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건강으로 고생하시는 성도님들이 많으십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건강의 염려가 자꾸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젊고 건강해도 어느 집이나 부모님과 가족의 건강이 걸려 있죠.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 노부모 간병이 자식들 삶을 무너뜨린다고 하더군요.
간병지옥이라고 하잖아요?
어머니 간병 때문에 간병 빚 3억을 지게 된 아들이 있다는 답답한 기사도 보았습니다.
대기업 건설사를 다니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요즘은 건강에 대한 영상을 보면 저도 모르게 클릭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이런 본문은 몸이 아픈 성도들에겐 소망이기도 하고 절망이기도 하죠.
성경의 치유 사건은 하나님이 기도하면 모든 병을 낫게 해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면 모든 병이 다 나아야죠.
질병과 죽음은 하나님 없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던 인간의 오만의 결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인생의 고통을 겪으며 확인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고통을 치유하신 사건은 단순한 병고침이 아니겠죠.
주님이 모든 것을 다시 되돌리신다는 걸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진의를 알아야 진짜 말씀의 위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환자 치유 사건에서 세 가지 주제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치유의 영적 의미, 나병환자의 믿음, 그리고 우리 질병과 삶에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입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1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이 산에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산 아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나병환자가 있고,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있고, 각종 불행을 당한 사람들, 각자의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 시민인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산 아래의 땅을 변화시키러 내려오신 것입니다.
1. 그 중 마태는 한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만남을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1) 그것은 나병이라는 병이 구약성경 안에 특별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이던 나병에 하나님이 영적인 의미를 담아 놓으신 것이죠.
레위기에 보면 나병을 엄중히 다루도록 상세한 지침을 정해 주십니다.
나병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신 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모든 병을 심판이나 징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나병만은 예외인 것이죠.
하나님의 징계로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여럿 나옵니다.
미리암, 엘리사의 종 게하시, 웃시야왕이 떠오르죠.
미리암은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죠.
게하시는 하나님이 나아만장군의 문둥병을 고치셨을 때 그 영광을 이용해 탐욕을 채우려다 문둥병에 걸립니다.
웃시야왕은 권력이 최고에 달했을 때 종교적인 영광에까지 손을 뻗칩니다.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분향을 하려고 하죠.
제사장들의 만류도 소용없었습니다.
웃시야가 분향하러 손을 내미는 순간 하나님이 치셔서 나병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별궁에서 지낸 이야기가 역대서에 나옵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의 본성적인 교만과 탐욕이 어떤 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에 대한 심판을 무서운 문둥병을 통해서 경고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 하나님처럼 최고가 되려는 자들에게 내리셨던 병이 바로 성경의 나병입니다.
그래서 다른 병과 달리 나병은 당시엔 치료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는 것 외에 고칠 방법은 없는 것이죠.
나병은 외형적으로도 혐오스러운 병입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흉하게 변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피부가 썩어가고 고름이 나오고 연골 뼈가 떨어져 나갑니다.
그게 죄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죄는 더 흉하고 더 냄새나죠.
나병환자들은 인간 속의 죄가 병증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병을 갖고 살았던 것이죠.
나병환자들은 감염 때문에도 마을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을 떠나 마을 밖에 멀찍이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모든 예배와 신앙활동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병의 고통과 함께 철저히 격리되는 고독한 질병이 나병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닥친 죽음에 이르는 죄의 병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나갈 길을 잃었고 낙원에서 쫒겨 났잖아요?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마음을 나누며 사는 것 같지만 실은 모두가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에덴에서 쫒겨 난 가인이 외부와 단절하는 높다란 성을 쌓은 것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외인은 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는 겉옷을 뒤집어 쓰고 자신의 환부를 가리고 나왔을 것입니다.
자기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남에게 상처받는 모습도 누가 보면 창피합니다.
제가 지난 주 피부 질환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마와 목에 사마귀와 쥐젖 같은 것들이 갑자기 늘어나더군요.
이번에 제거한 숫자가 한 삼백 개는 되는 것 같습니다.
1시간 반이나 걸려 치료를 마치고 대기실로 나왔는데 저 때문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굴과 목이 울긋불긋한 채 많은 사람들 시선을 받는 게 좀 창피하더군요.
지금도 보기가 많이 흉합니다.
