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3장14절-22절)

남수연 2015. 8. 11. 16:49

 

한 결혼 정보회사에서 사귀다 헤어진 경험이 있는 500여명에게 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여성들의 답변 중 1위는 상대남자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자 쪽 답변 1위는 상대여자의 깐깐함이라고 했고 2위가 우유부단함 이었습니다.

남녀 모두 우유부단한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들 연애할 때 참고 하십시오.

통계가 말해주는 대로 요즘 세대는 우유부단, 미지근한 세대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보니 연애도 이렇게 미지근하게 하는 것이죠.

우리 때는 할 게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연애도 참 뜨겁고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제 친구는 사귀자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하루는 안 만나주면 죽겠다고 진짜 차도로 막 걸어 들어가는 걸 보고 놀라서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진짜 죽어버릴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서로 딴 사람하고 하더군요.

우유부단한 요즘 세대에 목숨을 걸고 하는 연애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유부단의 이유는 선택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선호하는 것이 확고하거나 그 방면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우유부단할 수가 없죠.

가치가 있는 쪽에 마음을 정하면 갈등이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것만 해도 새신자에겐 이런 저런 이유로 갈등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잘 자리를 잡으면 주일예배 정도는 갈등 없이 드리게 됩니다.

이 세대 전반의 미지근하고 우유부단한 정신이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만명이나 되는 교회 안나가는 가나안성도가 생기는 것이죠.

본문은 요한사도가 지구의 역사적인 종말의 계시를 본 뒤 예수님의 명령대로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격적인 종말의 환상 전에 예수님께서 일곱교회의 믿음에 대한 평가서를 서두에서 발표하십니다.

실제 편지를 받았던 일곱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평가에 얼마나 놀랐을까요?

고난 중에 힘겹게 믿음을 지키던 교회엔 큰 위로를 주셨지만 얼굴이 화끈해지는 책망을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인생의 종말을 코 앞에 두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삼십년, 오십년, 백년의 삶을 보장해 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질병과 사고가 아니면 국가적인 재난이나 자연재해 같은 것으로 언제든 개인적인 종말을 맞을 수가 있는 것이죠.

오늘 본격적인 지구종말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기 전에 각 성도들에게 믿음의 평가서를 보내신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부족한 부분을 고치고 구원을 굳게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똑 같은 줄 믿습니다.

 

본문은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평가서입니다.

이 교회는 우유부단, 미지근함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이 꼭 라오디게아 교회 같다고들 합니다.

사실 보통 성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앙의 상태는 미지근함일지 모릅니다.

미지근함의 장점이 있잖습니까?

아주 차갑지 않아서 조금만 불을 때면 뜨거워 질 수 있고, 보통 때는 너무 뜨거워서 데지 않아서 좋다는 것이죠.

너무 신앙에 열정을 갖고 뜨겁게 끊는 사람 부담스러워 하잖습니까?

미지근한 신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도 드립니다.

다만 교회를 떠나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면 세상 쪽 사람이 된다는 것이죠.

미온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은 이렇게 너무 쉽습니다.

주일예배 드린 뒤 나머지 날들은 기도와 말씀과 하나님의 뜻은 제쳐 두고 급한 세상 일 먼저 하고, 여유가 좀 생기면 세상의 오락과 문화를 좀 즐기다 다시 주일예배 나오면 미지근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일예배도 지키지 않을 정도라 책망을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당시 이교도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결단을 한 것을 보면 우리보다 믿음이 더 좋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도 평신도 때 미지근은 아니지만 뜨뜻 미지근한 신앙생활 좀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 신앙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신앙생활 참 저절로 쉽게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에 너무 자연스럽고 잘 맞는 이 미지근한 신앙이 왜 나쁜 걸까요?

좀 미지근하게 신앙생활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미지근한 신앙에 대해 오늘 강력하게 책망 하십니다.

1. 미지근한 신앙이 나쁜 이유는 정상적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다

보통 하나님을 향해 뜨겁지 않은 신앙이라면 마음을 둔 데가 또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적인 삶이 좋아서 그것도 떨쳐버리지 못하겠다는 것이죠.

제가 보았던 많은 신자들 중에는 주일예배조차 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걸었지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적당히 오가며 삽니다.

