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보고 하나를 고르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셋 중에 어느 것이 제일 어려울까요?
다 어렵지만 오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도 지키는 게 쉽지 않죠.
오늘만 해도 벌써 누군가를 비판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아닌 이상 비판하지 않고 산다는 건 불가능일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천국시민의 법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실제로 천국이 그런 곳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 생활은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죠.
그렇게 살지 못해서 인간 세상이 이렇게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조금만 내게 잘못하면 원수가 되고 철천지 원수도 되죠.
늘 염려하며 살고 쉬지 않고 남을 비판하며 살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사는 게 괴롭고 또 사는 모습이 추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천국과 이 땅의 차이를 이렇게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기만 해도 천국일 것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직장인들 70%가 업무보다 사람 관계가 더 어렵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의 고민 1위도 인간 관계라고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줄 알았는 데 좀 의외죠.
살면서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 압도적으로 큽니다.
비난하는 말 한마디가 종일 사람을 우울하게도 하고 평생 가기도 합니다.
서로 비판하고 깎아내리는 관계에서 천국은 없는 것이죠.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가 하지 말 것을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은 할 때, 그나마 나와 내 주변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수십 년 다닌 신자들을 보면 신기할 만큼 큰 변화가 없죠.
오늘 말씀이 비판하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고치고 우리 삶에 천국을 이루어가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왜 비판하면 안 되는지 세 가지로 살펴 보겠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일반적인 판단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세상사람들보다 더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나는 잘못이 없다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해당되죠.
1.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비판하는 대로 하나님께 비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여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앞에다 ‘하나님께’를 붙이면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면 맞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그 화살은 대개는 즉시 되돌아 오죠.
아마 한 개 쏘면 서너 너덧 개는 돌아올 걸요.
그렇게 대항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또 그렇게 못할 위치에 있어서일 뿐입니다.
속으로는 이미 내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똑같이 비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이뤄지기에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면 하나님이 즉시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우리의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침묵하십니다.
성령님은 계속 우리를 일깨우시고, 믿음의 길로 인도해 주시잖아요?
그런데 침묵하신다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를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화하시지 않으면 옛사람의 속성이 세력을 떨칩니다.
옛날처럼 분노와 화가 많아지고, 옹졸해지고, 그러면서 한편 불안해지고, 조급해집니다.
분별력과 지혜도 어두워집니다.
내 안의 화평과 형제와의 화목이 깨집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좋은 것들이 중지되는 것이죠.
이것은 자식들이 잘못하면 용돈을 안 주는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훈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금하신 걸 고집한 결과 심판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남의 뒷담화를 하거나 누군가를 나쁘게 비판하고 마음이 평온할 순 없죠.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기도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내 눈에 거슬리는 그 사람을 벌주고 싶었는데, 결과는 누가 벌을 받은 것입니까?
결과는 내가 제일 큰 벌을 받는 것이죠.
우리가 이런 잘못으로 종말의 심판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벗어난 언행에 대한 성령님의 책망은 그만큼 즉각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을 비판하고, 속으로라도 욕해 주면 시원할 것 같지만 판단을 잘못한 것입니다.
그 사람보다 내가 더 큰 벌을 받고 손해 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속으로 미워하고 비판했던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잘만 삽니다.
우선 내가 하나님께 비판받지 않기 위해서 남을 비판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비판 하면 안되는 두 번째 이유는, 비판 받는 사람보다 비판하는 사람의 잘못을 더 크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의 흉을 잘 보는 사람은 사람을 파악하는 판단력이 좋다고 생각하기 쉽죠.
실제로 남을 잘 비판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잘 봅니다.
자기를 잘 못 봐서 문제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비판하는 그 사람의 죄를 ‘티’라고 말씀합니다.
비판하는 내 죄는 들보라고 하시죠.
좀 과하게 비유하신 것 같죠?
