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22장1절-14절 (친구여 예복은 어디 있나)

남수연 2026. 6. 15. 22:32

https://youtu.be/rvwcgk0AALQ

 

오늘 말씀은 잘 알려진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나온 왕은 좋은 왕입니까, 나쁜 왕입니까?

비유의 내용만 보면 좋은 왕이기보다는 괴팍한 왕 같은 느낌을 주죠.

비유 말씀에서 주의할 것은 비유만 보고 해석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었을 때 왠지 석연찮은 느낌을 가진 것은 이 비유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중요한 진리를 쉽게 설명하는 것이지만, 전체적인 진리를 통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비유 속 이야기와 실제, 둘 사이를 오가며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천국잔치에 다 들어가실 것 같습니까?

오늘 이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되신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역사를 완수하기 위해 십자가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지난 주 설교대로 눈을 뜬 바디매오도 따라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처럼 걸어서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빌려 타고 들어오십니다.

사람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메시아이길 기대하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이 장면은 스가랴서에 예언된 메시아 출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령께서 스가랴에게 이 장면을 기록하도록 감동하신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으면 이들이 돌변할 것을 아셨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자기들의 기대를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잖아요?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열광하는 무리를 보며 위기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목적으로 정치적, 종교적 쟁점을 만들어 계속 예수님을 물고 늘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구원받기에 실패할 이스라엘의 결말을 선고하시는 것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장 먼저 선택되었죠.

이천여 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지 구약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이들은 하나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오늘 본문 비유에서 좀 이상한 설정을 하시잖아요?

왕의 초대에 사람들이 한결같이 거절하죠.

왕의 권위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보면 가끔 대통령 오찬에 야당 대표들이 불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청에 불응하는 것은 초청자를 무시하고 협조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의사표현이죠.

구약성경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존중했던 적이 있던가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안 했던 때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 그런 게 아닙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에 강림하시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경외하며 섬기라고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을 독대하는 40일 사이에 바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잖아요?

그들만 그랬고,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을까요?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고 하라시는 것은 잘 지키고 있을까요?

게다가 오늘 비유에서는 잔치에 초청하는 신하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거의 다 죽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근래에는 세례요한을 죽였고, 결국 예수님을 죽일 거잖아요?

오늘 비유는 오랫동안 해 오시던 경고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심판을 선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2. 비유에서 사람들이 왜 왕의 잔치에 참석을 거절했는지를 살펴봅니다.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늘

1) 오기를 싫어했다고 하죠.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이 그냥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하나님이 여러 사건 속에서 여러 사람을 보내 초청하셨지만 몇 번이나 거절했습니까?

그냥 싫어서 멀리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데 이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한번 싫어하는 감정이 들어도 그 마음 바꾸기 어렵잖아요?

하나님을 싫어했던 우리 감정이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면 그게 기적이고 구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가서도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다고 합니다.

구원에 대한 초청에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왕이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하죠.

하나님은 아들을 속죄 제물로 잡으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지금 이땅에서의 삶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버렸다고 하죠.

제가 우연히 미국에 살고 있는 치매부부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요.

미혼인 아들이 치매 걸린 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영상을 찍어 올리더군요.

부모가 둘 다 치매니 함께 사는 아들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치매 부모의 일거수 일투족을 공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영상 작업을 통해 그 고통의 시간을 좀 이겨 보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계속 반복하는 말이 있더군요.

먹을 게 하나도 없어. 뭘 먹고 살지? 우유라도 있으면 먹을 텐데. 먹을 게 없으니 어떻게 살아? 당신 돈 있어? 돈 없으니 우리 어떻게 살아.

냉장고를 열어보고 또, 어떡하지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우유라도 있으면 마실텐 데. 당신 돈 있어?

그걸 잠깐 보다가 마음이 착찹해졌습니다.

저분들이 평생 먹고 살기 위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으면 저럴까.

그런데 치매 걸린 지금까지 저 걱정을 하고 있다니.

기억을 잃을 거면 그것부터 잊어버리면 좋을텐데요.

오늘 비유에서 사람들이 세상 것을 손에서 못 놓잖아요?