이 정도로도 창피한 데 나병환자가 자기 환부가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나병환자를 보면 누구나 소스라쳐 놀라 눈을 돌리게 되죠.
나병환자에게 인생은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미래도 없고 내세도 끝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공동체에서 끊어졌잖아요?
죽음 이후도 정해졌으니 그 사람은 철저히 파산한 것입니다.
2) 왜 하나님이 나병환자에게만 유독 이런 고통의 굴레를 씌우시냐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슨 병인들 인생을 다 갉아먹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사망에 이르는 죄도 나병만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해 구원 공동체에서 끊어질 것을 경고한 예는 허다합니다.
그래도 마태사도는 그런 절망적인 나병환자의 치유를 제일 먼저 기록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사실 여기에는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성경은 자신의 그런 절망적인 상태를 인식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러 나온다는 걸 보여주십니다.
내 능력으로 넘을 수 없는 어떤 한계는 신비하게 영적 각성으로 이끕니다.
우리 인생을 돌이켜 보면 살 소망을 놓고 싶은 절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우리가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청년 시절 제주도로 전도 여행을 갔던 때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가가호호 방문을 해서 사람을 만나 전도하던 때였죠.
마침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이밀며 계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루에 우락부락한 건달이 한 사람 앉아 있는 거예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웃통은 벗은 상태에서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그냥 ‘죄송합니다’하고 뒤돌아 나오려는 순간 건달이 부릅니다.
‘뭐하러 왔냐, 용건을 말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서울의 교회에서 온 청년들인데 좋은 말씀을 전하러 다닌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어디 말을 한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건달 앞에 조신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영리 소책자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듣던 건달 양반이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영접기도까지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 건달은 육지에서 잠시 요양하러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조직 간 싸움으로 칼을 맞고 제주까지 숨어 들어왔던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와 죽음에 대한 그런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조폭도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 사람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상황을 당해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이후에 나오는 사람들도 다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잖아요?
그러나 ‘이런 말도 싫다, 나를 좀 힘들게만 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고통이 극심할 땐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오해를 받으신다 해도 우리의 죽음 같은 고난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나를 찾아오셔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반드시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2. 나병환자의 믿음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창세 전에 예정하셨지만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와야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놓치면 안됩니다.
어느 날 나병환자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자기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왔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왕국을 꿈꾸는 사람들만 메시야를 고대 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선지자는 메시야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실 것을 예언했죠.
이사야35장5절,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절,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모든 장애인들은 조국의 번영을 위한 메시야 보다 내 병을 고쳐줄 메시야를 고대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당장 내 문제가 우선이잖아요?
그렇기에 맹인, 나병환자, 중풍병자, 청각장애인들이 다 예수님께로 몰려 온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병 고치시는 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조사도 안 하고 오늘 즉흥적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조사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병자의 믿음이 2절 한 절에 나타나죠.
2절,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이 자신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잖아요?
그 믿음이 백 프로가 아니었다면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죠.
만일 예수님이 못 고치시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도 난처하고 비난과 욕을 감수하고 나온 자기도 난감해지죠.
그런데도 공개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병을 고치고 인생을 뒤집을 유일한 기회인데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대충 알아 보았겠습니까?
나병을 고쳐 달라고 나온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걸 믿었다는 뜻입니다.
나병은 하나님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병이니까요.
나병환자가 절하며 나왔다고 하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까지 몰랐다 해도, 하나님의 신성이 함께 하신다는 걸 믿었다는 뜻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을 얻으려면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2) 그러나 나병환자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심을 믿었고, 그 능력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안 가는 게 있었습니다.
과연 이분이 나 같은 죄인에게 은혜 베풀 마음이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여 원하시면 저를 고쳐 달라고 조심스럽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절벽 앞에서, 막다른 길 앞에서 그런 마음이 들 때 가장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고통과 어려움을 알고 계실까.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뜻이 있으실까.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는 알았지만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지식으로는 알지만 주님의 인격에 대한 경험이 없어 똑같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려면 나와서 만나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눈에 보이는 사람들 사이처럼 인격적인 관계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배로,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부단히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와 보면, 주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 나병환자가 예수님 마음을 몰라서 걱정하며 나왔습니다.