사실 욕하는 사람이나 욕 먹는 사람이나 죄인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비유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티끌로 여기신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관용이고 관대하심입니다.
아무 흠이 없으신 거룩하신 예수님 눈에 우리 죄가 얼마나 혐오스러우시겠습니까?
혐오를 참으시고 우리를 보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그 모든 죄를 티끌로 보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죄를, 괴로운 세상을 살면서 날아 들어온 티끌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눈에 티가 들어가면 누가 제일 괴롭습니까?
당사자가 제일 괴롭죠.
우리 눈에 들어온 티끌 때문에 눈물 나고 따갑고 괴로웠잖아요?
약점도, 죄도, 부족함도, 모두 우리에겐 큰 고통이었습니다.
남의 성격이 어떠니, 열심히 없다느니, 믿음이 왜 안 자라느니, 그런 말 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인생에 어떤 광풍 속을 지나왔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너희는 그 티도 서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긍휼히 여기라시는 것입니다.
나의 대들보만한 죄악을 용서하시고 티끌처럼 보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안다면 말이죠.
그런데 유독 그런 남의 아픔과 약점을 꼬집어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네 죄는 여전히 대들보 같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크기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들보는 건물을 지탱하는 기축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의 인격에 죄가 여전히 기둥처럼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늘 형제의 죄를 찝어 낸다면 그건 자기 죄를 용서받은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만 달란트 빚을 용서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비유의 말씀과 같은 맥락인 것이죠.
이유를 불문하고 용서받은 자,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의 티끌도 보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남을 비판하는 사람의 본심을 더 심층적으로 보십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신 것에서 비판을 받는다는 뜻은 종말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계속 남을 비판하는 것을, 심판받을 행위로 엄중히 보시는 것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대개는 내게 대한 잘못이나 도덕적인 흠결 같은 것입니다.
가족들이라면 좀 게으르고, 집안일 안 돕고, 퉁명스럽고 그런 거잖아요?
아내들이 남편과 자식들과 그런 문제로 좀 갈등이 있죠.
남자와 여자는 본성적으로 타고난 모국어가 다릅니다.
사실은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체질에 따라 말의 온도 차가 다 다릅니다.
그래서 대화를 해도 완전하게 소통이 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뭘 좀 해달라고 하면, 대개는 알았다고 하죠.
문제는 그래 놓고 바로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방 치우겠다고 하죠.
그건 자기가 하고 싶은 때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당장 하지 않는 게 누군가에겐 계속 거슬리고 불만이 차오르는 것이죠.
그런 것 때문에 주로 가족끼리 비난하고 다투게 되고 점점 관계가 힘들고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비판한다면 이미 내 기준이 법이 된 것입니다.
내 법으로 남들을 심판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죠.
나를 절대적 기준으로 생각하는 신적 교만이 바로 비판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죄목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죄보다 그걸 더 심각하게 보십니다.
성도들은 도덕적인 죄를 짓고는 뻔뻔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낮은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남을 비판하는 죄는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그 순간 나는 가장 의로운 사람이고, 가장 높은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죠.
심판할 권리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을 심판하시는 걸 불쾌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인의 심판자가 된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고 월권입니다.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어디서 옵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나보다 못하다는 교만에서 나옵니다.
교만은 절대로 천국이 아닙니다.
교만과 비판은 출생이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을 비판하는 문제를 엄중하게 다루고 계신 것이죠.
천국은 겸손이고 모두가 자신을 낮추는 곳이라 남보다 더 높은 자가 없습니다.
천국의 자녀들은 서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겨야 하는 것이죠.
비판하는 내 죄를 하나님이 더 크게 보신다는 걸 항상 기억하고 비판하는 입을 더 힘껏 단속하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비판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남의 눈의 티를 빼려다 남의 눈을 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절,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 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들보가 그대로 있는 사람이 남의 눈의 티를 어떻게 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잘못하면 눈을 빼는 거예요.