그게 행복이기보다 평생 허덕이며 지고 가는 무거운 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잔치에 부르시는 건 세상일은 다 망치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세상에서 내 인생이 이상해지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믿고 난 다음에 세상일도 훨씬 더 능력있게 잘 해냅니다.

그리고 더 잘되잖아요?

구원은 내세 뿐 아니라 이땅에서의 나의 삶도 귀하게 만듭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과거 힘든 때를 생각해 보면 정말 내 힘으로 지나온 게 아닌 게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세상을 붙잡은 사람들이 천국을 포기한 것이라면, 반대로 천국을 붙잡은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이것과 같은 선상에 놓고 점검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3) 자기 일 보러 가지 않고 남아 있던 몇 명은 더 악했습니다.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보통 사람들은 세상일이 바빠서 천국을 거절했지만, 이 사람들은 왕에게 반역하는 데 더 앞장 섭니다.

지금 예수님을 몰아내려고 혈안이 된 종교인과 지도자들입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적으로, 보통사람보다는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이 더 복음에 적대적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더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결국 왕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의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살인한 자들에 대해서는 더 강력한 심판을 선언하시죠.

왕의 처사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이 드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천국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은택에서 영원히 격리되어 자기 죄값을 치르며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처하게 될 운명을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들을 때리고 죽였잖아요?

스데반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고,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 매 맞고 감옥에 갇혔죠.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집과 땅을 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유리하는 처지가 되잖아요?

그리고 오늘 비유대로 사십 년 뒤,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러 로마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대제사장, 장로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살해당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실제로 목격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죽은 사람들이 백만 명에 이른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에 대해 까탈스럽게 굴었습니다.

걸핏하면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이 참혹한 역사는 로마가 골치 아픈 속국 이스라엘을 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이 성취된 것이죠.

그리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이 받을 마지막을 세상에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결코 이 비유를 우화로 듣지 말아야 합니다.

 

3. 이렇게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지만 아직 잔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1) 왕은 다른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처음엔 한 동네를 상대로 초청했죠.

이번엔 누구든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뒤 복음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로 넘어옵니다.

물론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을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고, 이스라엘을 통해 만국으로 전파되는 것이죠.

한 나라가 그렇게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면 얼마나 복됩니까?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겠죠.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졌던 미국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선교하는 나라입니다.

12만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파송한 선교사는 2만 명이 넘습니다.

인구대비 비율로 보면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약 역사의 주역이었던 유대인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왕은 아들의 혼인 잔칫날 초청장을 미리 보냈습니다.

잔치날이 되자 잊지 않도록 다시 신하들을 보냅니다.

반응이 없자 또 다른 신하들을 보내 정중히 참석을 권합니다.

실제로 세 번의 초청을 한 것이죠.

구원 역사의 동반자였던 유대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구원역사의 미스터리입니다.

결국 민족 전체의 구원은 실패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복음을 듣는 각자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시대입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최근 이스라엘 통계에 따르면 현재 기독교인 비율은 1.9%라고 합니다.

백 명 중 2명 정도가 기독교인입니다.

아직도 천국 잔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죠.

 

2) 오늘 비유의 마지막 관문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아 쫒겨났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없다면 그런대로 앞의 비유를 이해하기가 수월하죠.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또 왜 나타나냐는 것입니다.

다시 초청된 사람들은 교회시대 모든 민족을 의미합니다.

초청된 사람들은 억지로 끌려온 것은 아닙니다.

자발적인 의지로 왕의 잔치에 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쫒겨났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예복을 입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죠.

이 예복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당시 중근동 문화에는 왕이 잔치에 초대할 때 좋은 옷을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례가 기록된 자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북이스라엘의 폭군 아합왕가를 끝내고 왕이 된 사람이 나옵니다.

예후입니다.

예후는 아합왕가에서 양성하던 바알과 아세라 사제들을 진멸할 계획을 세웁니다.

바알에게 대대적인 제사를 지낸다고 사제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때 예복을 맡은 자에게 바알사제들에게만 예복을 주라고 합니다.

사람들과 섞였을 때 식별하기 위해서죠.

