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역이 진행되며 종교인들과의 갈등도 점점 깊어집니다.
갈등의 시작은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우리 청년 때는 주일에 근무하는 직장에 가야 하냐 말아야 하냐가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안식일 지키는 문제는 강제성이 있는 율법입니다.
안식일 노동 금지에 대한 율법이 39개나 되고 세부 조항이 수백 개가 있었습니다.
거의 안식일에 목숨 걸었다고 봐도 되겠죠.
실제로 유대인 역사에 적군이 침공했지만 안식일이라 싸우지 못해 대패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그만큼 진심이었을까요?
내면의 진정성을 쌓기 보다는 외적인 형식들을 쌓아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했다기 보다 사람을 의식한 것이죠.
우리 신앙생활도 사람들 눈에 드러나는 데 더 신경을 쓰게 되잖아요?
유대인들이 만든 촘촘한 안식일 규례는 내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종교행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고 외식한다고 하셨습니다.
쇼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민감한 안식일 문제를 피해가 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안식일 논쟁을 몰고 다니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안식일의 의미가 예수님이 주실 안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골자인데, 그걸 빼고 복음을 전하실 수 없는 것이죠.
지난 주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죠.
왜 오라고 하셨습니까?
오면 안식을 주신다는 것이죠.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가야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현실에서도 당장 쉬라고 주신 율법입니다.
엿새를 일했으면 일곱 째 날에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에게 쉬는 날이 언제 있었겠습니까?
안식일이 신기할 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쉰다는 건 당시 어떤 나라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게다가 노예까지 쉬게 하는 법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당연하죠.
권력자들이 법을 만드는 데 일하는 노예를 쉬게 하는 법을 만들겠습니까?
일요일이 법정 공휴일이 된 것은 4세기 로마 콘스탄티누스황제 때입니다.
그때 이미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교회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지키는 주일과 로마의 전통인 태양신의 날과 혼합해서 일요일을 공식적으로 쉬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이천 년 더 이전에 하나님은 안식일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안식일이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쉼을 주신 것이죠.
그러나 영혼의 안식은 안식일이 가리키는 예수님께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알고 오늘 안식일에 있었던 한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날 회당에서는 손이 마른 환자를 놓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9절,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1) 본문 바로 앞에서 이미 안식일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이 시장해서 밀밭의 이삭을 잘라 먹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밭에 낫을 대지 않는 한, 시장기를 달랠 정도 따 먹는 건 율법에서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상하고 너그러우신 품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것도 사람이 만든 법이라면 그런 걸 넣었을리가 없죠.
그런데 마침 이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을 탈곡하는 노동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안식일 계명이 본질을 한참 벗어났던 것이죠.
안식하라고 계명을 주셨더니 그조차 무거운 짐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으로 논쟁을 끝내십니다.
그렇잖아요?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으로 사람이 존재하지 않죠.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안식일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노동은 쉬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혼도 안식을 누리게 하신 것이죠.
오늘 모두가 그런 안식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2)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계속해서 안식일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당에는 마침 한쪽 손이 마른 환자가 있었습니다.
어쩌다 병을 얻어 손이 마비되어 못 쓰게 된 것이죠.
예수님이 병자만 보면 고치신다는 건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지 시험할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이죠.
10절하,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교묘한 덫을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시면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게 됩니다.
응급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일의 의료행위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안식일이라 치료를 안 하신다고 하면요?
그래도 바리새인들이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자기들이 만든 율법을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게 되죠.
앞으로 주님의 안식일 사역도 제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인정머리가 없습니까?
그 동네서 손 마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측은히 여겼다면 이 기회에 병 좀 고치면 좋겠다고 생각해야죠.
그 누구도 평생 질병과 사고를 피할 수는 없잖아요?
지난 주 인간극장은 두 다리를 잃은 김나0씨 이야기였습니다.
나0씨가 둘째를 임신하고 7개월 때였습니다.
고열로 동네 병원을 드나들던 중 갑자기 혈압이 20까지 내려가며 저혈압 쇼크가 왔습니다.
그러면 사망한다고 합니다.
혈압을 강제로 올리려고 승압제를 다량 투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손과 발쪽 혈관과 피부가 터지고 괴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손은 피부가 오그라든 상태로 겨우 건졌지만, 두 다리는 무릎 아래로 절단하게 됩니다.
2년 반 전 사고인데 이제야 의족을 끼고 보행을 시작했더군요.
사고 당시 30살이었습니다.
그 사고로 임신했던 기억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느날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이 집에서 엄마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엄마 다리를 어떻게 그릴 까 궁금했습니다.
짧아진 다리일 수도 있고, 의족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린 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다리가 있는 걸로 그릴거야.’