세상이 더 많은 재미를 주고 욕심을 만족시켜주면 얼른 세상을 선택합니다.

절대 하나님께 대해 뜨거운 열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문화 속에는 우리 죄성을 키우고 거룩한 성품을 갉아먹는 마귀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탐닉하며 하나님 사이를 오가는 것은 영적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마귀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거듭난 신앙이라면 언제까지 둘 사이에 머뭇거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신앙자세에 대해 예수님께서 불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그런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 울컥 토하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만일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직접하셨다면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우리가 미지근한 신앙정도 별 문제가 되겠냐 싶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문제될 게 없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역겹게 표현을 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지근한 신앙은 끝까지 고수해선 안되는 나쁜 신앙태도입니다.

분명히 미지근한 성도를 토해버리겠다는 경고를 하셨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충격 발언을 하시고 예수님은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라

미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질책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망하는 걸 보고 있을 부모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톡톡히 댓가를 치르셨기에 절대 우리를 놓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니 책망하고 징계해서라도 마귀의 영향권을 오가는 미적지근한 신앙에서 빼내셔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지근한 성도들은 정말 예수님이 삼킬 수도 없고 토해 버릴 수도 없는 근심을 끼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미지근함은 천국도 지옥도 싫어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에선 미지근한 신앙이 역겨워 내치고 지옥조차도 그들을 받아들이길 꺼린다고 말합니다.

천국에서도 처리하기가 골칫거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쉬엄 쉬엄 미지근한 신앙을 선호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다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 미국의 남북전쟁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의 연설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옆에 랭카스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남부와 북부의 경계지역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이 마을 사람들이 누구 편에 서야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한 결과 상의는 북군 옷을 입고 하의는 남군 옷을 입기로 했다고 합니다.

북군이 밀고 내려오면 북군 상의을 입은 것을 보고 봐줄 것이고 남군이 밀고 올라오면 남군 하의를 입은 것을 보고 살려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말하자면 자기들은 두 쪽을 다 환영하는 평화주의자라는 표시였겠죠.

결과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북군과 남군이 밀고 땡기는 접전에서 북군들은 남군바지를 보고 총격을 가했고 남군들은 북군 상의를 보고 총을 쏘아서 거의 주민들이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내 안전과 번영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다 끌어 안으려고 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이 주는 잇점도 취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신앙에다 그 땅의 토속신까지 추가로 받아들인 이유입니다.

예수님만 따르면 충분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미래까지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세상의 즐거움보다 더 큰 평안과 기쁨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미지근한 신앙이 나쁜 이유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장 염려하는 치명적인 해악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시련과 고난이 올 때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 돌아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디모데후서 410절에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바울사도의 큰 동역자였지만 믿음으로 인해 시련이 올 때 세상을 택해 떠났습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과 체험적인 깊은 신앙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엔 더 확실해 보이는 것을 붙잡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확실하냐, 세상이 더 확실하냐.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6년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고 분명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았기에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시련을 통해 믿음을 시험하는 때가 옵니다.

무사안일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위기는 닥칩니다.

미지근한 믿음이 어떻게 그들에게 문제를 돌파할 능력이 되겠습니까?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수차례의 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멸망했습니다.

지금도 땅에 함몰 된 잔해들만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없는 미지근한 신앙의 더 큰 비극이 이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이 파괴되고 순식간에 생명이 끝날 때 회개하고 돌이킬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줄타기 같은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세차게 불어닥친 인생의 폭풍 속에서 휘청이게 될 때 손을 내밀어 예수님을 잡으려면 평소에 주님이 어디 계신지, 어떻게 만나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오늘 진심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와 현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잘 비추어 보고 바른 믿음을 위해 좀 더 열심을 내길 축복드립니다.

예배를 드려도 한 번 더 드리고 기도를 해도 조금 더 하고 성경을 더 가까이 두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열심히 지키십시오.

미지근한 신앙은 자기도 권태롭습니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하고, 영생과 믿음이 짧은 현세의 내 목숨보다 더 중하다고 결단하면 세상 갈등할 것 없이 인생이 명확하고 쉽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빌붙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다스리며 살게 됩니다.

