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5장1절-11절 (입술로는 공경하나)

남수연 2026. 5. 21. 21:14

 

 

https://youtu.be/S2bZqyaIMxA

 

예수님의 천국 사역이 왕성해질수록 유대교 지도층과의 갈등도 깊어갑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죠.

하나님 백성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귀신의 힘이라고 악평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고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고 단죄했습니다.

오늘은 율법처럼 지켜지던 장로들의 전통으로 다시 충돌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어긋난 신앙을 고쳐주려 하시는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완강할까요?

이미 사람에게 맞춰진 종교가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편하다면 마냥 좋은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이 내게 너무 편하게 맞춰지지 않는지 경계하며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오늘 쟁점인 손 씻는 전통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고 하죠.

예수님이 갈릴리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예루살렘 종교지도부에 이미 다 보고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현장 조사차 파견한 것입니다.

종교재판을 위한 증거를 수집하듯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조사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도 어긴다는 걸 포착한 것입니다.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율법을 해석해서 사람이 정한 세부적인 종교 수칙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전통이 율법과 동등한 권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전통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제자들이 밥 먹기 전에 손 씻는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손 씻는 전통은 위생상 밥 먹기 전에 손 씻으라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도 손이 더러웠으면 당연히 씻었겠죠.

손을 씻는 정결 의식은 복잡한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매번 그 격식을 따라 팔뚝까지 물로 씻어야 합니다.

또 모든 그릇에도 물을 끼얹는 정결법이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천주교회에서 성수를 뿌리듯, 그렇게 물로 정결의식을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종교 사회였다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무슬림들이 하루에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절하잖아요?

여자들은 히잡을 쓰죠.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걸 안 지키는 무슬림은 상상도 못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만큼 율법과 전통에 얽매어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전통대로 정결의식을 지켰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들만 정결의식을 할 수 없으니 안 하게 되었겠죠.

그래서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인물로 낙인이 찍히게 된 것입니다.

현대의 신앙에도 이런 여러 가지 교회 전통을 하나님 말씀처럼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예들이 있습니다.

신앙을 보완하기 위한 새벽기도, 큐티, 금식, 양육프로그램, 그런 경건생활을 율법처럼 지키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우월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걸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상황을 깊숙이 들여다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조사하려는 아이러니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사하겠다고 파견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조사해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눈금이 제멋대로인 자를 들이대고 길이를 재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죠.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심중엔 하나님도 조사하겠다는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경험, 지식, 선입견들이 절대적이라는 교만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자기가 가진 것을 우월하게 여기잖아요?

하나님이라고 예외가 아닌 것이죠.

사람은 그런 머리로 하나님을 조사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기가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고 자기가 정합니다.

방송인 김용0집사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젊어서부터 교회는 착실히 다녔지만 처음엔 대부분 그렇듯이 종교생활 정도의 믿음이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특별한 은혜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믿음이 식어지고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 정말 계시기나 한 건가요? 그동안 그냥 나 혼자만 그랬던 거죠?

계시다면 지금 당장 증명해 보세요

이게 김용0집사님만의 문제인가요?

신자들이 믿음이나 삶에 시험이 오면 하나님이 진짜인지 아닌지 조사하고 싶은 의심이 불쑥 듭니다.
그런데 용0씨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딱 한 자락 바람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이래도 내가 없니?’

눈에서 왈칵 눈물이 나고 하나님이 계속 자기와 함께 하신 걸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본성 중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그런 우리의 약함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그런 의구심도 풀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자기들의 종교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정하고 죽이기 위한 증거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들은 사실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조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그들을 조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 이렇게 말씀하죠.

창세기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하나님이 죄인들을 조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직관적으로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죄인들의 심판에 대해 그만큼 철저히 죄악상을 조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변명할 수 없게, 그리고 일말의 돌이킴이라도 혹시 놓치실까 봐, 더블체크를 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소돔을 조사하셨더니, 그 성에 의인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그 후 천오백 년이 지나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또 말씀합니다.

