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계시록4장에 이어 오늘은 5장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4장에서는 요한사도가 목격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5장은 4장에서 보이지 않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오셔서 인류역사를 끝내게 될 두루마리 문건을 받으시고 수많은 천사들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웅장한 왕의 즉위식 같은 느낌이 들죠.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계시록5장을 그리스도의 즉위식이라고도 합니다.
이번에 계시록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다른 성경들과 좀 색다른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계시록만큼 천국과 하나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는 성경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사도를 통해 보여주시는 모습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천국이 왜 이래?’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검증이 안 된 수많은 천국 간증처럼, 아름다운 꽃이 만개하고 향기가 가득한 곳에, 우리가 각자 살게 될 최고급 빌라들이 있는 그런 천국 아닙니까?
계시록에서 보여주시는 천국의 모습은 왠지 낯설고 두렵기도 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솔직히 별로 그렇게 가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이 살짝 들려고 하는 좀 기묘한 천국의 분위기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열망하는 게 얼마나 물질적인 것에 치우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화려함과 부귀영화를 보여주시며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이 진짜 ‘천국 같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표현할 길이 없는 영광의 실체의 아름다움, 나를 향한 끝이 없는 진실하신 사랑, 그것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 좋은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 같은 것은 우리가 누리게 될 부요와 행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좋아해서 떨어져서 못 살 것 같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어떠세요?
다른 것은 다 모르더라도 이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다들 그러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천국의 모습으로 인해 오해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렴 지구를 이렇게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천국을 어떤 면에서든 그 이상으로 준비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찬란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오늘 요한이 천국에 관광을 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지금 관광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기 위해 올라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일어나는 생소한 모습들은 다 계시록교회의 성도들과 우리에게 더 많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더 확고한 믿음에 거하도록 상징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들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 좀 연출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오른 손에 일곱 개의 인으로 봉인 된 두루마리를 들고 계십니다.
천사는 마치 변사처럼 크게 외칩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그런데 자격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요한이 크게 웁니다.
요한이 우는 상황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악이 심판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지 않으면 지금 지상에서 핍박받고 목숨이 위태로운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매맞고 감옥에 갇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한 장로가 옆에서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하며 인을 뗄 적격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때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한 어린 양이 보좌 앞으로 등장하셔서 봉인 된 두루마리를 넘겨받습니다.
그러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수많은 천사가 일제히 하나님과 어린 양께 엎드려 경배하고 우렁찬 찬양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어떻습니까?
오페라나 뮤지컬의 장면 같은 느낌이 좀 들죠?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심판의 전권을 하나님께 위임받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 지금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6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일들이 일어났다면 좀 어색하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속죄를 완성하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이미 영광을 받으셨고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요한이 본 것에는 현재의 사실들에다 영적 진리들이 적절한 환상과 상징들로 섞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국보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비디오 촬영한 것처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과 상징이라는 렌즈를 적절하게 끼워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구원과 심판한 중요한 사실들을 성도들이 분명하게 깨닫도록 인상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징과 환상은 더 많은 의미와 정보들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완벽하게 봉인 된 두루마리,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이런 상징적인 표현들은 외형적인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와 진리들을 무궁무진하게 담아낼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것은 그런 세세한 상징에 대해서가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는지 전체적인 의도와 교훈에 대해서 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두루마리입니다.
하나님은 오른 손에 두루마리 문건을 들고 계시는데 누구도 열지 못하도록 일곱인으로 봉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팎으로 글이 씌여진 두루마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그 안에 세밀하게 계획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상 역사가 인간들 의지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일어난다는 신비함을 알 수 있죠.
당시엔 두루마리로 보여주셨지만 오늘날 같으면 컴퓨터를 작동할 마스터 키 같은 것으로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에 무엇이 기록되었을지는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6장부터 예수님께서 받으신 이 두루마리의 인봉을 하나씩 차례로 떼시는 데, 그에 따라 지구상에서 큰 격변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이 사건들이 전부 다 지구의 종말에 일어날 일들만은 아닙니다.
넓게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완성으로 인해 급박하게 진전되는 구원역사 전체를 보여주며, 좁게는 요한 당시에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큰 박해와 성도들이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보여줍니다.
이 예언대로, 숨막히는 로마황제의 10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고 결국 로마로부터 공식적인 종교로 승인을 받아내죠.
로마가 무릎을 꿇은 것이고 성도들이 승리한 것입니다.
또 지구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과 선과 악에 대한 심판, 그리고 드디어 영광스럽게 완성되는 천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하나씩 떼시며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종말은 지구열차의 마지막 종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역사의 완성으로 이미 시작된 영혼의 추수기 전체를 말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그의 생애에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죠.
역사적인 종말 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종말도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종말의 시나리오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계시록의 메시지가 감옥에 갇히고, 짐승에게 찢기며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이 땅의 제국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 계시록의 성도들과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인 것입니다.
어느 나라를 위해 살 것인지는 우리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다음은 두루마리를 받으신 어린 양에 대해서입니다.
이 역사의 시나리오를 작동시키실 분은 오직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밖에 없다고 천사는 진술합니다.
이 죽임당한 어린 양에 대한 계시는 당시 밖으로는 로마제국의 박해에, 안으로는 신앙의 문제로 골몰하던 교회에 주시는 명쾌한 해답입니다.
이 계시록이 기록된 시대는 서기 100년에 가까운 때입니다.
교회 안에는 신앙적인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던 교회들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서를 보면 교인들 중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고 육십년이 지났다면 꽤 오랜 시간입니다.
요즘 상봉한 이산가족이 헤어져 있던 만큼의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죠.