엄마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딸이 대답합니다.
‘엄마 다리가 있는 게 좋으니까.’
방송 중에 나0씨가 어린 딸에게 계속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미안해, 엄마가 아파서 미안해.’
몸이 아프고 지병이 있고 거동이 불편하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건강 문제는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갉아 먹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기적 중에서 왜 그렇게 병자들을 고쳐주셨겠습니까?
병든 사람들이 제일 무거운 짐을 지고 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나현씨는 환상통으로 거의 매일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있습니다.
절단 된 다리 부위가 나았는데도 마치 다리가 있는 것처럼 여전히 끔찍한 고통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발가락이 없는데도 발가락 끝이 뜨겁고, 아프고 가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질 수가 없으니 미치겠는 거죠.
환상통은 본래 신체가 있었기 때문에 그 감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예 없었던 곳에 환상통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모든 사람들은 환상통 같은 감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사람의 영에 하나님의 존재가 계셨기 때문이죠.
있지도 않은 신을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 만들어 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간지러운 데 긁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환상통 이 해결되지 않는 것이죠.
질환과 신체의 연약함은 정말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손 마른 환자 앞에 이 짐을 벗을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웃들은 자기의 인격을 무시한 채 거래를 하려고 하잖아요?
속으로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사람들은 남이 곤경에 처했을 때 진정으로 걱정해 주지 못합니다.
그 순간에도 남을 판단하고 우월한 기분을 느끼는 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함정에 빠져 막막할 때, 내 마음 알아 줄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하시듯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11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절,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생각을 할 때, 예수님만 그 사람을 질고의 구덩이에서 끌어 내시려 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시고 예수님께서 참 안식을 주십니다.
이날 안식일에 모여 율법을 공부하는 회당에서 아무도 안식을 누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안식을 공부하는 데 안식은 없는 것이죠.
세상은 발전하고 풍요롭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요즘 60대 이후에는 숨만 쉬어도 빚이 쌓인다고들 말합니다.
70대가 되어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보다 안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평안과 안식을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수록 진짜 쉼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꼭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매일 쉼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2. 그날 손 마른 병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보겠습니다.
나의 입장으로 적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덫을 놓고 노리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13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운명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 손이 오른 손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일할 수가 없으니 당연히 생계도 어려웠겠죠.
그러나 그날도 안식일을 맞아 변함없이 회당을 찾았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와 역경이 몰려와도 꾸준히 내 믿음을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회당에 오지 않았다면 그날 손을 고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 기도와 말씀의 자리는 은혜받을 자리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키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이 사람도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사건 뒤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결의하잖아요?
이미 종교인들과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상태인 것이죠.
예수님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게 옳다고 하시는 순간 회당 분위기는 험악해집니다.
그때 예수님이 자기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병을 고쳐보겠다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열심히 있는 유대교인이었을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회당에 모인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다고 하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거리에 비해 회당 안은 주님을 배척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내밀라고 하시는 순간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소문은 들었지만 만일 손을 내밀었다 예수님이 못 고치신다면?
손도 못 고치고, 안식일 율법을 어긴 걸로 회당에서 쫒겨날 수도 있습니다.
손이 나았어도 문제죠.
예수님과 똑같이 미움의 대상이 될 게 뻔하잖아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표적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무덤에서 불러내셨던 나사로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 이 환자는 생각지도 않게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싸움 한 복판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손 마른 자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손을 내밉니다.
그날 우연히 예수님을 만났지만 말씀에 즉시 순종하고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없었다면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이 언제 마음에 그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저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 같습니다.
네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구해 내지 않겠느냐
그리고 자기를 구하려고 손을 내밀라고 하실 때,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자기 양을 지금 구하려고 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이 사람처럼 믿음으로 선택하는 결단이 있어야 무언가 일어납니다.
우리도 그런 갈등의 한 복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내 문제를 내밀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도 해결하고 영혼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손 마른 환자는 예수님 앞에 나와 마비된 손만 고친 게 아닙니다.
분명히 손의 감각과 함께 하나님께 대해 말라 있던 영혼의 감각도 선명하게 돌아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돕기 원하십니다.
정말 주님은 왜 그렇게 우리를 도우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병든 곳들을 내밀라고 하시고, 네 병든 인생을 내밀라 하시고, 막막한 상황을 가져와서 내밀라 하실 때 주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주님께 맡기고 그 과정과 결과를 기대하며 믿고 따라가십시오.
모든 것이 다시 곧게 펴지고 회복되는 은혜를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3. 병자를 치료하신 뒤 예수님은 그들의 회당을 떠나십니다.