이걸 보면 왕이 잔치에 초청할 때 옷을 주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왕이 초대한 사람은 네거리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입니다.

평민들의 복장은 꾀죄죄하죠.

불과 백여 년 전 우리나라 개화기 때 흑백사진을 보면 사람들 옷차림이 참 궁색했습니다.

이천 년 전 사람들의 의복이야 더했겠죠.

왕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걸맞는 좋은 예복을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자기가 입은 옷이 왕이 나눠준 예복보다 더 좋다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이 사람은 신분이 좀 높았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의 의복은 어느 정도 신분을 나타내주죠.

이 사람은 왕이 나눠준 예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의 높은 신분을 드러내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왕이 준 예복이 무엇일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이죠.

천국은 예수님의 의를 뒤집어 쓰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처럼 종교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의로 여기며 이것저것을 지키고 내세우는 것이죠.

구원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이스라엘과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서646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오늘 자랑스럽게 자기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막상 연회장에 가보니 그 사람 옷만 더러웠습니다.

그 즐겁고 행복한 잔치에서 불편한 건 그 사람 혼자 뿐이었습니다.

왕이 자신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러 왔다 이 사람을 발견하죠.

예복이 어디있냐는 왕의 질문에 아무 말도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를 가꾸고 다듬었다 해도 하나님의 눈으로 한번 보시면 아무 변명도 못할 것입니다.

예복이 없는 사람은 혼인잔치에서 쫒겨나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추방됩니다.

왠지 우리가 미안해지죠.

그러나 아무렴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자비롭겠습니까?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중요한 결론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말씀은 자칫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많은 사람을 초청해 놓고 실상은 적은 사람만 택해서 구원하신다.

만일 이 말씀을 이랬다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청함에 응하는 자는 적으니라.’

그렇다면 마음에 걸릴 일이 없습니다.

자기의 선택으로 운명이 갈라진 것이니까요.

그런데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가 적다도 하셨단 말이예요.

구원이 자기 선택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도 필요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모든 사람들은 다 잔치를 외면하잖아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겠다고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강권해서 데려오라고 하시죠.

구원은 자기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만들어낸다는 공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결정해라, 나도 결정하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만일 내가 택함을 받지 못했다면 왕의 혼인잔치에 절대로 오지 않았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이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더 생깁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느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어떤 조건을 보고 택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10절에 보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데려왔다고 하죠.

사람의 심성은 믿은 다음 신앙을 형성하는 데 영향이 큽니다.

그러나 그것이 택하시는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기준으로 택하시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제비뽑기를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불복으로 걸리는 사람을 구원하기로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모태로부터 이미 나를 아셨고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만의 주권과 기준으로 구원받을 자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문은 많이 좀 택하시지 왜 적게 택하셨냐는 것입니다.

그 답은 예수님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능력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며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65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오늘 비유에서도 마을 전체가 하나님을 거부하잖아요?

전부 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살겠다고 하는 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 천국에 다 데려가실 수는 없잖아요?

그랬다면 아마 천국에서도 나를 왜 데려왔냐고 불평했을 걸요.

저는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께는 적정한 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적정선에서 택하신 적은 무리들만 하나님의 아들의 천국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때 나를 택해주신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 그 잔치에는 손님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계시록에 나온 어린양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한 사람을 셀 수 없다고 합니다.

택함을 입은 자는 주변에서는 적지만 하나님나라 전체로 볼 때는 천국을 가득 채울 만큼 풍성한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비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신 시점에서 엄중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다가 소돔과 함께 멸망했습니다.

마지막날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아내 된 교회와의 혼인 잔치를 베푸실 것입니다.

창세기 서두가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시작하죠.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결혼으로 마칩니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결말이죠.

우리는 그 초대에 응했고, 그것은 하나님도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세상 일 보러 가지 않고 이땅의 천국 잔치인 예배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예배를 늘 잔치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내게 예복이 있나 걱정되십니까?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구원받지 못하면 어쩌지, 나를 택하시지 않았으면 어떡하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길 원한다면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택함 받지 못했다면 나도 예수님을 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확신이 없으시다면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 믿고 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반드시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복된 천국 잔치에 반드시 참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