 

3. 미지근한 신앙이 나쁜 것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이 자기가 부자이고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상태에 있는 성도들이 전혀 자기 믿음에 대해 부족하다고 느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열정을 가진 성도들은 봉사건 경건생활이건 늘 부족함을 느끼고 좀 더 열심을 내려고 항상 자신을 부축입니다.

그런데 이 느긋하고 미온적인 성도들은 전혀 그 믿음상태에 불만도 없고 더해야겠다는 의지도 없습니다.

부족을 느끼지 못하니 앞으로 변화가 될 가망성이 없고 회개의 기회도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사안일하고 나태한 이들의 신앙에 재물이 더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이 되어야 할 재물이 미온적인 성도들에겐 오히려 해악이 되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면 미지근한 신앙에는 물질의 축복을 주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가산이 넉넉하면 성도들이 한층 더 미온적인 신앙상태가 되기가 쉽습니다.

부자 기독교나라를 보면 알 수 있고 한국교회와 성도들 역시 그 방향으로 간다고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잘살던 라오디게아 도시의 부와 안일함이 교회에 그대로 밀려들어온 것이죠.

라오디게아는 금융업과 양모 섬유산업과 의약품 산업으로 유명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의과대학에서 제조한 안약은 효과가 좋아 사방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사업으로 라오디게아는 부자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풍요가 영적인 필요를 마비시켜 버린 것입니다.

물질이 그렇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신기하게 모든 게 다 채워지고 괜찮아진 것 같은 환각작용을 일으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그 돈으로 인해 다른 것도 다 된것 처럼 저절로 마음이 거만하고 높아집니다.

우리 건물도 윗층 장로님과 아래층 약품회사 사장장로님 보면 작은 부자인데도 얼굴에 부에 대한 자부심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사업이 잘 되고 바빠서 말씀도 못 읽고 기도도 못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합니까?

천만에요, 내 인생이 남보다 번창해서 그런거니 못해도 당연하다 여깁니다.

해외 출장이나 행사참석으로 주일을 못 지키면 오히려 잘나가는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자랑이고 부의 상징인 딱 그 세 가지가 영적인 장애물이라고 예수님이 지적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예수님이 내게 와서 사라고 하시는 게 그들이 자랑했던 바로 그 세 가지 품목과 똑같습니다.

그들의 자랑스런 금 대신 불로 연단한 예수님의 금을 사고, 그들의 멋있는 모직 옷 대신 수치를 가릴 예수님의 흰 옷을 사고, 그들의 안약대신 예수님의 안약을 사서 눈을 뜨라고 말씀합니다.

진짜 우리를 부요하게 하는 모든 것은 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세와 부와 성공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걸 얻기 위해 세상에 타협하고 애걸복걸하지 말고 예수님께 가서 진짜 유익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구하고 받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과 이웃과 나에게 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 됩니다.

세상의 부와 성공만을 위해 집착한 사람들을 보면 영적으로는 결국 다 털려버리고 명목만 남은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했던 서머나 교회의 평가서에서는 그 반대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지금 우리에게 남들보다 부족한 것들 때문에 불편하고 속상할 때가 많지만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더 바라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뜨겁게 할 수 있는 유리한 기회로 삼는다면 분명히 상황은 영육간의 놀라운 축복으로 바뀝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었고 헤어나기 어려운 묵직한 문제들이 없었다면 분명 지금 정도의 믿음을 갖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역경을 통해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만나면 세상 문제들 시간이 가면 결국 다 해결됩니다.

그 많던 문제들이 다 어디갔나 싶게 정말 문제들이 줄어듭니다.

좀 부족하고 필요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 해도 그것 때문에 간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섬길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자랑거리로 부요하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성도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사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로를 벗어난 사람들의 삶을 한마디로 대변하면 곤고하다는 것 아닙니까?

로마서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또 그들은 호사스런 모직 옷을 입고 물질적인 걱정이 없어도 가련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안약의 명산지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고 하십니다.

또 그들은 죄의 수치를 가리지 못하고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라오디게아성도들이 이런 비참한 자신의 영적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상태가 오래될수록 사태는 점점 더 나빠집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내리신 처방이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말씀합니다.