예수님이 떠나셨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도 그들을 떠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환자를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더욱 험악해 집니다.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최근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 있었죠.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 군인이 예수님상을 넘어뜨리고 얼굴을 가격하는 영상 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한 분노가 똑같은 것입니다.
이천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는 거기를 떠나 나오십니다.
사람의 대접이나 평가를 너무 신경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불완전합니다.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내게 적대적인 사람들과는 너무 감정을 소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밖으로 나오시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왔고 주님은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에 질병의 구덩이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이 다 안식을 얻게 된 것이죠.
그런데 16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 일을 소문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종종 이런 침묵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선포가 없이 치유 사건만 전파되는 걸 막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요한삼서 1장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네 영혼이 잘 됨보다 범사가 잘 되는 데 눈길이 먼저 가잖아요?
병을 고치는 기적 자체가 주님의 목적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전국의 병자들을 다 고치러 오신 게 아니잖아요?
그 고통과 질병을 가져온 영적 사망을 고치시러 오신 것입니다.
병은 치료해도 또 걸립니다.
병든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하나님을 모르면 둘 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지나치게 퍼짐으로 종교인들과의 충돌이 격화되는 걸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필요한 논쟁과 불화에 시간을 소모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가 그들의 코 앞에 다가온 것을 전파하기도 바쁘신 것이죠.
우리가 주님께 이것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정해진 시간, 그것도 얼마의 시간이 주어졌는지도 모르는 한정된 시간을 삽니다.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수많은 정보가 넘쳐납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요즘 사람들이 하루에 접하는 정보량이 6백 년 전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접하는 정보량과 같다고 합니다.
그걸 따라가려니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것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과 시간과 건강과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에 내 힘을 더 사용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사람이 살면서 두 가지 중 어디에 더 시간을 쓰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갈라진다고 합니다.
급하게 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일, 그리고 급하지 않지만 나를 위해 중요한 일.
이 두 가지 중 어느 곳에 시간을 더 사용하는지가 삶의 질과 인생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내가 종종거리며 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그렇게 쏟아부을 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일들로 시간을 때우지 말라는 것이죠.
또 성경 묵상이나 기도는 시각을 다툴 정도로 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일에 꾸준히 투자하는 시간이 내 신앙생활의 성공을 결정합니다.
내 영혼이 잘될 것이고 결국은 범사가 잘 되는 내 인생 전체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우신 갈등관리, 시간관리를 잘 배우고 실천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마태는 이 에피소드를 이사야선지자의 예언과 결부시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아, 그래서 이사야선지자가 그렇게 예언했구나’.
그런 것이죠.
이사야서42장에 있는 메시야 예언을 가져옵니다.
18절,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절, 그는 다투지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 이 예언의 골자는 메시야가 온유와 겸손으로 완악하고 거친 죄인들을 상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도 충분히 느껴지죠.
예수님이 때로 바리새인들을 격렬하게 책망하신 것은 사람들이 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나를 건드리기 때문에 분노하죠.
내 생각과 다른 걸 주장하기에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에 대한 모욕 때문이 아니라 다만 악인들의 악을 책망하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개혁하고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성읍을 뺏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저항이 얼마나 격렬하겠습니까?
그래서 저항에 대한 응징과 폭력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정복 역사가 다 그렇죠.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를 정복하셨습니다.
제단에 놓여진 양처럼 순순히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마음을 얻고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나라를 얻은 정복자는 없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방식대로 해야 합니다.
정말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행할 때만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말씀에 자꾸 물을 타서 세상과 비슷하게 맞춰서 살면 세상이 조롱합니다.
말씀대로 살 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의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은 상해서 바스러지는 갈대도 꺾지 않으십니다.
가물가물 이제 곧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양면성이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악이 고조되어 메시야를 죽이려는 사람들, 곧 자신의 생명의 불이 꺼져갈 사람들이지만 심판의 칼로 제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서지고 꺼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 부서진 상한 갈대와 같더라도, 더 이상 타오를 소망이 없는 꺼져가는 인생이라 해도 주님께로 돌아오면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성도들은 다 그렇게 해서 다시 성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3) 21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사야선지자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버릴 것과 이방인들이 구원의 소망을 얻을 것을 이렇게 예언해 놓은 것이죠.
마태가 극렬하게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보며 이 예언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계속 공부하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 채워지고, 예수님의 인격을 더 확실히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십니다.
영원한 안식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랄 때 반드시 마음에 안식을 주십니다.
마음의 안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무거운 짐도 실제로 내려 쉬게 하십니다.
오늘 손 마른 사람처럼 삶의 결핍과 꽉 막힌 문제를 움켜 쥔 손도 주님께 내미시기 바랍니다.
상한 갈대처럼 부서지고, 가물가물 꺼져가는 것 같은 모든 상황들을 온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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