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의 수학여행지였던 경주가 지진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진걱정은 안하고 살았는데 이젠 지진까지 대비해야 되는 상황이 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머리에는 대지진, 홍수, 전쟁 등으로 인한 지구종말에 대한 예감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무엇보다 확실한 인간 역사의 종말에 대한 성경을 갖고 있죠.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 외에 여러 성경들 속에도 인류역사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에서 예고하는 지구역사는 인간이 환경과 자원을 망쳐 생태계가 파괴되고 생존의 극한 지점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은 나라 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핵전쟁임을 암시하는 모습들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큰 전쟁이 있을 것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파멸이 임박했을 때,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사람을 그 믿음과 행위에 따라 영생과 영벌로 심판하신다는 것이 성경적 종말론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과 경고가 성취되었듯이 계시록의 예언들도 반드시 성취 될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묵시로 가득 찬 계시록에 관심을 갖습니다.
지구종말과 인류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 같은 용어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왠만하면 다 알고들 있죠.
계시록엔 붉은 용이 등장하고,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인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모습들이 기록되어 읽는 사람들은 한층 두려움을 느낍니다.
마치 말세엔 기괴하고 무서운 존재들이 판을 칠 것 같지만 이런 것은 그냥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일과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아시면 됩니다.
계시록은 성도들에겐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확신과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천국에 대한 벅찬 소망을 주시는 복된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서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오늘 말씀을 잘 읽고, 듣고 지킴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복과 은혜가 임하리라 믿습니다.
계시록은 마지막 때를 분별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비밀스런 내용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하십니다.
봉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읽을 수 있게 공개하라는 것이고,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을 무슨 비밀문서처럼 생각하고, 자기만 비밀을 깨달은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그건 오버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사람들이 비밀코드로 생각하는 적그리스도와 666숫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심오한 해석들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간단히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그 수를 세어볼지니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라.
인륜을 넘어 신적인 존재로 자처하는 독재적 인간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 넣었던 네로황제, 히틀러, 공산주의자, 신으로 군림하는 종교지도자 같은 사람들이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계시록은 비밀문서가 아닙니다.
누구나 경각심을 갖고 믿음으로 바르게 살도록 활짝 공개하라고 하시잖아요?
또 계시록이 공개되어야 하는 것은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주후95년경에 씌어진 성경입니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 볼 때 ‘때가 가깝다’, ‘속히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에 사람들은 좀 의아해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두 가지 의미에서 잘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속히 오리니’에서 ‘속히’라는 말은 ‘빨리’라는 의미도 있지만 ‘반드시, 예기치 않게 갑자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자로 다시 재림하실 것이고, 그 날은 예기치 않은 때 갑자기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종말은 역사 끝에 한 날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역사의 모든 시대가 사실은 다 종말론적 상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들이 다 과거의 기록이지만 현재 우리에게 적용되듯이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시록의 전쟁과 박해와 자연재해들은 시대마다 되풀이 되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짓이 항상 똑같잖습니까?
다만 이 패턴이 최후의 종말에 가까울수록 더 심화되고 심각해지고 완전 파멸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제시대 신앙의 박해와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처절하게 파괴되고 생존할 음식도 없던 국가의 종말적인 시기를 지났습니다.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급박한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 안에는 우리 개인적인 종말이 속히 온다는 뜻이 있습니다.
벌써 우리 어머니도 개인적인 종말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셨습니다.
우리 가족과 친지들 중 많은 분들이 수년 사이 개인적인 종말을 맞았습니다.
얼마 전에 성우를 꿈꾸던 한 청년이 불길 속에 잠든 이웃들을 다 깨우고 자신은 깨어나지 못하고 죽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 젊은 청년의 아름다운 희생에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악인들만 비명횡사하는 게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들도 허무하리만큼 불현 듯 종말을 맞이합니다.
사람이 원하고 자신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입니다.
삼성 휴대폰 사태를 보십시오.