그러나 나와서 만나보니 예수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잖아요?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예수님 앞에 나와 대화를 해 보니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길 원하셨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와 일상 속에서 자꾸 예수님을 찾으면 주님을 알게 됩니다.
3)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그런 걱정에 그게 다 무슨 소리냐고 하십니다.
말보다 더 분명한 행동으로 먼저 나병환자를 껴안으십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흉한 상처로 뒤덮인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나병환자는 부정한 사람이고 이 병자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접촉을 금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지시면 부정해지실까요?
오히려 주님을 통해 부정했던 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성막의 규례를 보면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물의 피로 제사에 사용하는 기물들이 정결하게 된다고 이미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또 손을 대신 것은 치유의 능력을 내 보내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나병환자의 마음의 상처까지 만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도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내가 왜 원하지 않겠니. 그렇게 들리죠.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못 박힌 손을 우리에게 대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죽음의 병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모르실까, 염려하지 말고 매일 예수님 앞으로 나가 몸과 마음을 만져 회복시켜 주시길 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러면 이 병고치심은 실제로는 우리의 질병과 아무 관계가 없는 말씀일까요?
노, 그렇지 않죠.
1)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은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꼭 영적인 것을 가르치실 목적만으로 고쳐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가 몸과 마음의 병으로 피폐해지길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노니 깨끗이 나으라고 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한결 같으신 주님의 이 마음을 믿고 도우심을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를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주님은 깊이 관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새신자일 때는 거기에 맞게 하나님이 자상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의 나이가 들어가면 아기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인생에서 우리를 찾아온 질고를 만났다면 스스로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질고를 맡아 주십니다.
나병환자를 보시는 마음과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절대로 다르지 않습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질병과 고난을 도와주실까요?
십 년 동안 세 번의 암치료를 받으신 한 선교사님의 예를 들으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 분이 미국에서 사역할 때 다리가 부어올라 병원을 찾았습니다.
진단 결과는 임파선암이었습니다.
열심히 선교하고 사역만 했는 데 암이라니,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시편118편을 읽던 중 이 말씀에 전율이 일어나며 큰 확신으로 믿어졌습니다.
17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무일푼 선교사가 의료보험도 없이 어떻게 미국의 그 비싼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소득층 의료지원으로 돈 한 푼 안 내고 혈액암 치료를 받게 됩니다.
8번의 항암치료로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몸이 회복되자 다시 사역에 뛰어듭니다.
4년 뒤 다시 암이 재발합니다.
다시 4번의 항암치료를 견디고 완치 판정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두 번이나 암을 겪고 나니 암환우들을 위로하는 병원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고 상담하고 기도해 주는 사역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얼마 뒤 다시 암이 재발했습니다.
이번엔 어느 항암제도 듣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임상시험 중인 신약 항암제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임상 실험 대상이 되어서 이 약 저 약을 투여합니다.
맞는 약이 없어 몸은 더 이상 견딜 수없을 만큼 쇠약해졌습니다.
이게 끝인가보다, 포기한 상태에서 의사가 다시 한번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암은 여전히 있었지만 일반 항암제로 치료가 되는 암으로 성질이 변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항암치료를 하고 다시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이 총 십 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돈 한 푼 못 벌었는 데 십 년 동안 누가 먹고 살게 하셨습니까?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치료비 누가 지불해 주셨습니까?
누가 자녀들이 미국 대학을 훌륭하게 졸업하도록 기르셨습니까?
그 힘든 항암을 말씀으로 견뎌내도록 힘을 누가 주셨습니까?
이 선교사님은 그래도 암과 싸웠던 십 년 치료 기간은 낭비된 시간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암과 싸우며 버티던 십 년이 자기 사역이었구나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통과 싸우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해도 그게 성도들의 믿음의 일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질병과 시련은 길고 지난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견디고 인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도의 삶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선물과 위안을 주시며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회복을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손을 내밀어 우리 병든 손을 붙드시고 우리 삶의 끝까지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갖고 태어난 병이야말로 사망에 이르는 병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치유하심으로 이 죽음의 병을 고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멀리 숨어서 볼 때 나병환자는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나오는 순간 이 사람은 주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고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과 나 사이에 실제로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육신을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돕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듯이 삶의 모든 어려움 중에도 예수님께 나가 도우심을 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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