예레미야서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한 사람도 찾지 못해서, 예루살렘이 망한 것입니다.

이것이 과장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로마서에서도 다시 밝혔듯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중 한 명의 죄인인 것을 깨달았다면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죄인이기에 예수님이 주님의 의로 덮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지 조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 비추어 나를 조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신앙의 정로에서 탈선하고 종교적인 형식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그것을 드러내시지만 자기를 조사하려 하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예수님을 조사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 안에 공의와 진리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찾으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공의인 예수님의 의가 있는지 찾으십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배우고 행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서 이것을 발견하실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3. 그러나 이들의 자랑이었던 정결법이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조사하신 판결은 이것입니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선지자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시는 것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들은 어쩌면 그렇게 입으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냐, 네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왜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까?

십계명 중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명령입니다.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웃사랑을 위한 첫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먼저 가까운 혈육과 가정에서부터 하라는 뜻이죠.

하나님은 약자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자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부모입니다.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 부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평생 자식을 뒷바라지하고 아무것도 자신을 위해 남기지 못한 노년의 부모는 더욱 약자입니다.

당장 생활비가 없고 병원에 가야 해도 자식들에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모 마음이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고 싶지 않죠.

평생 허덕이고 살았던 옛날엔 노후대책이 자식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자기 사느라 힘들고 부모님 챙기기에 소홀할 수 밖에 없죠.

그걸 잘 아시기에 부모를 잘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경품까지 거셨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제5계명을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생명과 복을 오래 누리고 싶으면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면 복을 계속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부모를 잘 섬기고,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부모를 잘 공경하는 복된 신앙으로 키우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부모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예로 고르반 제도를 들어 질책하십니다.

고르반은 한마디로 이런 것입니다.

부모에게 드릴 생활비를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렸다면, 부모님께는 안 드려도드린 걸로 치자는 얍삭한 제도입니다.

양쪽으로 섬겨야 할 걸 하나로 퉁치는 것이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직업이 종교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니 재물도 명목상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이니 부모께 드릴 수는 없다는 요상한 제도를 만든 것이죠.

그래 놓고 자기 생활은 여유있게 했을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외하는 마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목석 우상신으로 아는 것이죠.

하나님을 그렇게 안다면 사실 본인들이 영적 맹인과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율법, 그런 계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들은 인간이 죄로 상실한 것을 복구하는 백신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야 죄로 망가진 인격과 인생이 회복되는 것이죠.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은 인간 사랑을 복구시키기 위한 첫 의무조항입니다.

결국 우리 믿음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얼마나 행하는냐로 진위와 가치가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사랑이 없다면 오늘 바리새인들과 다른 게 없는 것이죠.

김용0씨가 믿음이 아직 없을 때 한번은 의료선교팀과 함께 아이티 봉사를 갔다고 합니다.

당시 일도 없었고 배우 김원희씨가 권해서 머리도 식힐 겸 따라갑니다.

병원이 없는 지역으로 의료선교를 가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온다고 합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온 것과 여전히 비슷한 것이죠.

그때 표주0씨와 김수0씨와 용0씨가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술도 보여주고 사진도 찍어주는 봉사를 한 것입니다.

처음엔 귀찮은 마음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일정을 마친 밤에 찍은 사진을 넘겨 보다 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마 손을 붙잡고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그날 다섯 시간을 걸어 온 아이인데, 의료팀이 고쳐줄 수 없는 병이라 돌려보냈던 게 기억이 났습니다.

순간 그 아이와 부모가 한없이 불쌍하고 짠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그런 마음은 예전엔 느껴보지 못했다던 것입니다.

의료봉사를 끝낸 마지막 밤, 둘러앉아 평가회를 하고 손을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는 데 기도를 잘 못 하는 용만씨는 자기 옆에서 기도하는 한 의사의 기도소리만 듣고 있었습니다.

