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26장1절-16절 (향유를 부은 여인)

남수연 2026. 7. 7. 22:31

https://youtu.be/Md-bMpZymgg

 

 

이제 마태복음의 끝에 가까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이틀 남겨 두고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유다는 배신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 악인들 사이에 한 여인의 헌신을 배치했습니다.

불신 세상 속에서 성도들은 진실되게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헌신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말씀을 본문 순서대로 세 가지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끝내 십자가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구원에 응답하는 성도의 헌신, 그리고 각자에게 돌려지는 구원의 책임에 대해서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유월절에 죽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유대의 권력층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월절에 맞춰 죽이려고 하십니다.

유대 권력자들은 유월절을 피해서 죽이려 합니다.

5절,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결국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여러 번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팔리신다는 것’은 오늘 처음 꺼내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죠.

예수님은 왜 팔리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대속 과정 속에서 이 부분이 좀 부자연스럽잖아요?

종교 지도층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잡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의 배신으로 팔려서 체포되는 것이 필요했을까요?

이것은 우발적으로 생긴 일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이미 예수님이 값이 매겨져 팔릴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유대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판단하고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유월절 명절 기간은 피하기로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의 환호를 보고 놀랐잖아요?

예수님을 이때 체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 모인 유대인들이 폭도로 변할 것입니다.

이들의 불체포 결정대로라면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 지시는 데 차질이 빚어지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이유가 있죠.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던 유월절 날, 애굽의 장자를 심판하는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날 희생된 유월절 양의 피였습니다.

양의 피가 무슨 효력이 있어 죽음의 사자로부터 보호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양의 피가 표적이 되어 죽음의 사자가 뛰어넘어갈 거라 하셨잖아요?

그것을 믿고 실제로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것이죠.

이 유월절 양은 척 봐도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자신의 피로 영원한 죽음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실 예수님의 예표죠.

고린도전서5장7절에서도 이것을 확언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날 죽으시면 유월절과 예수님의 죽음의 상관성이 흐려집니다.

두 사건이 서로 보완하고 설명하는 구원의 의미도 약해지는 것이죠.

또 하나 주님이 죽으시는 데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유월절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명절에는 죄인을 특사로 풀어주죠.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뒤 27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15절,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명절에는 죄인을 놓아주기는 해도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셔야 하는데, 현실은 유월절에 절대 죽지 못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갸룟 유다가 주님을 놓고 거래하자고 대제사장을 찾아간 것이죠.

오히려 권력자들이 원치 않은 쪽으로 사태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입니다.

유다는 꼭 이날 예수님을 넘겨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십자가형을 받으실 것을 몇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로 이틀 뒤에 죽으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잡히실 거라는 말씀이잖아요?

배신할 마음을 굳혀가던 유다에게는 오늘 밤이 예수님을 넘길 마지막 기회인 것이죠.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계획에도 없이 예수님을 체포하게 된 것입니다.

잡아들인 이상 소문이 나기 전에 일을 해치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벽에 졸속 재판을 받고 바로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았다면 주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자수하실 수는 없잖아요?

복잡한 인간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이렇게 오묘합니다.

내가 썼던 각본대로 안된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많은 각본이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잖아요?

하나님의 수가 모래보다 많아 셀 수가 없다고요.

다윗도 어지간히도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나 봅니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들은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유월절 양을 잡고 거룩한 척 제사 의식을 행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백성을 구원하실 진짜 유월절 양을 잡은 것은 꿈에도 몰랐죠.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에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유월절 진짜 희생양으로 죽으신 예수님께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예배에도 예수님이 있는지에 하나님은 최고의 관심을 두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죄인들의 손에 팔려서 돌아가시게 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무지해서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게 단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결국 자기 탐욕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 가해를 하면서라도 대적한다는 인간의 실상을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한 여인의 헌신이 있습니다.

6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절,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감람산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 베다니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 종종 베다니에서 묵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고 하죠.

우리가 잘 아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곳도 베다니입니다.

잔치를 베푼 시몬도 예수님께 나병을 고침받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시몬의 집엔 나사로의 가족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사로의 부활도 감사할 겸 마을에서 큰 잔치가 있었던 것이죠.

마르다는 원래 하던 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찬송가에 보면 향유를 부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데 그것은 작사가의 오류입니다.

또 누가복음에 죄지은 여자가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께 부어드린 사건이 나옵니다.

그것은 오늘과는 다른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성경에 두 사람 나오는 것이죠.

오늘 주인공은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 향수가 삼백 데나리온짜리라고 합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일 데나리온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일 데나리온씩 주잖아요?