요한을 제외하고는 사도들도 다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편지만 남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특출 난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이죠.
또 한가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맞지만 완전히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죽으실 수가 있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잠시 인간인 예수님의 몸을 사용했을 뿐이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미 몸을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질된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주장들 속에서 교회가 얼마나 혼돈스러웠겠습니까?
신학대학도 없고 신학자도 없던 당시에는 이런 문제들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박해 속에서 과연 목숨을 내걸고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확신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죠.
오늘 환상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 통치권을 넘겨받고, 천사들에 의해 하나님과 동일하게 경배를 받으시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모습을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시는 이유를 아시겠죠?
13절을 보면 분명히 보좌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많은 천사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경배하며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이 광경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는 것을 확고하게 못 박는 중대한 확증입니다.
이 말씀을 전해들은 계시록의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고 안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본질이 하나님과 똑같으신 삼위일체 중 한분이심을 분명히 정립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시대에는 점점 더 믿음에 혼란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는 점점 녹아내리는 빙하처럼 가까스로 좁은 자리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교회 때나 오늘날이나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고 따르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점점 죄성에 적당히 맞춘 신앙운동들이 유혹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 양보하지 말아야 할 믿음은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모든 죄를 속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만이 인류를 심판하실 자격이 있으시고, 인류의 마지막 시나리오를 감독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부당하다고 항거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죄성을 갖고 태어난 죄 밖에 없다. 그 책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셔야 된다.’
그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신 자신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이미 모든 책임을 하나님이 책임을 지셨습니다.
그래서 죽임당하신 어린 양만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아담의 불순종한 죄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뤄놓으신 속죄를 믿고 돌이켜 주님을 붙들기만 하면 됩니다.
인간의 타고난 죄성이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안 이상 감정과 관계없이 의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지로 결정하는 것을 왜 못합니까?
인간이 자기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자기의 지각과 이성을 이용해 진리를 판단하고 의지를 다해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매 순간 해야 할 일은 이런 사실을 거듭 거듭 확인하고 내 의지를 다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두에게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양의 피로 사신 교회에 대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얼마나 놀라운 증언인지 한 번 보십시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노래를 부르는 데 그 내용이 ‘예수님과 그의 피로 사신 성도’들에 대한 것입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이게 바로 성도들의 신분이자 영원한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이자 제사장들이고 왕노릇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성도들이 현재 구박덩어리가 되어 광분한 황제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가고 생을 낭비하는 것 같지만 결과는 그게 아닙니다.
영원한 세상에서 그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당한 성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받을 영광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현재에도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귀히 여기고 돌보고 계시는지를 8절에서 보여주십니다.
경배하는 이십사장로들의 손에 하나님께 올려지는 향기가 있습니다.
바로 성도의 기도입니다.
아직 몸은 지상에 있지만 성도들의 기도와 예배는 이미 천상의 하나님 앞에 실시간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고 기도드리는 것들이 금대접에 담겨 보좌 앞에 올려지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 이렇게 밝혀졌네요.
왜 성도들의 기도가 그렇게 고귀하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일까요?
아무리 우리가 허물이 많고 죄 가운데 허덕이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응답하실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새가족초청예배를 준비하며 제가 한동안 오전 금식을 좀 했습니다.
그래봤자 아침에 즐기던 모닝커피 한잔, 간단히 요기 할 빵 한조각 정도 참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하찮은 것을 참고 간구하는 기도에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주 많은 분들이 오신 것 그냥 된 것 아닙니다.
요즘 누가 밥 한끼 먹고, 우산 하나 받겠다고 교회에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오신 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끌고 오셔서, 이 분들 위해 한 마음으로 기도한 우리 모두를 칭찬하고 위로하신 것입니다.
한번 교회 오는게 뭐 대수냐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번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복음을 듣게 하는 게,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나오게 되신 것이고 우리가 계속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계속해서 그 분들의 삶에서 역사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사뭇 경건하고 죄없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와 찬양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게 아닙니다.
매일 두려움에 가슴이 오그라들고, 불안이 땅거미처럼 우리 마음에 길게 드리워지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심란한 마음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처지인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모든 상황에서 도와주심을 믿고 구하는 모든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11절을 보면 엄청난 천사들의 합창이 정말 장관을 이룹니다.
성가대의 숫자가 천천이고 만만이라고 합니다.
세어 볼 엄두가 안 나는 대규모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천국의 규모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웅대하고 찬란한 아름다움 그 이상을 훨씬 초월한 곳이 천국이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지, 지금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가 한없이 팽창되고 있다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을 보면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어지지 않습니까?
사탄이 심판을 받고 떨어질 곳이 무저갱인데, 바닥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주가 한없이 팽창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그 옛날에 이미 성경은 바닥이 없이 영원히 떨어지는 무저갱을 말씀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우주를 하나님이 만들 수 있나 생각하면 오히려 더 정신이 아뜩해지며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사람 하나를 만드실 능력이시라면 우주 그 이상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전 역사와 모든 두뇌가 이룬 업적으로도 아직 인체의 장기 하나를 만들어내지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만 무한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그 어떤 가장 큰 사랑보다 초월적인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겸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겸손을 뛰어넘는 상상도 못 할 무한한 겸손입니다.
바로 이 사랑과 겸손이 나를 천국에 인도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천국에서 우리가 알게 될 때, 오늘 하나님을 장엄하게 찬양하는 천사들처럼 그렇게 감격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진심으로 이 사실을 믿고 감사하며 주님의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에 참여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은혜로운 성찬식이 될 줄 믿습니다.
2015년10월25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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