맥가브란이란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깨어서 활발하게 일하는 성도가 대개 10%이고 살짝 자고 있는 성도가 80%라고 합니다.

그리고 푹 자고 있는 성도가 10%라고 합니다.

목회자는 10%의 깨어있는 성도들과 교회를 이끌어 가며 살짝 자고 있는 80%를 깨워야 하는 데 푹 자고 있는 10%는 건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깨우면 일어나서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경질 부리지 마시고 모두 주님의 사랑의 권면의 말씀을 듣고 깨어 우리 구원을 굳게 세우고 날마다 풍성한 주의 은혜와 축복가운데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미지근한 신앙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은 신앙입니다.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교회가 미지근한 신앙이 된 이유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문 밖에 세워두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 안에 모셨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주님을 모셔 들이고 식탁에서 밥을 함께 먹는 실제적인 동거를 말씀합니다.

관계를 맺었다 끊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이 완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목숨을 걸고 나를 사랑하시잖아요.

내 인생의 경영권을 주님께 완전히 양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의지적으로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결심과 결단의 순간이 확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께 인생의 핸들을 넘겨드릴 용의가 있으십니까?

정말 예수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런 영광스런 초청에 그렇게 망설입니다.

우리 같이 망가지고 찌그러진 인생 사실 누가 관여하고 싶겠습니까?

죄인들의 인생이란 게 나아봤자 다 거기가 거기입니다.

우리 같으면 내게 도움도 안될 그런 인생에 얽히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예수님께서 맡으셔서 멋지게 고치시고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빚진 인생의 빚도 갚아주시고, 갈 길을 모르는 인생에 등불이 되주시고, 끝까지 모든 일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복자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뭘 뺏어가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내 삶을 케어 해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필요와 식탁을 채워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먹었다고 내일 양식이 떨어지게 하시겠습니까?

걱정 근심으로 한숨을 쉬며 밥숟가락을 뜨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먹는 식탁에 우리를 해칠 마귀들이 넘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삶의 고난과 근심과 짐을 주님께서 함께 져주시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본문 서두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되시고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참되신 예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믿을만 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신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무엇을 하신다고 합니까?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 삶이 뒤집어질 일을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한 식탁에서 먹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적사역 중에 얼마나 많은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까?

세리도 창기도 어떤 죄인도 예수님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고 즐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거룩하고 성결하시지만 죄인들이 주님과 어울릴 때 부담이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를 완벽하게 사랑해주는 사람 앞에서는 불편도 부담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앞에서 자식들이 그렇게 마음대로 구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때 관계에서 피곤과 부담이 있는 것이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나를 이상하게 바꾸실거라는 두려움은 마귀의 날조입니다.

우리의 동의 없이는 예수님 임의로 다른 나를 만들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죄악과 미움과 슬픔과 우울과 가난과 권태로 뒤엉킨 인생을 서서히 질서 있고 아름답게 운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제안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젠 죄를 버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새 인생을 출발하겠다고 주님을 영접하는 결단이 한번은 꼭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대로 결심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경험이 없으면 항상 확신이 좀 부족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결심하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자기 자신이 압니다.

분명히 자기가 결단하고 모셔 들였잖아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잖습니까?

누구든지 문을 열면 들어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되고 비로서 하나님을 인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지각과 감정과 의지가 새 것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한 동기를 주시고 그걸 할 수 있게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싫어집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을 그렇게 믿음으로 복되게 살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까지 쭉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오늘 결단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눈을 감으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결심하는 분은 가슴에 손을 얹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길 결단하신 분은 제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마음 밖에 두고 미지근한 믿음을 가졌지만 다시한번 열심을 내길 원하시는 분들도 함께 아멘으로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주 예수님, 저는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를 짓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저의 모든 죄악이 용서받았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제 인생의 끝에 심판과 영생이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영생을 얻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이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며 살길 원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의 태도를 버리고 기쁨과 활력이 샘솟는 믿음을 갖길 원합니다.

죄를 버리고 예수님이 명하시는 천국백성의 계율을 사랑하고 지키는 삶을 살겠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저의 마음에 오셔서 저를 새사람으로 바꿔주시고 곤고하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생을 축복과 권세 있는 인생으로 바꿔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3년9월10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