아주 왜소한 몸집의 그 의사는 공항에서부터 금고처럼 생긴 30킬로가 넘는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게 심장 초음파기계였습니다.

그 의사는 더 많은 어린이들을 고쳐주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며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김용0집사가 예수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어야 한다는 걸 늘 기억해야 합니다.

청년세대는 내 인생의 목적을 세상에 맞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내 뜻을 맞추면 하나님이 가장 알맞게 사용해 주십니다.

시편 14519절에서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게 어렵기만 한 게 아닙니다.

세상은 사랑할수록 갈증을 줍니다.

잠언에서는 말씀합니다.

잠언235,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안에 모든 축복이 담겨있음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4. 예수님께서 오늘 이 논쟁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든 종교적인 의식으로는 자신을 깨끗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자기들이 이미 깨끗하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계속 씻었다는 것이죠.

이 두 가지 오해가 각종 정결 의식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음식 정결법을 주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주변에 널려있는 우상숭배에 동화되지 않도록 음식문화를 통해 경계선을 그어주신 것이죠.

먹는 것에 경계를 두는 것은 자기를 구별하는 데 가장 효과적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를 구별하잖아요?

나는 채식주의자야.

나는 커피 안 마셔.

저녁 다섯 시 이후엔 아무 것도 안 먹어.

금식도 그런 것입니다.

안 먹음으로써 잠시나마 세속적인 삶에서 나를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이죠.

이 레위기에서 주신 음식 정결법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사도행전에서 다 해석이 됩니다.

베드로의 환상 중에 레위기의 부정한 짐승들을 보자기에 싹 다 싸서 잡아 먹으라고 하시죠.

구약시대엔 이스라엘의 무능으로 이방인들과의 격리가 필요했습니다.

신약시대엔 오히려 성도들이 능력으로 이방인들에게 다가가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는 예수님이 오시면 다 밝혀지게 되어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대로만 율법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그나마 복을 받고 죄인들끼리 행복하게 살 수 있게 주신 계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달리 충격적으로 너희 속이 더럽다고 하십니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내가 인식하고 있던, 인식 못하고 있던 이것들이 우리 안에 득실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걸 알게 되면 기대도 실망도 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성자가 아니라 태생이 그런 사람을 내가 아내로, 남편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인 자식을 내가 낳은 것입니다.

내 주변에서 나와 같이 일하고 관계하는 사람들 속이 다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 왜 저러냐고 미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 속에 있는 악한 본성을 알면 서로를 피차 이해해야 합니다.

, 이 정도로 악하고 끈질긴 본성이 손 잘 씻어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미 구약성경에서 죄를 씻을 샘을 주시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스가랴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런데 자기 스스로 계속 물로 씻으며 깨끗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이 깨끗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는 성령께서 자기 속 깊은 곳을 보여주시고 나서는 남을 비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19절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것은 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어느 것은 내 기질상 더 두드러지고, 어느 것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죄목들이 내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다 씻어서 깨끗하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이 손씻는 장로들의 전통을 통해 바로 이것을 들려주시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순종의 탈을 쓴 불순종을 책망하십니다.

신앙을 헛된 종교로 만들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둘 다 교묘히 피했던 것이죠.

대신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신봉하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병들고 추한지를 드러내시죠.

환부를 두텁게 감싼 붕대를 걷어내면 끔찍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의식과 전통은 그렇게 점점 깁스가 되어버린 붕대입니다.

주님이 벗기고 치료하려 하시지만 완강히 거부하며 주님을 죽도록 미워하는 것이죠.

내가 종교적인 형식과 말로만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는지를 늘 조사합시다.

오히려 말씀이 매일 나를 조사하시도록 말씀 앞에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과연 얼마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자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성이 입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잘 지키되 말씀의 핵심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조금씩 더 표현할 수 있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