그렇다면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는 노동자 일 년 치 정도 큰돈입니다.

이 비싼 향유를 요한복음에는 나드 향유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최고가 향수는 발삼, 몰약, 나드였습니다.

발삼향수의 경우 무게당 가격이 금값의 두 배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동네 베다니는 부자 마을이 아닙니다.

보통 비싼 나드향유는 가보로 물려오다 결혼식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리아가 그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단번에 다 부은 것입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죠.

연회장이 술렁였습니다.

가장 흥분한 것은 제자들입니다.

8절에 이렇게 반응하죠.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주님 앞에서 이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우리가 다 민망스럽습니다.

제자들이 분개한 명분이 무엇입니까?

9절,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주님의 죽으심을 아는 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지금쯤이면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 장례를 의논해야 할 때 아닌가요?

가족들이나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통상 보이는 모습이 전혀 아니잖아요?

저희 형제들은 어머니가 암투병 중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일 자주 모였습니다.

어머니께 보고 싶은 자식들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수원식그들은 평소 어머니 좋아하던 해산물을 열심히 공수해 왔습니다.

어느 날은 닭발이 드시고 싶다 했고, 어느 날은 소머리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소머리를 난생 처음 주문해 봤는데, 소머리가 그렇게 큰 걸 처음 봤습니다.

남권사님이 애를 좀 먹었죠.

어떡해서든 우리 형제들이 어머니께 기쁨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께 정말 옷을 많이 사드렸습니다.

평생 사드린 것보다 더 사드린 것 같아요.

다 입지도 못하실 텐데요.

이런 게 작별을 앞둔 가족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서를 배우면서 우리도 그런 한계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길 원하지만 그게 잘 안되잖아요?

예수님을 알아가는 게 너무 더뎌서 감질나는 것 같기도 하죠.

그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 지각 안에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작은 꽃송이를 드나드는 곤충을 근접 촬영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작은 더듬이와 발에 송송 달린 털이 얼마나 정교하던지요?

부지런히 꽃 속을 드나들며 먹이도 구하고 수정도 해주는 거잖아요?

갑자기 저 작은 생물들의 형질과 완벽한 메카니즘을 설계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단 하나의 생물만 자세히 보아도 그걸 만드신 하나님이란 분에 대해 도무지 엄두가 안 납니다.

그러니까 이 거대한 세계를 한 분의 신이 설계하고 창조했다는 걸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죠.

차라리 제각기 알아서 생겼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한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항상 신비롭고, 경탄스럽고, 만족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주 예수님을 우리가 사람 사이처럼 이해하고 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은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성급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잘 배우며 평생 알아가며 섬기면 됩니다.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처럼 부족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뒤에 누구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헌신하죠.

우리가 성령충만할수록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서 헌신을 안한다는 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향유 헌신을 두둔해 주십니다.

1)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장례를 위해 향유를 부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리아는 주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준비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결과적으로 주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 된다는 뜻일까요?

마리아가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시면 항상 주님 앞에 바짝 앉아서 말씀을 듣는 데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히려 말씀에 관심이 없었죠.

예수님께 몰려온 군중들 사이에서 스탭이나 참모같이 행동했습니다.

말씀에 집중했던 마리아는 유월절에 주님이 죽으실 것을 알았던 것이죠.

우리가 성경에 집중할수록 점점 확고해지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여전히 모호하다면, 성경을 더 배우십시오.

마리아는 어쩌면 결혼을 위해 간직했을 고가의 향유를 주님의 장례를 위해 부어드린 것이죠.

가진 것을 다 드렸다는 것보다,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순도 백 프로 나드 향유의 향기는 길게는 한 달까지도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모욕을 당하실 때도 그 향기가 뿜어져 나왔을 것입니다.

십자가 주변에 피냄새가 진동할 때 주님은 힘든 호흡을 하시며 이 향기를 맡으셨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너무 고맙지 않습니까?

 

2)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복음과 함께 전하라고 하십니다.

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주의가 들어 있습니다.

복음과 성도의 헌신은 마땅히 한 짝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감사하는 성도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하나님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죠.

우리교회만 해도 성도님들의 헌신이 없이 어떻게 교회가 되었겠습니까?

또 성도들의 모든 헌신은 예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나 선교나 구제나 봉사나 개인 신앙생활까지도 예수님을 섬기는 데 목적이 맞춰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큰 헌신이라 해도 에러가 납니다.

지금 제자들이 대단하다는 듯 구제를 내세우지만 그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공경은 전혀 보이지 않죠.

 

하나님께 너무 헌신하면 세상에서 낙오된다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헌신할수록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서도 귀하게 쓰십니다.

