 피어났습니다.

갑자기 무겁게 드리웠던 마음 속 무언가가 싹 걷히며 심령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처럼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보좌가 보이진 않았지만 희미한 별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으로 반짝이는 데 그 순간 제가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울먹거리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좀 전까지 보이지 않던 주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나와 내 문제만 바라보던 시선이 하나님께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씩 물들어 가는 나뭇잎이 가로등에 반짝이는 모습, 습지의 풀냄새, 함께 자전거를 타는 중년의 부부.

그 모든 것 속에서 신기하게 하나님의 영광이 다 느껴지는 겁니다.

정말 시편 말씀처럼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요한처럼 천상에 보좌를 베푸신 하나님을 원했는데, 하나님은 만물에 투영되어 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더군요.

그러고 나니 좀 전까지 세상 고뇌를 혼자 다 지고 있던 것 같던 내 삶이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인생도 이정도면 괜찮지 싶은 생각이 들며 소소하게 펼쳐지는 이 모든 생활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경험을 이야기 하시는지 아시겠죠?

우리가 가난하건 부자건, 건강하건 약하건, 좋은 직장을 가졌든 좀 힘들게 일하건, 현재 우리 삶을 가장 만족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나를 두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에 충만하고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좀 초라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좀 전까지 작은 교회를 힘들게 꾸려나가는 것이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졌는데 이정도면 됐지, 좀 초라하면 어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가 막 하고 싶은 거예요.

그 밤에 얼굴도 안 보이는 데 주책맞게 무슨 전도입니까?

하나님의 보좌는 현재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함께 계시는 줄 믿습니다.

힘들고 낙망될 때, 지쳐서 미동하기도 귀찮을 때, 우리의 마음으로 보좌 위의 우리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주의 영광의 빛으로 회복시켜주시길 간절히 탄원할 때, 하나님은 서서히 우리 마음을 주의 광채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황제의 박해를 견뎌내고 승리하도록 계시록의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힘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2015년10월11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