아마도 충고하다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준 일들이 있으실 겁니다.
사람의 비판과 정죄가 인격 살인이나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하잖아요?
특히 유명인들이나 연예인들의 비행이 드러나면 네티즌의 비난과 저주가 쏟아집니다.
우리처럼 한 두명에게 비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무서운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립니까?
이번 미스트롯 경연에서 허찬0라는 가수가 뛰어난 실력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허찬0자매는 전에 새롭게하소서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입니다.
일찍이 아이돌 연습생으로 참 많이 고생했던 자매입니다.
실력은 있는 데 좀 풀리려나 싶으면 대형 사고가 생기고, 또 피나는 과정을 거쳐 좀 기회를 잡았다 싶으면 억울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한 오디션프로에 참가해서 팀미션을 하던 중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허찬0자매의 음이탈로 그 조가 나쁜 점수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찬미자매가 개인 점수를 잘 받으려고 일부로 고음파트를 맡아서 팀에 피해를 주었다는 말이 떠 돈 것입니다.
사실은 성대 악화로 고음 부분을 후배들에게 미뤘다고 합니다.
후배들이 선배 대접한다고 극구 고음 파트를 떠 맡겼던 것이죠.
또 찬미자매가 연습실에 들어가며 먼저 후배들에게 인사를 하자 후배들이 다 일어나 인사하는 모습이 악마의 편집을 당한 것입니다.
방송에 앞 부분은 자르고 후배들이 단체로 인사하는 장면만 내 보낸 것이죠.
이후 인성이 나쁜 가수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입니다.
요즘 연예인들 인성 문제 터지면 큰 곤욕을 당합니다.
그때 검색어 1위가 허찬0 인성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 시선이 무서워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해를 어떻게 풀어 볼 방법도 없잖아요?
유명인도 아니고 기자회견을 해서 해명할 수도 없는 것이죠.
가수 인생만 끝장난 게 아니라 고개 들고 살 수가 없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자매는 암막 커튼을 친 방에 은둔하기 시작합니다.
죽음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유서까지 썼습니다.
찬0자매가 방문을 열고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날도 비참한 기분에 빠져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같은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찬0야, 내가 널 사랑한다.
내가 널 사랑하는 데 무엇이 두렵니.
그 음성을 느끼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울고나니 인생이 다 끝난 것 같던 절망감이 스르르 걷히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났습니다.
5개월 만에 방문을 열고 나와 식탁에 앉는 딸을 보고, 어머니는 혹시라도 딸이 민망할까 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을 차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트로트로 다시 음악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일으켜주지 않으셨다면 찬0 자매는 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롭게하소서에서 MC주영0씨가 자매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트로트는 인생의 애환을 담은 노래다, 경험 없이 흉내만 내서는 사람을 위로할 수 없다, 찬0자매가 겪은 죽을 만큼 힘들었던 고통이 트로트가수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도 우리를 위해 쓰십니다.
그래서 시편56편에서 다윗이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주영0씨 말대로 이번 경연에서 찬0자매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도를 넘는 악의적인 비난이 사람을 죽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랑 상관없는 사람임에도 괜히 비판하는 습관도 좋지 않습니다.
저도 기사를 읽고 화가 나면 가끔 싫어요를 클릭합니다.
그것도 개인에 대한 기사라면 자제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도 분노와 비판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 박신0씨가 얼마 전 세바시 강연에 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배우에서 화가가 되었는지를 이야기 하더군요.
그런데 뜬금없이 어린 시절 아픈 추억을 꺼냅니다.
초등학교 때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무거나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고 합니다.
박신0 어린이가 신나서 사과 그림을 그렸다는군요.
지금 그림의 화풍을 보아서 뭔가 독창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게 무슨 사과냐며 그 학부모와 반 아이들 앞에서 크게 혼을 냈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박신0씨가 얼른 뒤에 서 있는 엄마를 쳐다 봅니다.