이 예상치 못했던 배터리 사고로 일조원 정도의 손해를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삶을 낙관하고 자만할 수 없도록, 강한 복병이 인생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는 것을 이런 일을 통해 우리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우리 생명 종말도 불현 듯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종말을 맞이하든, 아니면 우리 삶의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주님을 대면하는 죽음을 맞이하든 둘 중 하나는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대면할 날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종말에 대한 예고가 감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해도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판과 영원한 천국이 모두에게 알려진다 해도 사람들이 전부 이 길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재난 영화에 보면 먼저 재난을 목격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데, 항상 그 말을 무시하고 재난현장에 들어가 화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죠.
분명히 성경은 최후를 경고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함께 어울려 살 땐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분명하게 양분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향한 방향으로 계속 직진합니다.
개인이든 역사든 종말에 가까울수록 그 정체성은 점점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계속해서 의를 행하며 계속해서 거룩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롭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압니다.
그럼 어떻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의롭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 우리의 의는 내게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의로 덮여졌다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법적으로만 의롭게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우신 속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면 과거에 비해 지금 우리가 좀 더 올바른 사람이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존재가 아닐 뿐 아니라 거룩 자체를 거북해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우리가 취하게 됨으로 거룩은 시작됩니다.
과거에는 죄와 세속을 좇으며 더럽게 살아도 불편하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을 비추시면 점점 더러운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전에는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게 싫어지고 떨쳐 버리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점점 죄와 세속으로부터 분리되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주변의 상인들이 왜 담배를 피우다 제 앞에서 뒤로 감출까요?
제가 무슨 권위자도 아니고 항상 먼저 인사하고 굽신대는 입장인데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뭔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14절에서 주님은 성도들이 두루마기를 빨듯이 항상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라.
두루마기는 잘 차려 입은 공식적인 예복을 말합니다.
우리의 예복은 물론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의의 옷입니다.
창세기3장에서 범죄 한 아담의 수치스런 몸을 가려주기 위해 하나님이 잡으셨던 동물의 그 가죽 옷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가려주신 의의 옷을 예표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두루마기를 빨라는 것은 성도들이 인격적인 거룩을 위해 스스로를 깨끗하게 관리해 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빨다’라는 단어는 현재분사로서 매일 계속 깨끗하게 빨아야 된다는 뜻을 분명히 지시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은 사건이 아니라 매일 그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도록 자신을 올바르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죠.
그럴 때 성도들이 생명나무로 나가고 천국의 도성에 들어갈 권세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와 인격에 대해 확신하고 알아갈수록 깨끗하게 살려는 의지가 강해지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세속과 죄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구야말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 거룩함은 종교적인 분위기의 말투와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죠’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거룩한 종교인이 되어서 남의 신앙을 간섭하고 세상과 부조화를 일으킵니다.
거룩은 세상에 대한 부적응이 아닙니다.
예수님만큼 거룩하신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은 당시의 종교인들과 완전히 다르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항상 죄인들이 들끓고 그들의 잔치자리에 서슴없이 예수님을 초대해서 함께 먹고 즐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신앙의 거룩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종교적인 겉모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남의 죄를 다루는게 아니라 우선 자기 죄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겸손한 사람 옆에서 사람들은 편함을 느낍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곁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지 고독한 섬이 되어가지 않습니다.
거룩은 세속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세속의 가치와 태생적인 죄를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거룩을 닮아가는 데 신경을 쓰십니다.
성도들의 거룩은 환난과 무관하지 않음을 계시록에서 중요하게 다룹니다.
환난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죄의 본성대로 여전히 세속에 끌리고 죄악의 때를 묻히고도 빨래할 생각이 없기에 옷에 묻은 찌들은 땟국물을 시련의 방망이로 쳐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문제들과 고통은 탐욕과 교만과 세상에 대한 애착을 씻어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순순히 자신을 연단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을 말씀대로 행하며 따르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는 주신 삶과 사명에 순종하며 주님을 따를 때 우리에게 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고 희생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더 영광스러운 보상을 현세와 내세에서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인내하며 주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 종말에 대한 예언과 우리에게 의와 거룩을 명하시는 예수님은 과연 믿고 따를만한 분이십니까?