미국 아틀란타의 한 교회를 섬기는 윤영0목사가 있습니다.

줄기세포와 심혈관 중재시술 분야에서 천재의사로 알려진 분입니다.

이분이 서른일곱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한번은 연구비를 받고 줄기세포를 연구하던 중 일하던 제자 한 명이 연구 결과를 조작하는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연구가 중단되는 큰 시련을 만납니다.

이 제자가 결과물을 빨리 내놓으려고 실험용 쥐의 세포로 배양한 결과를 사람 세포로 둔갑시켰던 것입니다.

사실이 들통나자 윤박사가 지시해서 한 일이라고 고소까지 했습니다.

힘들게 사건은 해결되었습니다.

그 일 때문인지 연구활동은 계속해야 하는 데 사방에 지원해도 계속 심사에 탈락되었다고 합니다.

연구비를 못 받으면 중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걱정이 앞서는 중에도 변함없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기도 생활을 끊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신학을 한번 해 보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지금도 너무 버거운 현실인지라 안될 일이라고 패스했습니다.

얼마 뒤 기도하는 데 또 그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윤박사가 불쑥 하나님께 딜을 했다고 합니다.

연구비를 주시면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한 게 머쓱해서, 그냥 해 보겠습니다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에 그동안 계속 떨어졌던 연구가 채택된 것입니다.

무려 82억원의 연구비를 받고 연구활동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윤박사님은 약속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 목회하며 에모리대학 석좌교수로 겸직 중입니다.

물론 이런 헌신 된 삶이 낭만이 아니라 고단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대신 보람과 만족이 고단함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더 헌신하고 집중한다고 우리 인생이 협소해지지 않습니다.

이분의 경우가 평범한 우리와 스케일만 좀 다를 뿐입니다.

우리도 신앙에 더 집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할수록 세상에서의 내 입지가 견고하고 확장된다는 걸 경험하잖아요?

지중해의 섬나라인 키프로스에 가면 성나사로교회가 있습니다.

유력한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키프러스로 간 나사로는 그곳의 감독이 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는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데 평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계속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평생 주님을 위해 살길 축복드립니다.

 

3. 예수님을 놓고 거래했던 제자 가룟유다에 대해서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완전한 실패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삼 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유다가 돈궤를 맡고 있었고 돈궤에 손을 댔다고도 합니다.

유다는 예수님 나라에서 큰 몫을 챙길 것을 기대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어차피 잡히실 거라면 조금이라도 내 몫을 챙겨야겠다 결심했겠죠.

그래서 은밀히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거래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매긴 가격은 터무니 없이 적었습니다.

15절,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은 삼십이면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 정도입니다.

대제사장들은 갑자기 찾아온 유다에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제 발로 찾아온 사람에게 거액을 줄 필요도 없죠.

스승을 팔러 온 유다도, 제자에게 팔리게 된 예수님도, 헐값으로 쳤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매긴 금액이 은 삼십입니다.

신비감을 주는 성경 스가랴서에 이 사실이 놀랍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11장13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은 삼십 개 값으로 헤아렸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이죠.

게다가 본문 뒤 27장에 보면 유다가 후회하며 은 삼십을 대제사장 앞에다 던지고 자살합니다.

대제사장은 그 돈을 어떻게 했을까요?

7절,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게 구원의 역사들을 기록했는지 경이로울 뿐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할 걸 알면서 제자로 뽑으셨을까?

제자가 안 되었다면 배신자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예수님은 유다를 배신자로 쓰기 위해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유다를 똑같이 아끼셨고, 가르치셨고, 마지막에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대우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나 유다는 계속 자신의 탐욕을 키우며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안 되자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죠.

유다가 왜 나를 제자로 부르셨냐고 항변할 수 있을까요?

싫으면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실망이 되면 중간에 떠나면 됩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시작은 출세에 있었어도 말씀을 듣고 돌이킬 기회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은 죄의 올가미를 씌워서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가룟유다의 탐욕을 올가미로 써서 스스로 파멸시킨 것은 사탄입니다.

가룟유다를 보며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엄중히 자신의 책임을 물으신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입니다.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과 같다면 예배와 삶이 복될 것입니다.

억지로 헌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분명히 느낀다면, 거기에 대해선 감사하며 조금씩 헌신하십시오.

그 헌신은 내게 큰 즐거움이 되고 내 믿음과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면 얼마나 삶이 빈약하고 영혼이 궁핍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마리아의 헌신을 복음과 함께 기록하셨듯이 우리의 헌신을 기뻐하시고 영원히 기념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