엄마의 당혹하고 슬퍼하는 그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박신0씨 나이가 육십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날의 그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격해지고 눈에 눈물이 맺히더군요.
한 사람의 비난이 한 사람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새겨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각자 잊혀지지 않는 누군가의 비난과 비판와 욕설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한마디 때문에 비참해졌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인 가족끼리, 형제끼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면 우리는 어디가서 위로를 받겠습니까?
친한 관계라고 아무 말이나 다 용납되는 게 아닙니다.
친한 관계에서 받은 비난과 비판은 더 큰 상처가 되잖아요?
그렇기에 가족 간, 공동체 안에서도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요즘 매일성경에서 요한복음을 묵상하고 있죠.
예수님이 무지하고 억지 부리는 유대인들과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화하십니까?
친할수록 존중하고 자식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가족들 간에 비난과 조소와 조롱하는 언어를 삭제해야 합니다.
존중하고 애정어린 말을 가족끼리 하는 게 오글거리고 어색할 수도 있죠.
가족끼리 왜 이래,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족끼리 비판하며 무시하고 상처 주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오늘 4절에서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는 말의 원문은 조롱이 담긴 말투로 되어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조롱하고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는 것입니다.
‘나 이젠 담배 좀 끊어야겠어.’
‘퍽이나 끊겠다.’
그런 것이죠.
우리가 비난하고 못마땅한 것은 물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계속 고치지 못하는 약점을 보면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죠.
속으로 그냥 조소하고 마는 것이죠.
그렇게 남의 티가 아직도 거슬린다면 절대 티를 빼주겠다고 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그 티로 인해 고생하고 욕먹고 아파하는 게 나도 가슴이 아프다면 그때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함께 약점을 극복하자는 권면으로 서로가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이 남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공감하지 못합니다.
남의 약점을 내가 감싸 안으려는 생각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서 괜히 남의 눈에 티를 빼주겠다고 큰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왠만하면 모른척 해 주어야 합니다.
허물을 그냥 덮어 주는 게 최상입니다.
그게 성경적입니다.
베드로전서4장8절에서 말씀하셨죠.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나와 관계없는 사람의 불찰도 가십거리로 삼는 세상에서 내게 지은 죄까지 덮어줄 수 있다면 이미 천국이 임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 같이 작은 교회는 더욱 서로의 단점이 잘 드러나잖아요?
그것은 작은 교회의 큰 강점입니다.
서로가 약점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도록 기도해 줄 수 있으니까요.
죄를 덮어주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우리가 가족과 형제의 죄를 대하는 최선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비판은 자연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시민에게는 금지된 것입니다.
기분대로 속 시원하게 비판하는 죄를 짓고 나면 찜찜합니다.
내 성격대로 사는 게 절대로 좋지 않잖아요?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선을 적극 행하며 사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악해지는 것보다 선해지는 게 더 강한 것입니다.
오늘 돌아가서 내 가족을 보며 내 눈이 또 못 마땅한 것을 찾아 내겠죠.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비판하는 대로 하나님은 나를 비판하신다.
비판받는 상대보다 비판하는 내 죄가 더 크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들보 같은 내 죄를 티끌로 보시는 것처럼 남의 잘못을 작게 보자.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면 티를 꺼내 줄 생각을 말자.
저절로 그렇게 되는 날은 이 세상에선 절대로 안 옵니다.
내 의지를 다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비판 지옥이 아닌 천국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태복음8장1절-4절 (첫 번째 치유) (0) | 2026.03.19 |
|---|---|
| 모래 위의 집, 반석 위의 집 (마태복음7장21절-29절) (1) | 2026.03.12 |
|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6장24절-34절) (1) | 2026.02.26 |
|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태복음5장38절-48절) (0) | 2026.02.13 |
| 소금과 빛 (마태복음5장13절-24절) (1) | 2026.02.04 |