정말 우리가 천국을 믿고 세상의 권리들을 포기하고 따라도 될 만큼 확실한 분이시냐는 질문이 성도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성도들의 질문에 위엄있게 자신을 선언하십니다.
먼저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예수님은 성자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을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셨듯이 그렇게 정말 선하고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인지는 이 자연세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희한하게 풀과 꽃과 나무와 새 같은 것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은 만드신 자연 하나 하나에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달라진 눈으로 그것을 보며 과거와 다른 큰 기쁨을 느낍니다.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무엇 하나 대충 창조된 게 없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심해의 작은 생물들조차 생존을 위한 가장 완벽한 몸과 탁월한 기능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다큐채널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말해줍니다.
정말 자연은 어디하나 손 댈 곳이 없이 완벽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림을 좀 그렸지만, 나무 한그루를 그릴 때도 하나님께서 가지를 뻗게 하신 모양이 가장 완벽합니다.
거기에 무슨 곁가지 하나라도 덧붙이면 졸작이 되어 버립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깃털 하나하나의 색과 모양과 비율이 절묘하게 아름답고 어디 하나 수정할 데가 없이 완벽합니다.
인간의 창조엔 진화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부터 완전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런 자연 속의 생명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저절로 느끼며 경이로움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과 인도하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렇게 작은 미물들을 최고의 지혜로 완벽한 옷을 입히신 하나님께서 왜 내게 대해 그런 계획을 갖고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그것들도 그렇게 기르고 입히시건만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지금도 무한히 팽창하고 있는 우주, 거대한 돌덩이들이 정교한 법칙으로 자기의 궤도를 따라 전속력으로 돌고,
끝도 없는 우주에 계속해서 영문도 모르는 별들이 탄생하고 사라지고,
이런 모든 것들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전능한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머리카락 개수까지 세고 계시지 않다면 하나님은 신이 아니십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생각을 모르겠느냐, 어떤 고난의 순간이든 내가 최상의 계획으로 인도할 수가 없겠느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전능하고 선하신 신이시기에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애매하고 혼란스럽게 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또 16절에서는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신 역사적인 예수님을 밝히십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전능하신 성자하나님께서 자신을 기꺼이 예수라고 칭하십니다.
영광 중에 계신 성자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인간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며 여전히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와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역사적인 예수님은 우리 신앙에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가 믿는 구세주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던 역사적인 실체이시지 상상이나 신화의 인물이 아닙니다.
때로 마음에 하나님이 과연 계실까, 정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 땅에 작은 아기의 몸으로 오셔서 삶과 말씀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시고,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하고 느낄 수 있기에 유일한 실체같이 보입니다.
세상은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체입니다.
이런 현세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고 세상을 쫒지 않으려면 진짜 영원한 세상에 대해 요한계시록을 통해 상기하며 믿음을 자꾸 환기시켜야 합니다.
속히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또 내 인생이 끝나 하나님 앞에 설 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일 각자의 두루마기를 깨끗이 빠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올바른 행실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의 날이 속히 올 것이기에 현실이 내게 어떤 고통을 주든 인내하며 영원한 실체인 천국을 위해 뿌리고 거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계시록의 교회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박해 속에서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성도에게 환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시편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는 데 내게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에게 상으로 갚아주실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그대로 믿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갈 때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을 얻어 기쁨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 계시의 봉인이 해제되고, 계시가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하십니다.
성령과 신부된 교회는 그들을 향해 외칩니다.
오라, 듣는 자도 오고 목마른 자도 오고 원하는 자들은 다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불의한 자가 불의한 길을 가다 멸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에스겔서에서도 밝히신 바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계시록의 초청을 아직 참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외쳐야 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또 주시는 예수님의 뜻입니다.
이 모든 말씀대로 들은대로 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6년9월25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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